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하르툼
북경에서의
55일
행성탈출
오메가
맨
윌리엄
와일러
찰톤
헤스톤
소피아
로렌
엑스칼리버
헨리
5세
시몬
볼리바르
에밀리오
사파타
1492년,
콜럼버스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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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Rodrigo Diaz de Vivar).
일명 엘 시드는 1043년 스페인 브루고스 인근에서
탸어나 1099년 그가 탈환했던 발렌시아에서 죽었다.
그의 이름처럼 되어 버린 엘 시드(El Cid)는
본래 아랍어로 "나의 주군(mi senor)"라는
뜻이다. 걸출한 야전 지휘관으로 무어인들을
상대로 스페인 영토를 재탈환하는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며 '승리자(캄페아도르
Campeador)'라고도 불렸다. '엘 시드'라고
하면 아마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찰톤 헤스톤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를, 요즘 신세대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컴퓨터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Age of Empire Ⅱ>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예전부터 업데이트 목록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본지 좀 오래된 영화라
묵혀두고 있다가 마침 어제(2003년 6월 6일)
현충일 특집으로 해준 것을 본 덕분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어째서
현충일에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엘 시드>를
재방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스페인인이란
사실만 제외하고는 이민족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구원한 성웅 이순신 -
聖雄 : 성웅이라는 말은 가만히 따져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성'이라는
것은 종교적·제의적인 의미이고, '웅'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hero'인데 이 둘이
결합됨으로 국가와 민족은 신적인 영역에 속하게
된다. 현충일이라는 것이 순국선열을 기리는
날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그 안에 배인 의미가
남다른 것일 수도 있다. 사회를 이루고 생존해
온 인류가 사회를 유지하는 한 방식으로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리는 일이야 뭐라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때로
이런 사회적인 의미의 행사를 종교적인 행사로
승격시키고 싶어하는 충동을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실천한다. '성웅'이란 말에 담긴 정치적
함의와 그것을 이용한 박정희 독재정권의 국가주의를
생각해보자 -
을 연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엘
시드는 이슬람의 침공으로 이베리아 반도 남부
지역에서 산악지역인 북부와 중부로 밀려난
기독교 왕국, 레온 -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를 섬기면서 이슬람교도들인 무어인과의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무장이었다. 그는 용맹한
무장이었고, 독실한 기독교도였으며 이교도에
대해서 자비로왔다. 그러나 그의 곧은 성격
탓이었던,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였건 간에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이유들로 인해 여러
차례 국왕이었던 알폰소 6세와 불화를 일으켰고,
1083년과 1087년 두 차례에 걸쳐 왕과 충돌하고
화해했다. 그는 1089년 세 번째로 궁정에서
추방당하였고, 그후 이슬람의 무어인들이 정복하고
있던 발렌시아 정복에 나서 결국 그곳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정복의 성공으로 왕과 동등한
위치를 구축하였고, 발렌시아의 왕이 될 수도
있었으나 왕관을 국왕에게 바침으로써 에스파니아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이런 그를 기리는 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코르네이유의《르 시드》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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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시드 역의 찰톤 헤스톤(Charlton
Heston) - 1924년생.
'벤허,' '엘 시드,' '혹성탈출' 등 고전 영화들에서
활약했던 배우. '트루 라이즈'나 '애니 기븐
선데이'등에 조연으로 계속 연기 생활을 하고
있으며, 미국 총기 협회 회장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소피아
로렌(Sofia Loren)
- 1934년생 이탈리아 배우. '엘 시드,' '로마
제국의 멸망,' '해바라기' 등으로 유명하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왕국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1대1 대결에 나선 로드리고.
로드리고와
그의 연인 치멘느
알폰소6세
국왕의 여동생
알폰소
국왕의 즉위식에서 로드리고는 왕으로 하여금
형의 암살과 무관하다는 서약을 강제로 하도록
만든다.
알폰소
국왕의 미움을 사 국외로 추방당한 로드리고와
뒤따라온 그의 아내 치멘느
로드리고와
그의 아내, 그리고 쌍둥이 두 딸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711~1492년까지
780년 동안 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失地)
회복운동.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하였을
때, 에스파냐 귀족들은 북쪽의
칸타브리아산맥, 동쪽의 피레네산맥으로
도피하였으며,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서 양 방면에서 국토회복운동을
벌였다. 먼저 서부 방면에서는
718년 펠라요라는 서(西)고트족
귀족이 이슬람군을 격파하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 후 레온을
수도로 삼고 두에로 계곡까지
진출하였으며, 10세기에는 레온왕국과
카스티야왕국이 성립되었다. 카스티야는
1085년 이슬람세력의 중심지 톨레도를
점령하고,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라 톨로사 결전에서 승리,
과달키비르강 유역에 도달하였다.
한편
동부 방면에서는 피레네산맥 주변에서
활동이 개시되어 10세기에 나바라가
독립하고, 11세기에는 아라곤이
독립하였다. 아라곤은 1118년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에브로
계곡을 장악하여 세력을 넓혔다.
13~15세기에 이들 운동은 에스파냐
통일국가 건설운동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라스 나바스 데 라 톨로사에서
승전한 아라곤은 코르도바(1236),
세비야(1248), 알헤시라스(1343)
등을 잇달아 회복하였으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결혼은 에스파냐 통일국가를
탄생하게 하였다.
1492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국토회복운동을 완성하였다. 에스파냐의
종교통일운동은 이같은 독립운동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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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극
전문 배우 - 찰톤 헤스톤과 엘 시드
영화
<엘 시드>는 무려 3시간(180분)의 런닝
타임을 가진 대작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역을
맡은 찰톤 헤스톤은 진지해 보이는 고전적인
외모 탓인지 <벤허>를 비롯한 할리우드의
여러 서사 장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르툼kahrtoum>에서는
영국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수단의 총독 찰스
고든 역을, <북경에서의 55일 55days at
peking> 의화단의 난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외교관들을 지켜내는 미국 대사관 해병대
무관역을, 그리고 <행성탈출>, 중·소
위기로 촉발된 군사적 긴장이 세균 전쟁으로
번져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설정의 <오메가
맨>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찰톤 헤스톤은
그의 선배 존 웨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영화인으로 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까지 전미총기협회 회장으로 미국
내 우파와 총기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찰톤
헤스톤이 스페인의 영웅 '로드리고 디아즈
데 비바르'로, 소피아 로렌은 그의 전설의
사랑 치메나로 분해 불꽃 튀는 연기를 해주었다.
찰톤 헤스톤은 이 영화를 <벤허>의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연출했더라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으리라 말하지만 몇 가지 스토리적인
문제를 제외한다면 <엘 시드>의 감독
앤서니 만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앤서니 만 역시
1965년 <로마제국의 멸망>은 <엘
시드>만한 호평이나 흥행 성적은 올리지
못했지만 서사극 장르에 강한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스토리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엘 시드'라는 한 인물의
서사와 레콩키스타의 주요한 국면들을 모두
잡아내겠다는 욕심을 부렸다는데 있을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장장 3시간에 이르는 이 영화의 런닝 타임이
증명하듯 때로 영화는 숨가쁘게 다음 시퀀스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사건은 거의 700여년에 걸친 대 사건이자 기독교
왕국 스페인의 정체성(그러므로
라틴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이루게 될 미래의
사건들에도 영향을 주는)을
이루는 결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레콩키스타'는 무엇인가?
레콩키스타
- 이슬람 왕국과 기독교 왕국의 격돌
레콩키스타란
말 그대로 재정복 사업이었다. 로마의 몰락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한 서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그냥
게르만민족이라고 해두자)들이
711년경부터 시작된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밀려 비옥한 남부를 빼앗기고, 북부로 밀려나게
되자 이들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한 정복(실지회복) 사업을 말하는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과거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로마군의 침공으로 그들의 수중에 떨어진 이래
이베리아 지역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의 염려가
거의 없어 로마 제국은 이 지역의 방비를 위한
군단을 하나만 둘 정도로 로마화가 가장 충실하게
진행된 곳으로 매우 오랫동안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후 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기는 했으나 이베리아 반도에 곳곳에는 로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마를 대신해
이 지역을 통치하게된 서고트족들은 기독교화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야만인이었고, 711년부터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이슬람 세력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서고트족 최후의 왕 로드리고는 이
타호 강가에서 벌어진 8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패하여 더 이상 무어족의 침입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상륙하여 북상해 가는 이슬람 세력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인 732년의 '투르 푸와티에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카를 마르텔이 이끈 기독교 군대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간신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대치하게 되었고, 이것이 지중해
서부에서 이슬람의 진출을 막고 기독교 세계를
구원한 서구의 원체험이 된다.
이슬람인
무어족에게 밀려난 기독교 군대의 잔존 세력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그들의 세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무어인들은
말에서 내려 지주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군사와
농업의 기반을 장악하고 다시 여러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 등은
군사적, 상업적인 주요 거점 도시들이었다.
무어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화폐경제와 관료제,
도로, 항만 등 기타 서비스 부문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비록 군사적인 침공은
막혔으나 이슬람에 의해 보존된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는 무어인의 도시 코르도바로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퍼져갔다. 그러나 이슬람에
의해 장악된 남부 지역이 경제적 융성과 더불어
세련되고 화려한 문화를 즐기고 있을 때 북부
산악 지역을 쫓겨난 기독교 세력은 산 아래의
이슬람 세력의 풍요와 문화를 시기하며 더욱더
전투적인 신앙으로 무장했다. 이 무렵 이슬람에
정복당한 많은 지역이 영구히 이슬람화된 것에
비해 이들이 이슬람화를 피한 것은 물론 투철한
종교적인 신심도 작용했을 터이지만,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로마의 지배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문인·시인들이 노래한 스페인인들의
놀라운 정열과 불타는 시기심, 전투적인 신앙은
이무렵부터 형성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왕국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이 세운 무어 왕국에
대해 매우 오래고 질긴 장기전을 펼칠 만반의
준비가 되었고, 이 전쟁은 1492년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무려 800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바야흐로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의 '천년 전쟁'이라
일컫을 만한 것이었으니 이후 구교와 신교
세력 간에 펼쳐진 '30년 전쟁'의 잔인함이
이 보다 더했을지는 몰라도 그 기간만 놓고
보자면 참으로 길었던 전쟁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인지 모르겠다.)
이 전쟁은 유럽인들의 종교적 열망이 불러
일으켰던 십자군 전쟁 당시에도 계속되었고,
당시 스페인은 이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유일한 기독교 국가였다. 왜냐하면 이교도와의
전쟁은 그들의 영토 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들은 철저하게 고립된 채 그들의
영토 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의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훗날
스페인이 넘치는 정열을 동원해 정력적인 식민지
확장에 들인 에너지는 이 시기의 고립에 대한
보상을 원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적과
대결하며 닮아가는 스페인의 정체성
기독교도인
스페인인들과
이슬람의 무어족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살았던
것은 거의 몇 백년에 이르는 일이었고, 이들은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알고 배웠다.
영화 속에서 로드리고는 전투 끝에 잡힌 무어족
포을 같은 스페인인이라며 석방시켜 주고 그
덕분에 추종자들에게는 '엘 시드'라는 칭호를,
그의 반대자들에게는 '반역자'로 의심받게
된다. 과거 페르디난드 국왕의 경호대장이었던
로드리고의 부친은 국왕 앞에서 현재의 경호대장인
고마즈에게 모욕을 당하고, 로드리고는 연로한
부친을 대신해 자신이 사랑하는 약혼녀 치멘느의
아버지이기도 했던 고마즈와 결투를 벌여 그만
고마즈를 죽이고 만다. 부친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도
없었던 치멘느. 로드리고는 이교도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도들에게 용서받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다. 실제 역사 속의
무어족들과 기독교도들 사이에서의 갈등은
크게 보자면 늘 상존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아오다 보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 마련이었다. 무려 8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전쟁은 때로 포용하기도 하고,
때로 싸우기도 하며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이루어졌다.
영화
속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실제로 알폰소
국왕과 불화하고 있는 동안의 로드리고는 사라고사의
무어왕을 섬기기도 했고, 그의 주요 참모 중
하나였던 알바르 파녜스 역시 무어인인 무르시아왕
밑에 들어가 또 다른 이슬람 군주인 그라나다
왕과 싸웠다. 이것은 단지 '로드리고' 개인의
관용적인 모습이 아니라 오랜 세월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전쟁을 치뤄왔던 스페인의
역사 속에 빚어진 혼혈들 -
실제 혼인에 의한 것, 문화, 정치·경제·군사
동맹 - 의
결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가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것은 또한 같은
기독교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기도 했다. 그들은
전후 스페인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도
서로 투쟁했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영웅 엘
시드는 같은 기독교 왕국의 도전으로부터 페르디난드
국왕의 명예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1대 1 대결에 나서게 된다. 그는 마치 '아더왕
전설'이나 '롤랑의 노래'와 같은 기사 무용담에
등장하는 '승자가 곧 결백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보인다. 상대편 기사와의 대결에서
힘겹게 승리를 거두고 만다.
페르디난드
국왕의 경호대장이 된 로드리고는 이후 왕의
장남과 친하게 지내지만 차남인 알폰소 국왕은
이런 로드리고를 못 마땅해 한다. 극중에서
로드리고는 매우 우직하고, 신심이 도드라진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엘
시드는 물론 훌륭한 인물이긴 했지만 정치적으로
둔한 인물이기만 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는
기회를 잡으면 어느 순간에 밀고 당기기를
해야할지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페리드난드
국왕의 사후 형제간의 왕권 다툼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로드리고는 차남인 알폰소가
왕위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장남을
암살하고, 그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자신이
그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음을 공포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로드리고의
야심이 결코 작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로드리고는 알폰소 국왕의
즉위식에서 홀로 충성 맹세를 유보하고, 그에게
성서에 대고 자신은 형의 암살 음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서약하라고 강요한 뒤에야 바로소
충성을 맹세하지만 추방당하고 만다.
추방당한
영웅의 귀환 신화 - 엘 시드
그리스·로마
신화의 세계로부터 일리아드·오딧세이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영웅들이 때로 신들의 주사위
놀음으로, 때로는 그들이 받드는 주군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와 판단 미숙으로 고난을
겪는 이야기들은 끊이지 않는다. 이것은 다시
중세에 이르러 <엑스칼리버>의 기사
란슬로트, <롤랑의 노래>의 충용스러운
기사 롤랑에게 이어지고 다시 기사 엘 시드에게까지
이어진다. 마치 임진왜란의 충용스러운 장군.
이순신이 원균의 억울한 모략에 빠져 백의종군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불세출의 영웅을 위해서는
못난 주군과 협잡꾼들 또한 존재하는 법이니
말이다. 아버지 고마즈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로드리고를 원망해 억지로 결혼하게 되기는
했지만 이때까지 그를 원망해온 로드리고의
아내 치멘느는 남편이 고난에 처하게 되자
그를 따라 나선다. 그러나 백성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게 된 남편을 사람들은 그냥 두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는 이 시기가 생략되는데
아마 이 무렵에 그는 사라고사 왕국의 무어왕을
위해 그의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인의 기회는 국난의 시기이듯 무어 족이 다시
스페인을 침략하려 들자 국왕 알폰소는
원치 않았지만 추방했던 로드리고를 다시 불러들여
이들에 대한 방비를 하도록 한다. 그런데 로드리고는
자신을 따르는 무어족 족장들의 군대와 동맹을
이루어 이를 상대하겠다는 방책을 제시한다.
기독교도 왕국의 국왕 알폰소는 이에 대노하여
다시 로드리고를 물리치고 단독으로 무어족과의
대결에 나섰다가 패하고 만다. 그는 치멘느와
그의 쌍둥이 두 딸을 유폐시켜 로드리고에게
복수하고자 한다. 이 무렵 로드리고는 무어인들의
전략적 근거지인 발렌시아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가족이 알폰소 국왕에게 핍박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군대의
일부를 회군시키기 까지 한다. 과거 치멘느를
사이에 두고 로드리고와 반목하던 오르도네즈
백작은 스페인과 치멘느를 위해 로드리고의
가족을 지하 감옥에서 빼내 로드리고의 군대와
합류한다.
복합상영관이
일반화되어 버린 오늘날에는 구시대의 유물처럼
되어 버렸지만 TV의 등장 이후 영화가 TV와
경쟁하는 한 방식은 70mm 와이드 스크린을
활용한 스펙타클이었고, 이런 70mm 와이드
스크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는 역시 대형
사극이었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의 <헨리5세>의
장쾌한 전투장면과 더불어 <엘 시드>의
발렌시아 전투 장면은 이런 영화의 전투 장면
중 단연 백미에 들 만한 것들이었다. 실제
스페인 현지에서 촬영된 발렌시아 전투 장면에서는 수천 개의
화살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는 장대한 스펙터클이
미클로스 로자의 웅장한 음악과 어우러져 기억될만한 명장면을
선사하고 있다.
발렌시아 포위 전투에서 성내의 무어족 백성들을
움직이며 내분을 촉발하는 식량 투척 작전의
성공으로 발렌시아 함락에 성공한 로드리고.
그의 추종자들은 로드리고에게 발렌시아의
왕관을 씌워주려고 하지만 로드리고는 발렌시아가
국왕 알폰소의 것임을 선포한다. 이번에는
무어족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번에는 역으로
발렌시아에 입성한 로드리고의 군대가 포위되고
만다. 발렌시아 입성 소식을 알리러 알폰소
국왕에게 달려간 로드리고의 사자는 푸대접을
받고 응원군은 한 명도 보낼 수 없다는 최후의
통첩을 받게 된다.
영웅의
장렬한 최후와 자기 희생
영웅서사시의
완성은 영웅의 행복한 말로가 아니라 비극적인
최후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더욱더 장려해지는
법이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대첩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임란 이후 조선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면 영웅담의 내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처럼 말이다. 로드리고가 이끄는 군대는
무어인과의 마지막 일전을 겨루기 위해 성문을
열고 치열한 공방을 벌이며 싸워 나간다. 그때
영웅의 가슴에 꽂히는 한 발의 화살. 전투는
로드리고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끝나게
되고 성 밖에 진을 치고 있는 무어족의 군대는
로드리고의 죽음을 소리높여 떠들며 자신들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의사는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화살을 뽑아내고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로드리고는 마치 이순신 장군처럼
자신의 최후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며 치료를
거부하고 내일의 작전을 자신이 직접 지휘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때 도착하는 알폰소 국왕과
그의 군대. 알폰소 국왕은 로드리고의 사자가
돌아간 뒤에야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의 충정을
알게 되고 그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로드리고는
국왕에게 "자신의
잘못을 되돌이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이를 실천에 옮기다니 국왕이 참으로 훌륭하다"며
나이어린 국왕을 격려해 마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죽거든 자신을 말에 태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말한다.
로드리고는 죽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철제
부목을 대어 말에 태우고 해안의 무어족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러 나간다. 로드리고는
죽었으리라 생각하며 크게 사기가 올라 있던
무어인들에게 성문이 열리면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틀림없이 죽었으리라 생각한 바로 로드리고였다.
온몸을 흰색 기사복으로 성장을 한 로드리고의
출현은 일순간에 무어인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스페인의 기독교 군대는 발렌시아를
침공해온 무어족 군대를 격퇴하게 된다. 무어족이
격멸된 해안가를 이미 죽은 로드리고의 시체와
말이 달려가며 영화는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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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를
포위한 무어인 군대와의 일전 중 치명상을
입은 엘 시드
깊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계속 지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엘 시드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서성철 옮김/ 까치/ 2000년 -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발상에서 시작한
매우 뛰어난 저술이다. 푸엔테스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른다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놀랄 만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굿
모닝 밀레니엄』/ 장회익, 최갑수, 최엽 외
지음/ 기획. 교수신문/ 민음사/ 1999년 -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교수신문이 기획하고
각 대학의 전문교수들이 집필한 밀레니엄 역사에
대한 정리서이다. 각 분야의 매우 뛰어난 필자들이
저술한 읽기 쉬운 밀레니엄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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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의
완성과 1492년
영화
속에서 엘 시드는 이 대결이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 사이의 최후의 대결인양 말하지만
실제로 레콩키스타가 종결된 것은 1492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엘 시드, 그는 분명히
위대한 군인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대중동원에
매우 뛰어난 정치인이었다. 그는 무어인들과의
대결에서 "무어인과
싸우며 빵을 얻는다"고
선언했다. 엘 시드의 무훈을 노래한 그들의
전통 무훈시 <엘 시드의 노래 Poema del
Mio Cid>에서는 엘 시드의 이런 성공의
이면에 자리한 것이 무엇이었던가를 잘 보여준다.
이 시에는 "땅을
요구한 사람들은 응분의 대가를 받았고, 엘
시드는 발렌시아에서 집과 경작지를 가질 수
있도록 돈을 지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엘 시드와 그의 군대는 무어인들을
격퇴하기 위한 군대를 결성하는데 있어 민중의
동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토지를 분배하며 전쟁을 치렀던
것이다. 이는 훗날 그의 후배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의 '코르테즈'나 다시 스페인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시몬 볼리바르'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고, 멕시코에서는 '에밀리오 사파타'에
의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간의 치열한
각축을 통해 전선이 점점 남으로 이동해 갔고,
군대는 전선을 이동해 가며 새로운 거점에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이는 다시 훗날 스페인
식민지 경영자들에 의해 그대로 전수되어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도시 건설에 응용되었다. 스페인들은
그들 내부의 전투와 건설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제패자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엘 시드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진
브루고스(Burgos)는 현재의 수도인 마드리드 북쪽 약 210km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아를란손강 유역의 해발고도 800m지역의 고원에 위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A.D 884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동쪽 전초기지로서 건설되어, 1035년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스페인의
도시들은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등 어느
왕국에 그들의 지원을 가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에 따라 그들 도시의 운명이 좌우되기도
하면서, 또는 이들과 경쟁하면서 성장해 왔다.
새롭게 정복된 도시를 방비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주민들이 필요했고, 스페인의 국왕은 때로
강제적으로, 때로 여러 가지가 이득을 제공함으로써
이주를 장려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라틴
아메리카에서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무어인(Moors)들과의
전투의 사실상 전환기를 이루는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로 세비야가 함락된
이후 이베리아 반도는 5개의 왕국으로 분열된다.
대서양과 면한 서쪽의 포르투갈, 북부와 중부의
레온-카스티야 왕국, 동부의 카탈루냐 왕국,
북부 산악 지대의 나바라 왕국, 그리고 스페인
남부 깊숙한 곳의 마지막 남은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이들은 기존의 봉건 영주와 자유
도시, 새롭게 태동해가는 전제왕국 사이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레콩키스타가
완성되는 시점에서 이민족,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페인의 국왕은 다른 어떤 세력보다
강력한 전제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웃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의 그 어떤 전제
왕정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스페인의 국왕은 유럽의
여러 정치적인 사건들에 깊이 개입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적 정복에 대한 열정, 신세계에 스페인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본성, 신교세력인 프로테스탄트
유럽을 이단시하고 이들에 대항하려는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를 자임하는 스페인의 모습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획득한 성질인 것이다.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서의 선택 - 엘 시드
레콩키스타의
영웅. 엘 시드는 분명히 스페인의 종교적 열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기독교도였으나 이교도인
무어인들을 포용해 그들을 수하에 두었고,
그들의 음식과 예법, 그들의 복장을 즐겨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영화 <엘 시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발렌시아를 침공할 때까지는
무어인의 복장과 투구를 하고 있었으나 발렌시아가
함락된 뒤의 그의 복장은 다시 기독교도의
복장으로 돌아갔고, 죽음에 이르러서 그의
모습이 마치 성자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빛나고
있을 때 그의 복장은 기독교도의 그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죽음에 임박한 신자가 자신의
믿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고자 하는 열망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레콩키스타
기간 동안 지속된 이교도에 대한 스페인의
관용의 정책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엘 시드는 포로로 잡힌 무어족
족장들을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같은 스페인인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해방시켜 준다. 이에 감읍한 무어족
족장들이 그의 수하로 들어온 것은 당연지사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실지 회복 전쟁이 끝났을 때 다시 기독교도
왕국이 된 스페인은 이교도에 대한 이전까지의
관용정책의 시대가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스페인
국왕에게 충성을 바쳤던 무어인들은 개종해야
했으며, 개종한 무어인들은 '토르나디소스(tornadizos
; 변절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렸다.
이전까지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았던 유대인들의 대규모 인종학살이
벌어진다. 1391년 세비야에서만 4,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고, 코르도바에서는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2,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불에 태워졌다. 시나고그(유대인 회당)마다
유대인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목숨을 구명하고자
했다. 새롭게 기독교도가 된 유대인들은 식민지
개척민이 당해야 했던 거의 모든 박해행위에
노출되었고, 구 기독교도들과의 적극적인 혼인을
통해 그들 자신이 또한 가장 강력한 박해자가
되어 다시 등장했다.
1492년
10월 12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반구의
한 작은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 왕실의 지원을
받아 항해를 떠났던 콜럼버스는 그곳에서 만난
원주민들을 "아주
온순한 데다가 악을 모르며, 다른 사람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지 않고, 무기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곧 그는 스페인의
왕실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신대륙에서 그가
제일 처음 접했으며 의심없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히스파니올라 섬의 타이노 원주민들을
노예로 데려다 스페인 새빌에서 팔았으며 노예로
데려가지 못한 원주민들을 백인들의 이주와
농장 개척을 위한 농노로 삼았다. 오늘날 콜럼버스가
처음 신대륙에 도착할 무렵 이곳에는 1억 명
가량의 원주민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한
지 4년 이내에 콜럼버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30만에 달했던 토착 원주민의 3분의 1을 죽이거나
노예로 삼았고, 50년 뒤에는 타이노 원주민들은
전멸한다. 100년 뒤 신대륙 원주민의 90%가
유럽인이 옮긴 질병과 탄압으로 죽었다. 지리상의
발견 시대를 가져온 1492년의 스페인은 실지탈환과
정복을 위해 숨차게 달려 온 끝에 마침내 레콩키스타를
완성했고, 바로 그 국면에서 신대륙을 발견했다.
그들에게는 아직 남(타자)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며 정복은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정복하자"는
말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과제였으리라.
지중해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 최후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의 정복은 동시에 신대륙
원주민들에게는 종말의 시작이었다.(신대륙
원주민들의 박해상에 대해서는 영화 <미션>편을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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