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토마스 불핀치 지음, 이윤기 옮김 / 대원사 / 1989년 3월
가격대비 품질만족으로 읽는 그리스로마신화
최근 부쩍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신화 관련서적들을 꽤 여러 종 보고 있고, 보았다. 그리스로마신화에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토마스 불핀치"란 이름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179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리 넉넉치 못한 가정이었던 듯 싶다. 미국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것이 1776년의 일이고,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 1781년 10월의 일이었다. 토마스 불핀치는 유럽의 구체제와는 다른 신생 독립국 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지 15년 후에 태어난 토마스 불핀치의 삶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1814년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불핀치는 잠시 보스턴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다 스스로 평생을 두고 가장 후회되는 일로 손꼽을 결정을 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사업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불핀치는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소질이 없었다. 그가 재능을 보인 것은 잠시 파트타임 작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첫 책은 그의 생애에 있어 사실상 유일한 성공이었고, 앞으로도 그의 이름을 사람들 뇌리에서 떠나지 않게 만들만 한 성공이었다. 그 책이 바로 "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불핀치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인생의 남은 생애를 고전연구에 바쳤다.
좀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국의 젊은 대중(앞서 불핀치의 태생적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젊은 국가, 젊은 문화, 젊은 대중, 젊은이)에게 그들의 문명적 뿌리가 되는 서양 고전을 좀더 쉽고, 이해하기 쉽게 전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고전 대중화 사업 가운데 하나였다. 거기에 덧붙여 불핀치는 영미시의 고전들 가운데 그리스 신화를 밑바탕으로 하는 것들을 곁들여 영미시의 이해(즉, 교양)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불핀치 자신은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그리스 로마 신화" 이후에도 여러 편의 서양 고전들을 대중적인 시야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하는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원탁의 기사", "샤를마뉴 황제의 전설" 등이 그것이다.
얼마전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란 전쟁사학자의 책 "살육과 문명"을 읽고 그네들이 품고 있는 서구 합리주의 문명, 민주주의, 산업,기술적 측면의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는데, 그 뿌리깊은 자부심의 원천 가운데 하나는 "헬레니즘"의 적통 계승자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헤브라이즘"적 소명 의식과 결합하면서 서구의 윤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핀치가 행했던 일련의 작업들에는 분명 신생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자부심, 유럽의 구체제(전제 왕정, 봉건제)를 극복한 긍지 속에서 서구 문명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당시 미국 지식인의 소명이 녹아있다. 그것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단군 신화를 부각시켰던 것과 시대와 형식은 비록 다르나 본질적인 면에선 흡사하다.
대원사에서 나온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는 내가 아는 한 범우사판과 더불어 우리가 시중 서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서적 가운데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책으로 기억한다. 198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까 최근 불어닥친 신화 열풍 출판 붐과는 별로 연관이 없는 책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책은 최근 신화 전문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이윤기의 번역이다. 사실 나는 이윤기 선생이 신화전문가라고 아무런 이의없이 언급되는 것엔 동의하기 어렵다. 이윤기 선생이 본인이 그런 의중을 품고 있었다기 보다는 출판사들이 이윤기 선생의 명성과 관심을 상업적 측면에서 이용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윤기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꽤 여러 종의 그리스 로마 신화들이 있다. 물론 토마스 불핀치의 것들이다.
같은 저자의 책을 같은 번역자가 여러 차례 번역해서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책이 나올 때마다 제목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모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엔 컬러 도판을 많이 싣고 - 당연한 말이지만 서구의 회화, 건축 등 모든 예술 장르에 그리스 신화는 밑바탕이 되었기에 풍부한 자료들을 구할 수 있다 - 어떤 판본은 그리스 로마신화를 영웅, 사랑, 인간 등등으로 구분하는 형식을 취한다. 심지어는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불핀치의 같은 번역자의, 실질적으로는 분책이 필요할까 싶을 만큼 새로울 것이 없는 기획들이 범람한다. 도판 사용이 늘어나다 보니 지질면에서도 고급 용지를 사용하게 되고, 컬러 인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책값도 오른다.
같은 저자, 같은 번역자의 책을 이리저리 약간씩만 변형시킨 책들이 수 종이나 되는 상황은 저작권에 걸리는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과거 노벨문학상 특수와 같은 중복출판과 흡사해 보인다. 대원사에서 출판된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는 그런 점에서 믿을 만한 출판사의 믿을 만한 번역자의 책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중요한 부분에 대한 발췌본이 아닌 책으로 읽을 만한 책이다. 물론 이 책에도 단점은 있다. 일단 화려한 책에 낯익은 사람들이 읽기엔 서체도 다소 작고, 그림이 수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흑백이다 보니 선명치 않다.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책 뒤에 찾아보기가 없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러 이야기에서 신들이 중복 출연한다는 건데, 찾아보기가 없다는 건 결정적인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목차가 비교적 충실하게 되어 있는 덕에 큰 문제는 아니다.
모든 상품에 존재하는 가격대비 만족, 하이로우 믹스 개념을 책에도 도입한다면 분명 대원사판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는 다른 여러 종의 책과 비교해 손색 없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겉의 화려함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저렴한 가격에 가장 읽을 만한 불핀치판 그리스 로마 신화다. 물론, 청소년보다는 성인용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