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
이토 나리히코 지음, 강동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5월
이토 나리히코의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의 원제는 "物語 日本國憲法 第九條"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이야기"를 뜻하는 "모노가타리(物語)"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일본헌법 제9조를 둘러싼 역사와 제정된 배경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변천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 쓴 책이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법조항으로서 일본 헌법 제9조가 아니라 그 조항을 만들기 까지 일본의 근현대사가 걸어야 했던 질곡과 더불어 이 조항을 왜 앞으로도 지켜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담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이 책이 담고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토 교수가 독일 오스나브뤼크 대학의 객원 교수로 지난 1998년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체결 3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기도 하다. 이토 교수는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자로 종종 독일을 방문하곤 했는데, 1982년 독일의 "슈피겔"지 표지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하고 있다. 표지에는 칼 대신 자동차, 워크맨과 카메라 등으로 무장한 일본 사무라이가 그려져 있고, 이렇게 묻고 있다. "일본인으로부터 무엇인가 배울 것이 있는가?" 대답은 "아무 것도 없다." 이토 교수는 그것이 일본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이토 교수는 일본 헌법 제9조는 전후에 만들어졌지만 그것이 가능하게 했던 시대정신이 일본사회에서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일본 헌법 제9조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헌법 내지는 평화헌법이라 불리는 현재 일본 헌법의 핵심조항이다. 신헌법은 제9조에서 다음과 같이 전쟁포기와 비무장을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다.
1)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하게 희구하고,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 국권의 발동 내지는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및 무력의 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2)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기타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앞서 이토 교수는 일본의 평화헌법 제9조의 조항이 가능하게 했던 시대 정신이 일본 사회에서 전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우리가 잘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일본이라 하지만, 우리는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 곧바로 군국주의에 돌입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일본 내에서도 많은 평화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이 활발히 활동했었다. 이토 선생이 이렇게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황이 딜레마적인 것이지, 일본의 시대 정신 내부에 이런 면면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는 이토 선생의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다. 현재 일본의 소위 '역사 바로세우기'를 시도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관을 말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가운데 하나가 일본의 평화헌법은 외세(GHQ-연합국 군사령부), 맥아더와 미국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 일본의 자발적인 헌법 만들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므로 이토 나리히코 교수는 이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내부에 이런 평화의 정신이 있었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무리하게 보이는 주장 - 맥아더가 알고보니 평화주의자였다는, 시데하라 기쥬로 역시 평화주의자였다는 - 이 나오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맥아더에 대해서는 내가 밥벌이를 하고 있는 인천에서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자유공원 동상 철거를 떠나서도 그가 한국전쟁 당시 압록강과 서해에 30여개에서 100여개의 코발트 폭탄을 터뜨려 고의로 방사능 지역을 만들어 방어하면 된다는 주장을 했던 이란 것만 고려하더라도 평화주의자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군국주의로 접어들던 일본에서 외상을 맡았던 시데하라가 표면적으로는 합리적인 외교정책 - 중국을 대등한 외교 파트너로 인정하는 - 을 펼쳤다고는 하나 이면으로는 장쩨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뚱의 공산당 사이를 이간하는 외교 술책을 구사했으며, 그가 맥아더에게 일본 헌법 제9조와 오키나와를 미군 기지로 넘기는 것을 조건으로 천황제 존속을 빅딜(Big Deal)한 것이라는 점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다보니 이 책에 대해 좋은 이야기가 아닌 읽다보니 문제삼게 되는 부분이 앞서 나와버렸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은 이토 선생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재 일본의 문제이자 평화헌법 폐기론자들과 맞서기 위한 당신의 논리이자 딜레마이지, 일본에 평화정신이 없다고 단정하기엔 이르다. 우리는 그의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을 통해 군국주의로 달려가던 당시 일본에도 조선의 안위를 염려하고, 일본의 팽창전략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비판했던 수많은 양심적 인사들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이들이 추구한 제국주의 전략에 반대하여 우에키 에모리는 "전쟁을 천하의 대죄라고 하는 이유는 전쟁은 반드시 천지 간의 귀중하고 영적인 인명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인민들에게 사적인 싸움을 금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세계 각국 역시 서로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해서 마치 한 나라인 것처럼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나카에 조민은 '자국의 강성함을 믿고 타국의 약함을 경시하고, 자국의 문물에 심취해서 타국의 미개함을 모욕하는 폐해는 진정한 문명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이외에도 기타무라 도고쿠, 고토쿠 슈스이, 요사노 아키고, 다나카 쇼조,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는 동안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몸을 괴어 그 길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고토쿠 등은 처형당했고, 기타무라 도고쿠는 목을 매 자살해야 했던 것이 일본의 현실이기도 했다.
20세기가 막을 내리자 많은 이들이 지난 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는 반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반성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우리들은 새로운 전쟁에 휘말려 들었다. 이토 교수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1900년 9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에서 처음으로 세계전쟁의 위험성을 경고했던 사실을 에필로그에 담고 있다.
일본 헌법 제9조는, 일본 제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아시아 각국의 국경을 넘고, 민족을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을 야기시킨 것에 대한 반성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추상적인 '평화'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었다. 바로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제9조가 이런저런 시련을 받아가며 반세기를 거쳐 오는 동안에 아직 단 한 곳의 변경도 없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 소중한 의미를 우리들은 깊이 새겨야 한다. 더불어 그 의미를 국제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알려야만 한다고 나는 또한 확신한다. <본문 367쪽>
그런데 그 헌법 제9조가 현재 존폐의 기로에 서있다. 우리는 고이즈미 총리가 개헌을 내각의 목표로 하고 당선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나 일본 자민당은 지난 1956년 처음 당이 설립될 당시부터 당 강령에 자위대를 합헌으로 하기 위한 개헌을 내걸고 있었다.
이제 조금 뜬금없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한다.
내가 속해있는 조직, 그러니까 지금 내가 밥줄을 대고 있는 곳은 본의든 아니든 NGO혹은 NPO의 역할을 반반 정도 수행하고 있다. 거기에 지역문화와도 관련되어 있어 진보성향의 단체와 인사뿐만 아니라 보수성향의 단체와 인사들까지 두루 만나게 된다. 그러다보니 어떤 날은 냉탕과 열탕을 번갈아 들어갔다 나오는 듯한 사상적 경험을 하게 된다. 이곳에서 내년이면 만10년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 사이 나도 많이 변한 듯 싶다.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이전보다는 앞뒤좌우를 두루 살펴보게 되었고, 섣부르게 결론 짓지 않게 되었고, 내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더 많이 실천적으로 체감하고 있단 뜻이다. 극단에서 많이 온건해졌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야 어찌되었든 최근 몇 년 사이,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난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하여 우리 시민사회에 속해있는 인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의 시민사회에 속해있는 인사들이 우리 사회를 몹시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된다.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 역시 우리 사회의 역동성에 대해 대단히 놀라워한다는 것이다.
세계화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긍정적인 시각도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세계화를 논의하는데 있어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서도 역시 세계화는 산업혁명이 그러했듯 피할 수 없는 대세를 이룬다. 그런 관계로 요사이 시민단체 인사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영어와 함께 세계감각이다. 우리 스스로가 자각하든 말든 해외의 시민사회가 한국의 시민사회를 주목하고 있으며 그네들은 우리네 시민 사회 단체들의 역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우리들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시시때때로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불과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들이 외부의 힘을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가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숱하게 얻어왔다. 이제는 우리가 도울 때란 말이다.
그 때 일본 시민사회의 많은 양심있는 분들이 우리를 도왔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토 나리히코 선생은 한승헌 선생이 이 책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의 추천사에서도 밝히고 있듯 바로 그런 시기에 우리를 위해 많이 애써주신 분이다. 이토 나리히코 선생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유신정권 당시 일본에서 벌어진 김대중 납치 사건을 통해서였다. 그는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활동에 나섰고, 우리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단지 이토 나리히코 선생 한 분만 그리 한 것이 아니라 유신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에 맞서 우리 국내의 메아리로만 묻혀 버릴 많은 사건들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 세력에 의해 세계로 널리 전파되었다.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도 일본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한국의 일반 시민들 가운데 심지어 진보를 말하는 시민운동가들 중에서도 종종 민족 감정이 앞선 나머지 이렇듯 일본이 가진 두 가지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군범죄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미군이 주는 피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때로 "미군들이 그렇게 문제가 많고, 한국인에게 피해를 주니까 미군기지를 오키나와나 괌으로 이전해야 된다." 거나 일본이 지진으로 침몰해버렸으면 하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독도 문제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와 같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못한 역사 문제를 비롯해 현재 한국의 지배계급이 뿌리를 깊이 박아둔 친일파 청산 문제,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분단 문제 등 여러 문제들이 뭉뚱그려져 일본에 대한 증오로 표출되곤 한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한일관계, 아시아의 미래, 세계의 평화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감각이고, 세계화의 목적이어야 한다. 단적으로 오키나와는 같은 아시아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공동의 피해자들이다. 또한 그들과 우리는 미군 주둔에 따른 피해와 범죄라는 고통을 함께 나눴다. 오키나와의 많은 시민들이 한국 매향리 미군 사격장 문제를 함께 연대해 싸웠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많은 운동가들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내가 예전에는 미군기지를 오키나와로 이전하라고 얘기했는데, 이렇게 오키나와 운동가들을 만나면서 이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오키나와에도 미군기지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해마다 오사카 지역에서도 '오키나와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관서지역 집회'를 열고 있는 데 이 집회는 2천~3천명이 모이는 대규모 집회로 열리고 있다.
오사카지역 활동가들은 또 이 집회를 통해 한국의 운동을 지원해왔다. 모금을 하고 컴퓨터를 사서 매향리에 기증하고, 한국 방문단을 꾸린다.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세계 어디에서도 군대는 필요없으며 생명을,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과거 "류구"라고 불렸던 독립왕국이었으나 청에게 점령당하고, 다시 일본에게 점령당하여 혹독한 시련을 겪고, 천황제 존속을 위한 희생양으로 미국에게 팔려버린 오키나와 사람들의 마음이고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그들이 오키나와 사람이라서가 아니며, 일본 사회 내에서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 평화로운 아시아,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길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가 믿어주고, 이제 우리의 힘을 그들에게 한데 뭉쳐 보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풀릴 수 있는 실마리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연대"의 핵심은 '우리는 누구도 홀로 살지 못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 평화가 사라지면 한국도, 중국도, 세계 어느 곳도 평화로울 수 없다는 그 마음 말이다.
* 앞서 페이퍼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이 책은 몇 군데에서 외래어 표기 및 띄어쓰기 등의 문제를 보였다. 부분적으로 이토 교수의 주장이 지닌 딜레마를 이해하면서도 석연치 않은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들을 압도하고 남는 이토 나리히코 선생의 마음에 연대의 의지를 보이고자 내 마음의 별 다섯을 헌정한다. 최근 일본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좀더 이성적인 대처를 고민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읽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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