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사 1.2권/ 한홍구 지음 / 한겨레신문사 / 2003년 6월
한동안 청춘 멜로 같은 분위기로 안방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모방송사의 <야인시대> 라는 TV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였다. 부천의 너른 공터에 상설 스튜디오까지 갖추고 제작을 시작했으니 그야말로 야심만만한 기획이었을 것이다. 상설 스튜디오는 지방에서 구경온 어르신들부터 인근 유치원의 어린 아이들까지 견학삼아 구경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날부터 해방전후의 역사적 공간에 대한 냉전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드라마의 인기도 함께 추락하고 말았다.
이른바 '맞장'에 대한 숭배가 극에 달한 이 드라마의 제목은 "맞장시대"로 바꾸는 것이 그럴 듯 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국가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린다. “정의(justice)를 빼버리고 크게 보면, 왕국이 범죄집단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범죄집단도 조그만 왕국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범죄 집단은, 한 지도자의 지휘 아래에서, 협약에 따라 약탈품을 나눠 가지는 결사체에 의해 묶인 사람들의 모임이다. 만약 이 악행집단이 부도덕한 무리들로부터 많은 지원자를 획득하여 영토를 획득한 후 거점을 구축하고, 도시들을 탈취하여 사람들을 복속시킨다면, 그 집단은 공개적으로 그 자신을 왕국이라고 사칭하고, 침략의 비난이 아니고 정당성을 획득하여 그 왕국은 세계적으로 인정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 사로잡힌 해적이 알렉산더 대왕에게 한 재치있고, 사려깊은 대답을 보자. 왕이 그에게 자신에게 대항할 때의 네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해적이 대답하기를 '세상을 정복할 때의 당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배로 그것을 하기 때문에 해적이라 불리고, 당신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조폭은 국가권력을 모사하고, 국가권력의 기본 속성은 조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를 침공하고 이스라엘 탱크들이 팔레스타인 아이들의 돌멩이 든 팔을 꺽어놓을 때, 소위 '국가이성'에 사로잡힌 국가는 조직화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국내 역사학자들 중 드물게 김일성을 주제로 연구한 사학자이다. 그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우리 역사학계의 아이러니이다. 물론 문제는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갈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에 있다. 그는 귀국한 뒤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여러 시민단체들과 함께 우리 사회의 다양한 질곡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병리 현상들을 경험하며 이에 대한 역사적 원인들을 밝혀나가는 작업들을 했다. 뿌리없는 병폐는 없는 법이지만, 이토록 끈질긴 역사적 연원을 가진 수구 꼴통 보수들의 원조가 있었다는 것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준 역사학자의 글을 만나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는 그간 우리 사회의 덮어져 있던, 아니 은폐되어 있던, 아니 왜곡되어 있던 여러 진실들이 파헤쳐져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야인시대>로 다시 그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긴또깡(김두한)의 신화이다. 한홍구 교수는 그런 우익 카리스마의 한 키워드로서의 김두한을 재조명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그는 또한 김두한에 대한 일말의 애정을 가지고 그를 드러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두한이 훗날 정치권에 입문한 뒤 걸어온 길을 보았을 때 그가 분명 늘 야당의 길을 걸었던 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경복궁을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 식민지 잔재라는 이유로 중앙청을 허물어 버렸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눈앞에 존재하는 진실을 허문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도록 기억될 때 비로소 바르게 세워지는 것이다. 한홍구 교수는 역사서술을 가파르게 하지 않는다. 넉넉한 그의 인상, 그대로 그는 넉넉한 포용으로 보수 역시 우리 역사의 한 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또한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다. 참된 보수가 서야 진보도 산다.
* 역사 바로 세우기와 경복궁에 대한 짤막한 곁가지....
경복궁 복원과 관련해 일부에서는 중앙청 건물을 100여년에 걸쳐 서서히 땅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경복궁의 외관은 그대로 보존되고 중앙청 역시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은 채 보존되는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이런 제의를 거절하고 중앙청을 싹 쓸어버렸다. 글쎄, 이걸 역사의 복수라고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한쪽으로는 분명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저 자들은 이 땅과 이 민족이 자기 당대에 그치고 말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해서,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었다고 해도 민족은 있었고, 민중도 살았는데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국가권력이 하는 짓을 보면 마치 이 나라 이 민족을 잠시 빌려서 통치하는 듯 하다. 일제 총독도 10년 넘어, 장구만년(長久萬年)을 내다보며 이 땅을 집어 삼키려 했는데 하물며 제 나라를 통치하는데야 그보다 더한 앞날을 내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 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