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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

 

 

 

 

 

 Inner Link

 

천재와 천재의 고독한 아내 그리고 혁명의 배신

 

 

 

이오시프 스탈린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돌프 히틀러

레온 트로츠키

마야코프스키

마르크 샤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에드워드 웨스턴

헨리 포드

프랑코

앙드레 브루통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베니토 뭇솔리니

체 게바라

 

  류의 역사를 통틀어 불의와 압제가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억압받는 대중이 다른 집단을 대리로 하지 않고도 그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20세기가 채 저물기도 전에 그 꿈은 다시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는데 다소 무식하고 성차별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남성들이 꿈 꾸는 방식의 혁명이 부딪친 한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성들이 꿈 꾸는 혁명이란 모든 걸 불태우고 파괴한 뒤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방식이지만 여성들이 꿈 꾸는 방식은 그와는 좀 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다. 디에고가 프리다와 결혼한지 두 달 만에 그가 혼신을 다해 지원했고 그 스스로가 만들다시피 한 멕시코 공산당은 디에고를 제명했다. 당시 당서기장이었던 디에고는 멕시코 소시민 계급 출신의 어용화가 '디에고 리베라 동무'의 제명을 공식선언했다. 그는 선언을 마친 뒤 주머니에서 찰흙으로 빚은 권총을 꺼내 탁자 위에 놓고 망치로 부셔 버렸다고 한다. 공산당은 그의 자유분방함을 의심해 제명했고, 산 카를로스 미술학교는 그가 너무 혁명적이라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디에고는 이렇듯 자신의 제명 처분에 대해서 야유를 보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제명을 고통스러워 했다. 혁명으로부터 버림받은 모든 예술가들, 마야코프스키, 마르크 샤갈, 쇼스타코비치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그 역시 걸어야 했다. 그것은 형극의 길이었다.

  디에고는 환상에서 깨어났고, 그 곁을 프리다가 지켜 주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비난하는 당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모두 청산했다. 이 무렵 디에고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프리다는 건강이 매우 좋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작품을 그리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는 늘 디에고와 함게 했다. 그녀는 디에고와 어디든 동행했고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그의 생활을 관리해주었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함게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녀는 디에고를 위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었다. 공산당 청년 모임으로부터 시작된 혁명 복장을 벗고, 테우아나족 여인들의 긴 주름 치마, 오악사카 지방의 블라우스 등 멕시코 원주민들의 복장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어떤 이들은 프리다의 복장과 행동을 연극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녀의 행동에서 의식(意識)적인 측면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녀의 의식(儀式)이기도 했다. 프리다 부부는 결혼 직후 많은 어려움을 함께 했다. 많은 이들이 디에고를 비판했고, 끝없는 정치 논쟁은 이들 부부를 키치게 만들었다. 이 무렵 프리다는 병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하고 말았다. 그들은 잠시 멕시코를 떠나 미국에 가기로 했다. 그들은 미국에서 사진작가 에드워드 웨스턴을 만났다. 웨스턴은 프리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녀는 디에고의 곁에 있는 작은 인형 같았다. 그러나 키만 작을 뿐 강하고 아름다웠다."  디에고는 미국 생활에서 많은 것을 발견하고 일부분은 흡족해 하기도 했지만 프리다는 미국 생활을 그다지 즐기지 못했다. 낯익은 풍경과 사람들로부터 너무 많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아이들을 돌보는 프리다 - 크리스티나의 아이들은 프리다의 아이들이기도 했고, 쓸쓸한 코요아칸의 집안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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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희망은 사라지고, 1945년, 캔버스에 유채, 28x3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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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스탈린을 그린 그림 앞에 자화상, 1954년, 오래된 천에 유채, 59x39cm - 디에고와 프리다를 열렬한 스탈린주의자로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잘못된 부분이 있다. 이들은 열렬한 혁명가이긴 했지만 트로츠키주의자도 그렇다고 스탈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지식인이라기 보다는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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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부서진 기둥, 1944년, 캔버스에 유채, 40x30.5cm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
 


1907년
. 7월 6일. 멕시코 교외의 코요아칸에서 독일 출신의 사진사인 아버지 곤잘로 기예르모 칼로와 멕시코 출신인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 사이의 네 딸 중 셋째 딸로 태어남.
1921년. 멕시코 최고의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 입학. 2,000여명의 신입생 중 여학생은 단 30여 명이었고 그중에 프리다 칼로도 포함되어 있었음. 의학도를 꿈꾸며 서클 카추차스에 가입. 첫사랑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를 만남. 그와의 사랑은 우정으로 변해 평생 이어짐.
1925년. 9월 17일. 프리다와 알레한드로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남.
1926년. 프리다 칼로와 자신의 첫 그림 <자화상>을 완성하여 알레한드로에게 선물함.
1928년. 알레한드로와 결별 후 좌익계 활동가였던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공산당 조직에 참가. 이 때 디에고 리베라를 만남.
1929년. 8월 21일.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하여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됨. 디에고가 공산당에서 제명당하자 그녀도 탈퇴함.
1930년. 첫 번째 임신을 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중절수술을 함. 디에고와 도미.
1931년. 평생동안 그녀의 충실한 의사가 되어주는 엘로서를 알게 됨. 오른쪽 다리에 육체적 고통이 점점 더함.
1932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함. 이때부터 그녀는 정말에 몸부림치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함. 어머니 폐암으로 사망.
1933년. 다시 멕시코로 이주.
1934년. 난소 발육 부진으로 임신 석달 만에 다시 중절 수술함. 오른편 다리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
1935년.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디에고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음. 수개월간 별거 생활.
1937년. 트로츠키와 교제하며 왕성한 작품활동.
1938년. 초현실주의의 거장인 앙드레 브루통과 만남. 니콜라스 머레이와 사랑에 빠짐.
1939년. 니콜라스 머레이와 결별 후 멕시코에서 디에고와 이혼함.
1940년. 디에고의 여자 관계 정리, 상대방에 대한 존중 등을 조건으로 디에고와 재결합.
1941년. 프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사망. 프리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 코요아칸의 푸른 집에 정착.
1946년. 뉴욕에서 척추 수술을 받음.
1950년. 영국에서 일곱 번의 척추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9개월을 보냄.
1952년. 반전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서명운동에 참여함.
1953년. 멕시코에서 회고전이 열림. 전시회 이후 건강이 급속히 악화돼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까지 절단.
1954년. 건강 악화 고생하던 중에도 6월 2일 반미 공산주의자 시위에 참여. 6월 13일 사망
 

 

 


  그도 그럴 것이 디에고는 미국에서 헨리 포드가 이룩해 놓은 그의 공장에서 더할 나위없는 감동을 받기 까지 했으며 공산주의자와 자본가 사이의 기묘한 우정을 맺기 까지 한다. 물론 디에고가 이 늙은 자본가에게 감복되었다기 보다는 그가 일궈놓은 미래의 세계에 대한 감탄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프리다는 헨리 포드가 유태인에 대한 강한 인종 차별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후 그의 집에서 열린 공식 만찬장에서 아주 뚜렷한 목소리로
"포드 씨, 당신은 유태인입니까?"하고 물어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프리다는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었고, 천재의 부인으로서 살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녀는 그저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처럼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다시 아이를 갖기로 결심했다. 그때 찾아간 포드 병원에서 그녀는 자신이 사고로 말미암은 후유증만이 아니라 선천적인 기형으로 인해 자궁이 너무 좁아 임신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독에도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이를 낳으려 했고, 다시 끔찍한 하혈 뒤에 유산하고 말았다. 디에고는 며칠 후 병원에 누워있는 그녀에게 연필과 물감을 가져다 주었다. 디에고는 이 때의 일을 '프리다의 비극'이라 불렀고, 실제로도 이들 부부의 생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프리다가 그려내는 아니, 토해내는 작품들은 이 시기의 것들이 가장 걸작이 되었다. 유산 이후 프리다는 끊임없이 데생을 하고 그림을 그렸다. 결국 디에고가 록펠러 센터의 벽화를 그리는 작업이 무산되면서 다시 멕시코로 돌아가게 되었다.

첫 번째 사고, 육신의 붕괴와 두 번째 사고, 디에고와의 만남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측에 서지는 못한다. 그를 두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예술가에게는 그의 성별과 관련없이 성(섹스)이 매우 중요한 창작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측면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그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루게 될 디에고 리베라 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1934년 여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에게 남은 거의 마지막 친구이자 동지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생이었다. 설령 디에고가 세상 모든 여인과 정분이 난다고 할지라도 피했어야 할 여인이었다.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걸 다 잃었다. 프리다는 드디어 디에고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녀에게 고난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고 매우 낯익은 존재였다. 그녀는 이 때의 고통을 한 장의 그림으로 남겼다. 배신자 디에고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와도 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그가 배반의 칼날로 자신을 후벼 판 사실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구요." 사실 디에고가 자신과 결혼한 여인의 여동생이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디에고는 프리다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인이란 사실을 망각했다. 디에고와 헤어져서 몇 달을 보낸 프리다는 다시 디에고의 곁으로 돌아갔지만 디에고는 이 일을 자랑삼아 떠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프리다 칼로와 이를 지켜보고 있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사진 우측) - 프리다와 연년생으로 태어난 동생 크리스티나는 프리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어려서부터 서로 애증으로 엮여 있던 사이였다. 1928년 프리다가 여동생의 초상화를 그려줄 무렵부터 디에고와 가까워진 사이가 된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관계는 프리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만든 태양으로부터 버림받았고, 그 허무를 잊기 위해 많은 남자들을 만났으며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녀가 일본계 미국인 조각가 이자무 노구시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으며 투신자살한 여배우 도로시 헤일의 그림<도로시 헤일의 자살>과 함께 껍질이 벗겨지고 차가운 불빛 아래 놓인 <땅의 과일들>을 그린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그녀의 의식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세계와 더욱 밀접하게 겹합하기 시작했다. 1939년 말 프리다가 파리에서 돌아왔을 때, 디에고는 이혼을 요구했고 이들은 결별했다.

트로츠키와 프리다, 디에고 그리고 앙드레 브루통

   약 프리다가 1920-30년대를 그것도 디에고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녀에 대해서 좀 더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녀의 화풍은 어떠했고, 기법 상 어떤 특징을 보여주는 화가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나 프리다의 삶은 너무나 강렬해서 그녀의 삶과 작품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며 그녀의 삶을 살펴보는 것이 곧 그녀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 보는 일과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게다가 그녀는 멕시코 혁명기에 태어나 멕시코 혁명의 좌절과 함께 했으며 스페인 내란을 지켜 보았고, 공화파 시민들이 어떻게 프랑코와 그의 팔랑헤당에 의해 살해당하는지, 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할 수 있다. 프리다 칼로가 살아온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던 것이다. 1937년 1월 9일, 레온 트로츠키와 그의 부인 나탈리아 세도바가 멕시코 탐피코항의 후끈한 열기를 받으며 유조선 루스호에서 내렸을 때 이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간 여인이 바로 프리다였고, 트로츠키가 은신처를 구한 곳도 코요아칸에 있는 그녀의 집이었다. 스탈린의 밀정들이 전세계에서 그를 쫓고 있었고, 노르웨이가 추방했으며 루즈벨트가 미국 체류를 금했던 트로츠키는 공산주의 순교자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 유산을 세상에 전파하는 타협을 모르는 순수한 혁명가였다.

   디에고와 프리다가 그를 열렬히 환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멕시코 공산당이 그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디에고에게 트로츠키는 혁명의 이상 그 자체였고, 이념을 위해 스스로를 송두리째 희생시킨 인물이었다. 디에고는 그를 위해 당시 멕시코의 신임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에게 그의 입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카르데나스는 트로츠키를 위해 자신의 전용열차를 보낼 만큼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기까지 했다. 코요아칸에 머물게 된 트로츠키는 이곳을 트로츠키파 국제노동자 연맹의 본부로 삼았고, 프리다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프리다가 아주 깊은 관계였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디에고와 프리다 부부의 결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디에고 리베리와 트로츠키, 앙드레 브루통의 만남이었다. 트로츠키를 만나 재야 혁명 예술가 국제연맹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위해 멕시코 시티를 방문한 브르통은 곧 프리다에게 매료되었다. 그러나 브루통은 단지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그린 그림의 깊이와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그는 프리다의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 이미 프리다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디에고는 그녀가 첫 번째 전시회를 위해 뉴욕으로 떠나는 것을 결별의 구실로 삼았다.

  디에고의 혁명은 사랑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프리다의 해방은 남자들과 동등해지고 독점적인 사랑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프리다 칼로는 사진작가 니콜라스 머레이를 만나 수개월 간 함께 지냈고, 그와 함께 지내는 동안 그녀는 18살 때의 끔찍한 사고 이전의 프리다처럼 행동했다(사진에 사람의 마음이 실린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증거는 니콜라스 머레이가 프리다 칼로를 촬영한 사진들인데 그의 사진만큼 프리다를 아름답게 담아낸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뉴욕에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과 저명 인사들을 만났고, 그중에는 무용가 마사 그레이함, 화가 조지아 오키프 등도 있었다.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에 대해 애써 무관심한 척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가는 동안 결코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리라. 당신은 지친 나를 안아주었고 어루만져 주었지. 너무도 작은 이 세상에서 시선을 어디로 향해야 하나? 너무 넓고 깊어라! 이제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 아득함. 오직 현실만이 존재한다. 그랬다. 항상 그랬다." 1937년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프랑스 파리의 피에르 콜르 화랑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초청을 받아 디에고의 곁을 떠난다.

초현실주의와 프리다 칼로

  리에서 프리다는 앙드레 브루통의 집에 머물면서 초현실주의자들이나 이브 탕기, 피카소 등과 같이 저명한 화가들에게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바실리 칸딘스키는 그녀의 그림에 감동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전시장의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뉴욕에서처럼 파리에서 행복하지 못했다. 브루통은 그녀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고, 프리다는 그의 집에서 만나게 된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실망했다. 프리다가 파리의 지식인들에게 어찌나 깊은 혐오감을 느꼈던지, 머레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들이 어찌나 썩었는지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예요. 정말 너무 심하네요. 이 예술까인 척하는 파리의 멍청이들과 일을 하느니 차라리 톨루가 시장 바닥에 앉아 옥수수 부침개나 파는 게 낫겠어요. 난 디에고나 당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수다와 현학적인 토론에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중략 … 세상에! 다닞 무엇 때문에 유럽이 곪아 터지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이 무능력자들이 히틀러나 뭇솔리니 일당을 불러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젠 정말 잘 알겠군요."

  프리다가 멕시코 시티로 귀국했을 때 그녀를 기다린 일은 니콜라스 머레이가 결혼하게 되어 그녀를 떠나야 했고, 디에고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른 자화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이 작품 상단에 적힌 악보와 노랫말은 "알겠니, 내가 날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파리에서 발견한 것은 파시즘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유럽 지식인들의 몸짓이었고, 껍데기만 남은 초현실주의였다. 그녀는 이런 경험을 통해 분명히 초현실주의적인 화풍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초현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강변했다. 하긴 그녀의 말이 옳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작품은 철저히 현실이었고, 그것이 현실이므로 더욱 슬펐다.

  1941년 초 디에고는 더 이상 프리다가 없는 삶을 견딜 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리다도 마찬가지였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샌프란시스코로 불러 두 번째 청혼을 했다. 1949년 디에고 리베라의 창작활동 50주년을 기념하여 국립미술학교에서 개최된 성대한 전시회에서 프리다는 처음으로 디에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글을 발표했다.

"나는 내 남편 디에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우스운 일이게 되겠지요. 디에고가 한 여자의 남편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애인으로서의 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성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그를 아들처럼 다루며 이야기한다면 그건 디에고에 대해 묘사한다기 보다 내 자신의 감정을 묘사하거나 그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 묘사하는 일일 뿐입니다."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 부자, 부녀, 확실하고 모호한 여러 관계들

  리다와 디에고 부부를 각각 별도의 장에서 다룰 생각으로 이 글을 만들면서 곤혹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몇 차례 지나갔다. 그건 애초에 내가 생각을 잘못했거나 아니면 이들 사이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심 같은 것이었는데, 그만큼 이 두 사람을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페미니즘적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디에고 리베라 같은 그런 개망나니가 따로 없을 것이고, 프리다 칼로에 비하자면 그의 중요성은 한 없이 왜소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역사적으로, 미술사적으로 보자면 디에고 리베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거물이다. 게다가 나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디에고와 프리다는 서로 증오한 만큼 아니 이 표현은 적절치 않다. 사실 이 두사람의 관계를 적절히 표현할 수 있을 만한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이 두사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마치 뱀이 서로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것처럼 이어져 있다. 참고로 이 때의 뱀은 사악함의 상징이 아니라 지혜와 생명의 상징일 것이다.

  프리다에게 디에고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눈 멀고, 마음을 내주는 그런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고통스러운 것이긴 했으나 프리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고백하고 있듯이 자신의 이마에 마치 불상에서 광명을 비춘다는 백호(白毫)처럼 디에고를 박아두고 있다. 프리다의 수많은 자화상들을 보면서 문득 보살을 그린 불교의 탱화가 연상되는 까닭은 그녀 자신이 삶의 비의(秘意)를 깨달은 자의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프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하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들과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이 오직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 이들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

프리다 칼로, <매우 추한 자화상> - 스스로 'ugly'란 제목을 붙인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지만 개인적으론 그녀의 자화상 중 가장 맘에 드는 그림 중 하나이다. 글쎄, 그녀의 눈빛이 가슴에 와 닿아서 그럴까.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다빈치/ 2001년 -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가 멕시코에서 불문학을 강의하다가 만나게 된 프리다와 디에고의 삶에 푹 빠져 쓰게 된 책이다. 두 사람의 삶이 정제된 문체로 잘 정리되어 있고, 읽다보면 감동받을 만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 올려진 프리다에 대한 이 글 역시 이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알려 두는 바이다.(필독)

『멕시코 혁명사』/ 백종국 지음/ 한길사/ 2000년 - 멕시코 혁명은 20세기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이지만 우리의 관심이 주로 구미에만 집중되어 있는 나머지 그동안 소개가 잘 되어 있지 않았던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책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멕시코 혁명사라는 의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책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판초 비야와 사파타와 함께 그 시대를 탐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 에드워드 루시 스미스 지음/ 남궁준 옮김/ 시공사/ 1999년 - 제목 그대로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미술에 대한 개론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책이다.

『멕시코 벽화운동』/ 남궁준 지음/ 시공사/ 2000년 - 비록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용은 별로 없지만 당시 멕시코 벽화 운동을 이끌던 시케이로스, 오로스코, 디에고 리베라 등을 중심으로 당시 멕시코 벽화 운동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는 좋은 책이다.

영화 프리다 칼로 팬사이트 - 아직 국내에는 개봉되지 않았지만(조만간 개봉될 예정인 듯) 셀마 헤이악 주연으로 프리다 칼로의 일대기가 제작되었다. 아직 보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 께름직하긴 하지만 그녀의 생애를 연애와 사랑 중심만으로 풀어가기 쉬울 것 같다. 할리우드의 인물 영화들 특히 여성에 대한 영화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프리다 칼로의 세계(영문)

조지 이스트만 사진 박물관(영문) - 한때 프리다와 좋은 사이를 유지했던 뉴욕의 사진가. 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한 프리다의 여러 사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스모그넷(영문)
 

 


   푸른 집
(코요아칸의 집을 이렇게 불렀고, 프리다 기념관이 되었다)과 철제 코르셋(척추의 부상으로)의 견고한 이중 감옥에 갇힌 프리다가 디에고에게 바친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인간이 신을 창조하고 그에게 경배를 보내든 결국 경배를 보낼 나란 존재가 없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광명의 빛이었으며 메마른 대지로부터 솟아오르는 한줄기 감로수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 어머니의 마지막 적금 통장을 털어 달아나듯, 신과 자연과 생명의 넘쳐나는 사랑을 인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디에고 역시 프리다 곁을 떠나고자 했다. 디에고가 프리다의 곁을 떠나고자 했던 것(바람을 피웠다거나 외도가 잦았다는 것은 프리다에게도, 디에고에게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음을 전제하고)은 그의 평생동안 단 한 차례의 일이었고, 그 한 번이 프리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들 부부의 재결합 이후에도 디에고는 여전했다. 그는 계속해서 놀라운 창작열을 보였고, 다른 여자들을 침대로 끌어들였다. 남자들의 혁명은 죽음을 부르는 권력이었고, 그것은 여성들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성의 혁명은 그들 스스로에게 삶의 고통과 사랑을 책임으로 짊어지웠다.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디에고, 탄생/ 디에고, 건설가/ 디에고, 나의 아이/ 디에고, 나의 약혼자/ 디에고, 화가/ 디에고, 나의 연인/ 디에고, 나의 남편/ 디에고, 나의 친구/ 디에고, 나의 어머니/ 디에고, 나의 아버지/ 디에고, 나의 아들/ 디에고, 나/ 디에고, 우주/ 디에고, 통일 속의 다양함/ 그런데 왜 나는 '나의 디에고'라고 말하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닌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것일 뿐이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디에고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녀의 푸른 집과 철제 코르셋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녀는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우주와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그림들을 그렸다.

프리다의 생성과 소멸, 에로스와 타나토스

  리다 칼로는 1950년과 51년 사이에 오른쪽 발에 회저병이 생겨 발가락을 절단해야 했고, 영국의 병원에서 골수 이식 수술을 받다가 세균 감염으로 1950년 3월부터 11월까지 여섯 차례의 수술을 더 받아야 했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누워있는 병실을 떠나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해주려고 했다. 그녀 스스로의 말대로 부서질대로 부서진 육신이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그 어느 순간보다도 맑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철제 코르셋과 석고 붕대에 공산당의 별과 낫, 망치를 그려넣었고 디에고는 그런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고통은 곧 언어였다. 프리다는 물감 대신 자신의 피를 짜내 그림을 그리는 여인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디에고는 프리다를 위해 그녀의 기념전을 열어주려고 했다. 그것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환송 잔치가 될 것임을 어쩌면 디에고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념전을 준비하는 중에 프리다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지만 디에고는 그녀의 침대를 들것에 실어 화랑으로 옮기도록 했다.

  기념전은 대성황리에 끝났고,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것은 물론 멕시코 전역에서 쏟아지는 열광에 젖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도 잠시였다. 오른발의 회저병이 도져서 결국 그녀는 오른발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다. 프리다는 "내게 날아다닐 날개가 있는데 왜 다리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수술이 끝난 후 프리다는 "한쪽 다리를 잘라냈다.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다. 내게 남은 건 정신적 충격과 형액순환마저 바꿔놓은 불균형이다. 수술한지 일곱달이 지났는데 나는 여전히 누워있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디에고를 사랑한다.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그림도 계속해서 그리고 싶다. 디에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에 하나 디에고가 죽는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뒤를 따르리라. 우리는 함께 묻힐 것이다. 디에고가 죽은 뒤에도 내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디에고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내게 그는 아들이자 어머니이며, 배우자이고, 그리고 내 전부이다." 결국 프리다는 디에고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1954년 6월 프리다의 건강은 일시적으로 호전되었고, 그녀는 회화의 새로운 세계와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도래를 위한 디에고의 투쟁에 함께 했다. 그녀는 미국의 과테말라 개입과 아르벤스 대통령(이 부분에 대해서는 체 게바라편에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비를 맞았고 결국 폐렴이 도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화장되었다.

  프리다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디에고에게 이제 17일 가량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미리 건넸다. 디에고가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 묻자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디에고는 유언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여인과 영원히 합쳐질 수 있도록 자신을 화장해달라고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돌로레스 시민묘지의 유명인사 구역에 매장했다.

  세상의 모든 여자들, 아니 세상의 모든 암컷은 그들의 몸 안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품고 있다. 이 말이 디에고 리베라를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숫컷들이 여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이 글을 쓰는 내내 남성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프리다 칼로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알 수 없는 막막함에 시달렸다. 프리다 칼로는 평생 단 하나의 생명도 그녀의 품 안에서 길러내지 못했지만 그녀는 우주의 모든 생명을 포옹했고, 디에고 리베라라는 자식을 길렀다. 이 글을 통해 나는 내 오랜 친구에게 남긴 글빚 하나를 청산하고자 한다. 부디 그녀의 마음에 흡족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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