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La Pianiste, 2001)
드라마 | 2002.12.20 | 129분 | 프랑스
감독 : 미카엘 하네케
출연 : 이자벨 위페르, 브누와 마지멜, 애니 지라르도, 수잔느 로다
"침몰의 사랑, 사랑의 강탈"
니가 사랑을 알아?
니가 사랑을 알아!
위의 말은 물음표와 느낌표라는 차이가 있을 뿐 사실 같은 문장이다.
그런데 물음표와 느낌표의 차이가 어떤 문장에서는 매우 크게 느껴지지만,
저런 경우엔 과연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국내 상영된 두 편의 각기 다른 <피아니스트>를 알고 있다. 일설에는 "화장실 섹스 영화"로 알려진 <피아니스트>를 보았는데, 그거 니 취향일 거라고 강력히 추천하는 바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거리의 담벼락에 애인의 등허리를 닿게 만들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애인의 뺨을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저 통증을 이해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광고 카피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구토를 느낄 수도 있다"는 옳다. 솔직히 나는 이런 류의 영화들을 보면서 내내 입으로는 웃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나쁘게 말하면 '나도 너희들만큼은 알아'라는 건방진 생각이 작동하는 것이고, 좋게 말하면 웃음으로라도 무마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예전에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보면서도 나는 내내 웃었고,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화장실에서는 이런 악담을 듣기도 했다. "어떤 개**인지 영화 보는 내내 하도 낄낄거리고 웃어서 죽여버리고 싶은 걸 참았다"는.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을 과연 에리카와 클레메라고 할 수 있을까?
광고는 깐느 영화제에서 격론 끝에 이 배역을 연기한 이자벨 위페르와 브누아 마지멜에게 한 영화에 남녀주연상을 준 적이 없다는 전례를 깨고 두 배우에게 남녀주연상을 헌정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엔 이 영화에서 브누아 마지멜이 연기를 잘 하고 못하고는 둘째로 하고, 남성 배역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브누아 마지멜의 손가락은 남자인 내가 봐도 참 섹시했고, 그가 정말 피아노를 연주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연주 솜씨도 대단히 마음에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핍쇼를 보여주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다만 지하철이 지나가는 변두리역 인근에서 포르노성 에로 영화 3편을 동시상영해주는 극장들을 본 적은 있다. 예전에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를 보기 위해 그런 극장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그 분위기란 종종 즐길만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핍쇼를 보는 기분이 그런 것일까.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남편과 아내는 가운데 유리창을 두고 마주 본다. 남편은 아내를 볼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을 볼 수 없도록 장치된 핍쇼의 교묘한 위장막. 소통의 난해함 혹은 어려움에 대해서 <피아니스트> 역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엘프리데 에리네크는 강도높은 성애의 묘사와 더불어 인간의 추함에 대해서 견디기 힘들만큼 잔인한 묘사로 정평이 나있다. (어느 때부터 "좌파 페미니스트"란 말에 자크 라캉을 들먹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걸까?) 피아니스트의 장면들에는 화장실, , 에리카의 방, 락커룸 그리고 다시 에리카의 집으로 이어지는 섹스신이라 해야할지 폭력신이라 해야할지 모를 장소들을 이동해 가며 답답한 사랑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마치 '인간은 추하다'라는 명제를 실연해보이기라도 할 양으로 말이다. 장면들을 따라 함게 이동하다보면 도대체 인간이란 것이 얼마나 추해질 수 있을까, 무력해질 수 있을까를 시험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왜 이리 내 가슴이 아픈 걸까?
학교에서는 엄격한 선생님의 얼굴로 자신의 제자에게 모멸감을 선사하는 것을 즐기며 피아노 레슨이 끝난 뒤에는 포르노 상점을 돌아다니며 남자들이 남긴 정액 냄새를 마치 산소를 들이키듯 깊이 빨아들이는 이 여인. 포르노 상점에서 자신의 제자를 만났을 때 금방 권위적으로 돌변하는 그 모습. 자동차 극장에서 남들의 성행위를 훔쳐보다 흥분해 오줌을 누는 여 교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
분명히 그녀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내 몸과 마음 한 구석에서 그녀에게 공명(共鳴)이 일어나는 걸 발견하지요. 한쪽에서는 이런 '변태'라고 꾸짖으면서도 다른 한 쪽에서는 '너도 알잖아'라며 말이다.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인간의 연구가 너무 많이 너무 깊이 진행된 것은 아닐까? 이제 그만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구호가 지겨울 때가 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세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브레히트와 하나케 감독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 영화에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주인공의 그 내레이션 하나 없다. 감독은 우리들로 하여금 연기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지만 동시에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시종일관 방해하면서 당신과 나를 관찰자의 시선에 고정시켜 두고 있다. 이 더러운 관음증 환자들아!
우리는 에리케가 자동차 전용극장의 섹스 커플을 훔쳐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리케의 성생활을 훔쳐보는 몰래 카메라가 된다. 가해자가 곧 피해자인 관계. 이것은 고스란히 에리케의 삶에도 반영되는데 에리케는 자신의 제자들을 괴롭히는 권력자의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집에서는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숨막히게 감시하는 어린 날의 보호자이자 후원자인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나게 되는 브레메. 처음 브레메와 에리케의 관계를 보자 에리케는 브레메를 자신의 제자로 되도록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브레메의 재주는 뛰어난 것이었고, 그는 그녀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 에리케는 사랑의 권력 관계에서도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즉 그녀는 가해자의 몸짓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은 그저 몸짓이었을 뿐, 에리케가 브레메에게 편지를 전하는 순간 이미 관계는 역전되어 있었다. 에리케가 브레메에게 원한 사랑이 구원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파멸이었다고 할지라도 에리케는 그것을 진정으로 원했던 것일까? 두 사람의 관계는 금방 역전되고 만다.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지켜봄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을 에리케의 입을 통해서 말한다. 사랑이란 게임을 해보자고 말이다. 하네케 감독은 관객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감독 자신의 게임 속에서 우리들을 빠뜨린다. 마치 큐브의 규칙처럼 허우적댈수록 우리는 불쾌한 감정에 사로잡히거나 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석해내기 위해 갈팡질팡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전자이든 후자이든 우리에게 고통이다. 사랑에 대해 알고 있다고 믿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반추이자 슬픈 현실과의 대면이다. 넌 사랑을 알지 못해? 아니, 안다면 그것은 너의 사랑일 뿐이야.
남자는 화장실에서의 섹스에서 나를 보라는 에리케의 고함 아니 절규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자신의 페니스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남자의 성행위는 여성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짐승적인 본능이 작동한다(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빼고)고 생각한다. 그것은 짐승이 먹이를 잡는 것, 정복자의 행위와 유사하고 은연중에 그렇게 교육받는다. 여자와의 성행위를 '따먹는다'고 말하는 은어 속에는 섹스의 다른 한 주체인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 그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과일을 내가 손을 뻗어 따내어 먹고 나머지를 버리는 지극히 원시적인 채집 행위로 격하시키기는 것이다. 거기엔 여성에 대한 그 어떤 인간적인 예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브레메에게 에리케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자신을 보라고 요구하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하고, 사정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에리케의 이런 행동들이 마치 발정난 암사자가 숫사자 앞에 납작 엎드려 자신의 음부를 들이미는 행동으로 보였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에리케가 브레메에게 편지를 전하고 자신을 위해 이렇게 해줄 수 있느냐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에리케는 권위적인 교수도, 고압적인 여성도 아니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에리케는 정상이 아니다. 그녀는 내부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을 품고 있다. 하나는 사랑 받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성공과 권위를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이란 매우 상처받은 페미니즘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만약 에리케가 남자라면 이렇게 행동했을 것이고, 그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자, 보자. 에리케는 남자 교수다. 그는 그의 여 제자들 중 괜찮은 한 명을 골라 조교나 기타 사회적인 성공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연주회나 기타 등등의 조건을 은연중에 내걸고 그녀의 성을 살 것이다. 만약 이 문제가 불거진다면 그녀 역시 원했다고 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두 패거리로 나뉘어 한 어린 여성의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념이 불러일으킨 해프닝을 안주삼아 씹어 댈 것이다. 그에 비하자면 에리케의 권위 의식이나 브레메에 대한 태도는 귀엽기 까지 하다. 결국 그녀는 상처받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에리케가 정상은 아니다.
브레메를 방으로 끌어들인 에리케. 그런데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과연 에리케가 브레메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 걸까. 아니다. 영화에서 브레메가 에리케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꼭 두 번 일어난다. 처음 에리케가 브레메에게 편지를 주었을 때, 브레메는 에리케의 편지를 읽지도 않고 무턱대고 에리케를 쫓아가 결국 거의 억지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역시 브레메는 한밤중에 에리케의 집으로 쳐들어와 다짜고짜 에리케를 때리고 강간했다. 과연 에리케가 원한 것은 그것이었는가? 그녀의 방. 침대 밑에 숨겨져 있던 도구들을 보라. 구입하고는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었을 그녀의 붉은 팬티를 떠올리면서 나는 갑자기 이 여인이 한없이 불쌍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다시 영화를 보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지가 자초한 거 아니냐, 브레메는 그저 해달라는 데로 해줬을 뿐 그가 무슨 죄가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거 같지 않나? 이 말은 대개의 강간 사건 피의자들이 하는 대사이기도 하다. 밤늦게 귀가하는 여자들은 다 나쁨 여자라고 생각해 잔인하게 죽였다는 정신병자의 말이 바로 얼마 전 뉴스를 타고 우리 집 안방까지 흘러들었던 기억이 난다. 여름철에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니 나도 모르게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말. 에리케의 상처와 달리 브레메는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가족과 함께 에리케의 연주회에 나타난다. 그리고 선생님의 연주를 너무나 기다렸다고 말한다. 에리케는 브레메를 찌르기 위해 가져온 칼로 자신의 어깨를 찌르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켜 봐 온 우리들은 그녀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잘 안다. 그녀는 다시 답답한 집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에리케는 이제 누구에게도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적은 편지를 띄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세상에 날린 구원의 메시지였는지, 나는 알지 못하며 심지어 내가 브레메의 입장이었을 때 과연 그녀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을지 자신할 수 없다. 그녀의 삶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될 것이다. 암담하기 짝이 없지만.....말이다.
이제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내가 쓴 이 글에서는 <피아니스트>를 마치 페미니즘 영화처럼 보았는데, 그 배후에는 내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해석이 자리하고 있다. 나의 다른 느낌과 해석은 앞으로 어디에서도 말할 일이 없을 것이다. 다만 "니가 사랑을 알아?" 라고 물음표를 단다면 이 문장은 틀린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이 문장에는 반드시 "나의"라는 말로 그 주체와 대상을 한정시켜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느낌표의 경우엔 말이다. 나는 문득 그 느낌표의 뉘앙스를 용납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만큼 최소한 나는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마음 한 구석에서 나의 악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사랑을 몰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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