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배윤경 지음/ 이후/ 2000
오, 이런.... 종종 같은 책을 읽고, 완전히 다른 평가들을 보게 된다. "빅토르 하라와 누에바 깐시온"에 대해 쓰여진 이 책에 대해서 쓰인 다른 리뷰를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리뷰를 올리게 되었다. 평소 좋아하고, 궁금했으나 "빅토르 하라"에 대해 알려주는 책은 거의 없거나, 기껏해야 언급한 정도에 불과했다(물론 이 글을 썼던 시점과 현 시점(2010년) 사이에 약간의 진전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빅토르 하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Vladimir Mayakovsky, 1893-1930)'의 시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에서 제목을 따온 동명의 책을 통해서 였다. "민글"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나는 이 책을 당시 우리 출판의 흐름 속에서 보자면 비록 작지만 중요한 문화적 사건 중 하나로 기억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런 류의 책은 대중적이든, 전문적이든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얽힌 추억 한 토막을 더 소개한다면, 1990년 출판되어 우리 잡지계에 나름대로 참신하고 품격있는 기획으로 꾸며졌던 종합문화예술지 "예감"이란 잡지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예감"을 만들면서 함께 참여했던 기획자들이 꾸민 특집란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나 역시 우연치 않게 "예감"이란 한 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봐도 1970년대의 "마당깊은 집"이나, 1980년대 "샘이 깊은 물"이 가졌던 흐름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형태, 1990년대적인 문화적 트랜드를 선구적으로 반영하고 있었던 것에 감탄하곤 한다.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각기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인물론과 더불어 몇 편의 문화이론들을 함께 다루고 있었는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빅토르 하라"를 필두로 "김순남, 윤이상, 케테 콜비츠, 오윤, 박수근, 마야꼬프스키, 빠블로 네루다, 조명희, 밀란 쿤데라, 에이젠슈타인, 장 뤽 고다르, 스파이크 리, 마틴 스콜세스, 브레히트, 안토니오 그람시, 알튀세르와 르페브르" 등이었다. 이 책의 편제는 이후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인물 서적 등에 고스란히 반영되거나 최소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최근 붐을 이루었던 평전풍의 혹은 객관적인 자료에 바탕하여 소설적인 도입을 시도하는 등 당시 사회과학서적에 집중되었던 시류와 비교해볼 때 새롭고 참신한 시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각 인물마다 연보와 더불어 나름대로 사진자료들을 보충하여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했던 점도 이 책이 지녔던 장점이었다.
이 무렵 출간된 책 중에서 또 내 기억에 남는 책이 있는데 그것은 "박가서장" 출판사에서 박명욱(선생)이 만든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란 책이다. 당시 이런 방면의 책으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다고 글도 아주 감동적이었다. 이후 한동안 절판되었다가 최근 "그린비"에서 재출간되고 있지만, "심장은 탄환을 동경한다"는 현재 구할 길이 없다.
배윤경의 책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는 그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빅토르 하라와 누에바 깐시온"에 대한 책이다. 나는 종종 사람을 책으로, 책을 사람에 비유하곤 한다. 그렇다면 지식인은 어떤 책일까? 책을 읽고, 그 책을 보다 향상시켜 세상에 다시 토해낼 재간이 없다면 그 사람이 지식인일지는 몰라도 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늘날 인터넷 시대엔 누구나 글을 써서 세상에 내보일 수 있다. 지식인 사회에서는 글쓰기에 대해 여전히 라이센스를 필요로 하고, 요구하면서 저들만의 높다란 장벽을 쌓고, 인터넷 세상의 글쓰기와 저들의 글쓰기는 다른 것으로 차별화를 시도하지만, 난 이런 현상이 순전히 국내적인 현상이고, 지식인 사회의 엄살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의 저자 배윤경은 아마추어다.
그의 홈페이지 (http://myhome.shinbiro.com/~djbai/index.htm)에 그가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글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자신의 책을 보면서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마추어고, 아웃사이더로구나. 세상은 프로정신을 강요하지만, 라이센스를 요구하지만 아마추어가 프로보다 강할 때가 있다. 그건 좋아서 어떤 일을 하는 이들, 프로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기에 나라도 한 삽 한 삽 옮겨보자는 의지를 지닐 때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국내 출판계에서 잘 안 되는 부류의 책들이 몇 종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음악관련 서적들일 것이다. 그나마 오래도록 수명을 유지하면서 재판본까지 만든 책이 아마 안동림 교수가 현암사에서 펴낸 "이 한 장의 명반" 정도일 것이다. 이런 류의 음악 책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책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이 한 장의 명반"류의 기획으로 쓰인 클래식 음반에 관한 책들이거나 아니면 클래식 음악가들에 대한 책이 아니면, 외국 출판사들이 시리즈물로 펴낸 책, 그도 아니면 외국에선 굉장히 유명한 책이라 우연히 기획자들의 눈에 띄어 출판될 수 있었던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외의 대중음악에 대한 책들은 그나마 상업성을 갖추었다는 몇몇 유명(?) 필자들의 책인데, 그나마도 대개는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이 태반이다. 음악에 관한한 우리 출판계는 불모지나 진배없다. 그런 마당에 한류열풍이란 어찌보면 우리 특유의 호들갑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음악에 관한 책이 드문 가운데서도 특히나 "월드뮤직"에 대한 책은 더더욱 구하기 어렵다.
팝음악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미국이 월드뮤직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탓도 있을 테지만, 월드뮤직에 대한 국내 저자의 책은 배윤경의 이 책을 제외하고는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 단 두 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서남준 선생의 "월드뮤직 -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와 신현준 선생의 "신현준의 World Music 속으로"이다. 서남준의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1부에서는 각지역의 음악적 특성을 장르와 함께 보여주고, 2부에서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부터 메르세데스 소사에 이르는 월드뮤직 아티스트들을 소개한다. 신현준의 책에서는 이보다는 보다 폭넓고 복잡한 소개를 하고 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배윤경의 이 책이 중하다고 평가하고 싶은가? 그것은 이 책이 앞서의 두 책이 상대적으로 월드뮤직의 잡다한 분야를 두루 맛보기 해주는 월드뮤직 입문서라고 한다면, 이 책은 그 중에서 "빅토르 하라와 누에바 깐시온"에 대해 집중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만약 역사책을 쓴다면 통사가 필요하지만 그에 대한 개별적인 시대사 역시 필요한 것인데,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책, 그것도 월드뮤직에 대한 책 가운데 이런 개별사라 부를 수 있는 책은 내가 아는 한 이 한 권에 불과하다. 나는 순전히 나의 이기심으로 말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 수많은 책들이 출간되지만 그 모두가 반드시 필요한 책들은 아니다.
중복출판되는 고전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단적으로 국내 교육지 시장을 장악하고, 아동출판물 시장 또한 석권하고 있는 메이저 출판사들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위인전기를 살펴보라. 죄다 거기서 거기이다. 그리고 이런 위인들조차 지역적으로는 영미권과 유럽 출신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역편중이 심각하다. 어려서 편식하면 야단하는 분들이 이런 지적인 편식에 대해서는 뜻밖에 둔감하다. 그렇게 자란 우리들은 지나가는 외국인들을 피부 빛깔과 그네들의 출신 국적만 놓고서 미리부터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이 책은 크게 7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부에 해당하는 프롤로그에서는 같은 아메리카 대륙이면서도 미국의 독주로 무수히 많은 것들을 빼앗겨 버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와 그에 대한 저항과 민중의 슬픔, 희망을 담은 노래 누에바 깐시온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리고 1부에서는 빅토르 하라가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을 시작으로 플래쉬백되어 빅토르 하라의 음악적 인생을 소개한다. 그리고 다시 2부에서는 빅토르 하라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들 인민연합과 살바도르 아옌데, 미국과 CIA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 군부쿠테타를 소개한다. 3부 '누에바 깐시온 -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노래운동 누에바 깐시온에 대해 소개한다. 그리고 4부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는 빅토르 하라의 음악론을 이야기한다. 5부 '영원히 새로운 노래'에서는 빅토르 하라,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김남주와 안치환을 통해 칠레의 제3세계적 상황이 우리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어째서 월드뮤직엔 민중의 피와 땀 냄새가 배어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월드뮤직이 민중의 것으로 시작되었고, 여전히 민중의 것이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삼바가 노예들의 애환을,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급격한 도시화에 밀려난 하류인생들의, 포르투갈의 파두가 바다로 남편과 자식을 내보낸 여인들의 고통이 절절히 묻어나는 노래였음을 안다면 말이다. 나는 세계화를 단지 부정적인 의미로 보지 않는다. 지구상 온인류가 하나의 세계로 통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대세이며, 북경의 나비가 하는 날개짓이 거대한 태풍으로 성장해가듯 세상 만물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민중의 세계화는 이 책의 저자 배윤경이 소개하고 있듯 "칠레의 유명한 것이 뭔지 아십니까? 그 나라의 음악은 둘째치고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게 뭐가 소개됐습니까? 하라의 이야기는 아주 빈약한 시작입니다..." 상대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하며 궁극적으로는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에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문장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중간중간에 나오고, 저자 자신이 지적하고 있듯 잘못된 발음과 오자가 그대로 실린 것도 있다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분야나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구축된 방면의 책들은 참고할 만한 자료도 많고, 그런 만큼 책을 교정교열해야 하는 편집자도 실수를 줄여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상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에 대한 소개이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실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관점, 수준에 대해서 만큼 동의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책들이 출간될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자는 격려받을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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