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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머레이가 촬영한 프리다 칼로(1938)

 

 

프리다 칼로(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

 

 

 

 

 Inner Link

 

"이 출발이 기쁜 것이 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실비아 플라스

조지아 오키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까미유 끌로델

디에고 리베라

에밀리아노 사파타

시몬 볼리바르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

쥴 앤 짐

베티 블루

비트겐슈타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925년 9월 17일 오후. 작은 체구에 짙은 눈썹을 지닌 한 소녀가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충돌사고가 있었다. 그녀는 수업을 마치고 남자친구 알레한드로(그는 프리다 칼로와 같은 학교를 다니던 오빠뻘 되는 친구로 프리다는 그에게 열렬히 빠져있는 상태로 스스로 그의 약혼녀 혹은 정부로 자임할 정도였다)와 함께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 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 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한 달 동안 그녀는 석고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고, 퇴원 뒤에도 학교에 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침대에 누운 채 머리맡에 붙여놓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고 훗날 술회했던대로, 몰핀으로도 달래지지 않는 고통을 달래는 작업이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테드 휴즈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듯이,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듯이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주관적인 판단이겠지만 이 세 커플 중에서 가장 비참했던 사람을 고르라면 나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프리다 칼로를 선택할 것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경우엔 이미 알고 있듯이 매우 행복한 경험이었을 것이고, 실비아 플라스의 자살을 전적으로 남편 탓이라 할 수 없겠지만 프리다 칼로의 경우 디에고 리베라는 거의 전적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이로 인해 프리다 칼로에 비견될만큼 불행한 여성 예술가가 있다면 까미유 끌로델 정도만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디에고 리베라가 이 시대의 다른 남자들에 비해 훨씬 더 호색한이었다거나 프리다 칼로의 예술 세계에 대해 무지했거나 그녀를 덜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의 인생에서 상대방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첫 번째 결혼식 사진 - 1929년 8월 21일 프리다는 자신보다 21살 연상인 마흔 두 살의 디에고 리베라와 결혼한다. 당시 그녀의 부모는 이 결합을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처음엔 반대했지만 결국 허락하고 말았다.

 

 

 

자신의 작품 <두 명의 프리다> 앞에 서 포즈를 취한 프리다 칼로 - 프리다는 7살 무렵 소아마비를 앓았고, 그로 인해 늘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 속에 또다른 프리다를 만들어 늘 그와 함께 했다.

 

 

 

프리다 칼로가 침대에 누워 <불쌍한 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나>를 그리고 있는 모습(1936년)

 

 

 

 

<원숭이와 앵무새와 함께 한 자화상> 앞에 서 포즈를 취한 프리다 칼로(1941년),사진. 니콜라스 머레이 - 프리다의 그림에는 유독 원숭이와 앵무새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느 분의 홈피 게시판에 김명수 시인의 <앵무새의 혀>를 올려 놓았다가 이 홈피의 쥔장이 앵무새의 상징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여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고 나름대로 작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시에 대해서 늘 피교육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앵무새의 혀

김명수

앵무새 부리속에 혓바닥을 보았느냐?
누가 길들이면 따라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 아닌 말을 단한번 하고싶은
분홍빛 조봇한 작은 혀를 보았느냐

 

 

 

그녀의 새끼 사슴 그라니소와 함께(1939년)

 

 

디에고와 키스를 나누는 프리다 - 디에고는 프리다가 만난 두 번째 대형 사고였다.

 

 

 

 

 

 

병상에 누운 프리다 칼로 - 7살 때 앓은 소아마비, 18살 때의 대형 충돌사고 그리고 회저병으로 절단된 오른쪽 다리, 일곱차례의 척추 수술도 그녀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프리다 칼로, 나의 탄생, 1932, 금속판에 유채, 30.5x35cm

 


프리다 칼로, 멕시코 혁명과 식인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다

   20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두 개의 사건은 당시 정치경제문화의 핵심이었던 유럽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한 사건은 유럽 중심 제국주의와 19세기의 종결을 상징하는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21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최초의 사회혁명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아프리카 최남단 지역에서 벌어진 보어 전쟁(1900년 8월 영국군이 트랜스발을 점령하며 종전되었으나 개전 이후 농민이 주축이었던 보어인 게릴라들에게 영국 정규군이 크게 고전하였다. 영국은 보어인 게릴라들에 대응하기 위해 작전지역에 거주하는 보어인 민간인들을 강제로 소개시켜 집단수용하는 초토화 작전을 실시했고, 그 결과 수용소에 갇힌 민간인 중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에 이르는 인원이 사망하여 영국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윈스턴 처칠 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과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멕시코에서 일어난 멕시코혁명이었다. 보어 전쟁이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해가 지지 않는 제국 - 영국'과 유럽 제국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1910년 10월 5일 시작된 멕시코 혁명은 이후 다가올 러시아 혁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자 현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멕시코 전체를 휩쓴 이 혁명은 농민이 주도한 자생적인 사건이었다. 나중에 에밀리아노 사파타와 디에고 리베라편에서 좀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1910년 이전의 멕시코는 비록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은 떠났지만 사회 체제와 경제 구조는 그대로인 상황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대지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대지주들은 사병으로 무장된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열 다섯명의 지주가 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토지를 지배했고, 광활한 개인 소유지를 오가기 위해서는 지주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철도를 이용해 할 정도였다.

   그들은 마치 식민 지배자처럼 굴었고, 시몬 볼리바르 이래 계속된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유럽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가정교사를 초빙했고, 파리로 빨랫감을 보냈으며 오스트리아산 철제금고를 들였다. 멕시코의 산업 전반은 외국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광업과 시멘트 공업은 미국인이, 군수산업과 철광업은 독일인, 식품업은 스페인, 섬유업과 도매업은 프랑스인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멕시코의 독재자 디아스 대통령은 문화에 나름대로 조예가 깊은 인물이긴 했지만 멕시코 문화예술계는 뿌리없는 유럽 지향의 허례와 허식으로 치장되는 궁중예술이었다. 멕시코의 많은 예술인들이 이런 숨막히는 분위기를 피해 유럽으로 떠났고, 디에고 리베라(당시 24세) 역시 멕시코 혁명 당시엔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생활 중이었다. 물론 프리다 칼로(당시 3세)는 이 무렵 매우 어렸다. 프리다 칼로가 태어난 멕시코의 코요아칸은 시골이었고, 이 마을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사건이래 봐야 일주일에 한 번 서는 장이었을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어린 프리다가 그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 주변 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 볼리바르 강당의 작업대 위에서 '인간의 창조'를 주제로 프레스코 벽화 초안을 잡고 있던 디에고는 자신을 지켜보던 소녀를 마주 보았고, 작고 어린 소녀 프리다는 이 거인에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좀더 지켜보고 싶으니 작업을 계속하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를 통해 디에고 리베라가 그녀와의 만남을 매우 신비로운 것이며 운명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든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필연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는 여인의 삶과 살을 탐닉하던(디에고 리베라에게 식인귀란 별명이 붙은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퍼뜨린 이야기. 의대에서 해부학 수업 중 죽은 여인의 인육을 먹었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 편력 탓이 더욱 크다), 산을 뽑아 옮길 수 있건 없건 간에 거인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송두리째 들어다 바칠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를 향해 타오르는 불길, 화가 프리다 칼로

    남자를 사랑하기 위해서 화가가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프리다 칼로에게 잘 어울리는 말일 수 있을까?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 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하긴 맞고 틀리고를 따져서 될 일은 아니다. 프리다 칼로에 대해 생각해보다가 문득 그녀를 생각하는 일면에 그녀를 동정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져선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한때 나는 그림을(나는 미술을 동경하진 않았던 것 같고. 이 둘의 차이를 말하라고 하면 잘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사생대회에 붓과 팔레트를 가지고 나가는 일이 한때는 자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조금이라도 큰 규모로 개최되는 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그 날 하루는 재미없는 수업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들이 내게 맞지 않는다는 아니 허락되지 않을 성질의 일이란 걸 알고 너무 쉽게 포기해버렸다. 그후로 나의 그림 재주는 날로 쇠퇴해버렸고, 미술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살아왔다. 하긴 그런다고 멀어질 성질의 일은 아니다. 재주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까지 미치게 된 까닭은 그녀의 주장들, 그녀가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언어들이 어느 순간 비명처럼 들려 온 까닭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들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그리는 그림의 전형과 같다. 그녀의 그림은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먼저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한다. 이를테면 내 가슴엔 애시당초 그런 불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사기나 허영 같은 것 말이다.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삶을 불쌍하게 느끼면서 감상한다는 것은 이미 화력을 반이상 감소시킨다.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다. 이 말을 프리다 칼로에게 들이대면 그녀가 맞닥뜨렸던 여성으로서의 한계가 20세기 여성들이 맞닥뜨린 세계의 한계였다고 풀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성은 과연 자신의 육신과 정신으로 홀로 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프리다 칼로가 보여준 대답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에는 보잘것없는 평가에 그쳐야 했던 프리다 칼로를 되살려 낸 것은 여성주의 비평가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나에게 있어 프리다 칼로는 때로 <쥴 앤 짐>의 '잔 모로'나 '바람같은 베티'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프리다 칼로에게 드리워진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그림자를 인정하는 일이며 동시에 디에고 리베라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화가로서, 인간으로서 홀로 설 수 있었던 프리다 칼로를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프리다 칼로에게 디에고 리베라가 없었더라도 그녀는 아마 화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그렇게 유명해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화가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디에고를 만난 프리다는 그에게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1925년의 고통스러운 사고를 겪고 난 뒤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남자, 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리라 마음먹었던 남자와의 재회를 위해 서둘러 화가가 되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에게 성큼성큼 걸어들어 갔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행성이 작은 블랙홀에 빠져 들 듯이….

 

남과는 다른 프리다, 어여쁜 우리 프리다!

   리다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우울한 눈빛의 유태계 사진사로 예술적인 감수성이 강했고, 어머니 마틸드 칼데론은 스페인과 토착 원주민의 피를 이어 받아 강인했고 현실적이었다. 디아스 시절 관공서의 사진사였던 아버지는 멕시코 혁명으로 인해 직장을 잃었고, 간질을 앓고 있었다. 그는 멕시코 시티 중심부에 있었던 사진관에서 낡은 휘장을 배경으로 영성체 받는 여인이나 신혼 부부의 사진을 찍어주며 살았고, 어머니는 남편이 사실상 거의 실직 상태에 있었던 데다가 잇따른 임신으로 지쳐 어린 프리다에겐 거의 신경을 써줄 수 없었다. 실제로 프리다는 자신의 어머니를 '나의 주인님'이라고 불렀고,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보다는 유모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이건 디에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리다는 허약하고 몽상적이었던 데다가 간질마저 앓고 있던 아버지에 대해 지극히 헌신적이었고, 아버지 기예르모 역시 자식들 중에 프리다를 가장 예뻐했다. 1952년 프리다 칼로가 그린 <아버지의 초상>이란 작품 하단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다. "헝가리계 독일 출신으로 예술가이자 전문 사진사였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명석했던 나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의 초상이다. 그는 성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60년 동안 간질로 고생하면서도 결코 일을 멈추지 않았고, 히틀러에 맞서 싸웠다. 깊은 애정을 담아. 딸 프리다 칼로." 아마 프로이트가 발견했다면 디에고 리베라와의 사이에 대해 뭔가 의미심장한 해석을 내리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글귀이다.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찾아온 시련 중 가장 큰 것은 물론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이었지만 그녀를 찾아온 수많은 시련 중 가장 첫 번째 것은 프리다가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1913년 그녀는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에 불구가 왔다. 그녀를 촬영한 여러 사진들과 자화상을 보면 그녀가 즐겨 입는 기다란 치마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다리를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가 그린 프리다의 유일한 나체화에서도 프리다는아픈 다리를 성한 다리 밑으로 포갠 어설픈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린 프리다는 주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아야 했고, 프리다 칼로는 스스로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프리다 칼로의 유년 시절은 고독했다. 어머니는 늘 지쳐 있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현실에선 무능했다. 그녀의 가족 중 프리다와 가장 친했던 언니 마티타는 그녀의 나이 일곱 살 때 가출해 버렸다. 고독한 프리다는 늘 마음 속에 자신의 분신을 품게 되었고, 1939년 <두 명의 프리다>를 통해 그런 자신 내면의 분신을 드러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또 하나의 프리다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나누었다.

   화가들은 대개 자신의 얼굴을 작품으로 남긴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처럼 많은 자화상을 남긴 작가는 흔치 않다. 수많은 인물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는 말년에 이르러서야 마지 못한 듯 한 장의 자화상을 남겼을 뿐이었고, 고흐 역시 많은 자화상을 남겼지만 고흐의 경우엔 좀더 현실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동안 그림 주문 한 번 받지 못한 데다가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모델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어떤 화가도 프리다 칼로처럼 의도적으로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는 없다. 그렇다면 프리다 칼로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일까? 우리는 화가가 어째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지 그 심리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심리학에서 거울은 정체성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거울에서 낯선 얼굴을 대하는 꿈은 종종 정체성의 위기를 나타내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이 꿈꾸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겁먹게 만들 경우에 그 얼굴은 그림자, 즉 꿈꾸는 이의 보다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는 원형을 상징하곤 한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린다는 것이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무관할 수는 없다. 특히 그 화가가 프리다 칼로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고독과 고통스러운 저주의 탑에 갇힌 다나에 - 프리다

   나에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이 외손자의 손에 의해 죽게 된다는 신탁이 두려워 자기의 딸인 다나에를 임신하지 못하도록 아마도 오를 수 없을 만큼 높은 청동탑 꼭대기에 가둬두었다. 그런데 제우스가 이를 발견하고 황금소나기로 둔갑해서 다나에를 임신시키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페르세우스였다. 1925년 18세가 되던 프리다는 그 당시 멕시코 시티의 새로 생긴 명물이었던 버스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다. 사고 결과는 너무 끔직해서 프리다를 진찰한 의사들 대부분은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 프리다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이를 버텨냈지만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소아마비에도 불구하고 항해사나 유명한 여행가를 꿈꾸었던 고독하고 냉소적인 몽상가의 곁에는 가출한 언니 마티타가 신문 기사를 읽고 달려와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고 소식에 충격을 받고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같이 버스를 탔던 알레한드로는 부모의 강권에 밀려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도 오랫동안 프리다는 침대에만 누워 있어야 했는데, 프리다는 이때 자신의 침대의 천장 위치에 큰 거울을 붙여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델이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1926년 그녀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통지서 한 통을 작성했다. "레오나르도는 서기 1925년 9월 적십자 병원에서 태어나 다음해 코요아칸에서 세례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프리다 칼로였으며, 이사벨 캄포스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가 그의 대부모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태어나지 못할 아이의 출생 신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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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버스, 1929년, 캔버스에 유채, 25.5x55.5cm

   고통스러운 저주의 탑에 갇힌 프리다는 침대에서 한 발짝도 걸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방의 벽이 유일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혼신의 힘을 쏟아 결국 움직였고, 무리해서 외출을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지 삼 개월 후에는 멕시코 시티 중심부까지 버스를 타고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프리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이 되었고, 존재의 중심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열아홉이 되었고, 성숙하고 단호했으며 불같은 기질과 공격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예술적이고 다정했던 아버지와 당대의 풍속으로는 매우 도전적이었던 가출을 감행한 언니 마티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당시 부르주아적인 관습에 젖어있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심과 서로를 질투했던 연년생 동생 크리스티나를 몹시 싫어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아직 젊었다. 비록 그녀의 육신은 망가질대로 망가졌지만 그 안에 깃든 프리다의 영혼은 비록 미숙하고 때론 어리석었지만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씩 재발하는 상처와 싸웠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걸었지만 이제까지는 별로 관심없어 하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치 높다란 청동탑 꼭대기에 갇힌 다나에가 매일같이 창문을 내다보듯 프리다 역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멕시코의 현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혁명의 열기에 젖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멀리 러시아와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이었다. 그녀는 레닌이 주도하는 러시아혁명과 손문이 주도한 신해혁명의 이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28년 1월 무렵 다시 국립 예비학교로 돌아간 프리다는 공산주의 소모임에 들어갔고, 이 모임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을 만났다. 당시 멕시코는 혁명 덕분에정치적인 망명자들을 보호했고 그로 인해 많은 망명자들이 집결했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그녀가 무엇보다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미술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구원할 방법으로 미술을 택했지만 그녀는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럽게 되었고, 불행 역시 이제부터 시작된다.

혁명의 열기 속에서 꽃 핀 사랑

   시코 혁명은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암살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이끈 이들에 대한 기억은 멕시코 민중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부자들이 지배하던 세상에 대해 저항했던 혁명의 위풍당당함 역시 살아 있었다. 혁명가들이 세상을 뒤엎어 버리지는 못했지만 멕시코 민중들에게 돌아가는 혁명의 과실은 그 이전보단 확실히 풍성했다. 이제 교육은 더 이상 중산층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배고픔 못지 않게 교육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민중들도 깨달았다. 멕시코는 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서 낡은 모든 것들을 불태우고 새롭게 모든 것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대중을 위한 벽화예술가들이었다. 이전까지 흠모와 숭배의 대상이자 배워와야만 했던 유럽의 미술이 모더니즘에 중독되어 있던 시기에 멕시코 미술은 그와는 정반대의 길로 달려나갔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멕시코 미술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한때 멕시코에서 유행했던 야수파와 큐비즘은 멕시코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그들은 멕시코 원주민들의 순수한 힘과 새로운 형식과 시각을 얻었다. 그들은 예술을 일상의 뒤틀린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디에고 리베라는 전쟁(제1차 세계대전)으로 핍폐해진 유럽을 떠나 멕시코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폭발하는 생명력과 폭력, 관능적인 사랑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멕시코 르네상스'라 불렀다.

   유럽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안목을 높히고 때론 그들에게 절망하며 고통 속에 젖어 있던 디에고는 멕시코에서 정열적인 활동에 활동을 거듭했다. 1927년 여름 디에고는 소련 정부의 초청으로 몇 달간 소련에 머물게 되었다. 소련에 가기 전 그는 독일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이를 통해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소련에서 디에고는 이제 막 레닌으로부터 정권을 이어받은 스탈린의 대중적인 언변과 행동에 매료당했지만 소련 체제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실망을 품게 되었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그는 함께 벽화운동을 추진하던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와 함께 공산당 집행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신랄한 농담과 함께 대중을 매료시켰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가 만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가 이전에 만났던 다른 어떤 여인에게서도 찾을 수 없었던 것들을 그녀에게서 발견했다. 그녀의 눈에는 디에고에 대한 사랑과 흠모의 마음이 가득했고, 아직 젊은 데다가 고통 속에 터득한 그녀만의 지혜가 돋보였다. 이 두사람을 지켜보던 주변의 사람들은 아직 어린 프리다가 천재 디에고를 아이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데 충격을 받았다.

  사랑에 빠진 디에고는 코요아칸의 프리다의 집을 방문했고, 이때 그녀는 나무 위에 앉은 채 위태로운 자세로 휘파람으로 '인터내셔널'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단지 디에고의 부인이 되기 위해 그림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받쳐 무언가를 이루고자 했으며 디에고의 애인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로 그의 앞에 서길 원했다. 그녀는 디에고에게 "자신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여자"라고 말했다. 프리다는 그림이야말로 자신을 키우고 자신의 본질을 확인하는 거울이자 유일한 기회라고 느끼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았다. 디에고는 자신 앞에 선 이 연약한 여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힘에 매료당했고, 그녀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리에서 피카소와 로댕, 모딜리아니를 만났고,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만나 악수를 했던 이 천재화가 디에고 리베라가 멕시코를 벗어나 본 적도 없는 아니 주된 생활 공간이라고는 코요아칸과 멕시코 시티, 그리고 자신의 침대를 벗어나 본적이 없으며 머리 맡에 붙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모습 이외에는 그려 본 적이 없는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1929년 8월 21일 코요아칸에서 결혼했다. 프리다의 부모는 이 결혼이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이 말 만큼 이 두사람의 결혼 생활에 잘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다만 프리다가 비둘기가 아니라 매였다는 사실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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