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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

오토 딕스

아돌프 히틀러

파울 조셉 괴벨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 케테 콜비츠

테 콜비츠에 대해 이전에 쓴 글이 있기는 한데, 써놓고 돌아선 뒤로도 내내 미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또 화가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아마도 그녀가 화가 이전에 어머니, 어머니 이전에 한 인간, 그리고 그 무엇보다 우선 케테 콜비츠 자신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케테 콜비츠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프롤레타리아 예술의 어머니,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증언자,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등 세속도시에서 그녀를 일컫는 말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 중 어느 하나 그녀에게 합당하지 않은 말이 없으나 저는 그녀를 가리킬만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외로움을 무척 많이 탔습니다. 세상에서 제게 피와 살을 나눠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3살 때 이후 소식이 끊겼습니다. 이미 저 세상 사람이었던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어려서는 아버지가 별로 그립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제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아마도 어머니였을 겁니다. 오래도록 그 온기가 그리웠습니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나의 갈증은 때로 대상 없는 반항으로, 근거 없는 분노로, 혹은 겨냥할 곳 없는 애정에 휩쓸렸습니다. 나의 갈증은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처럼 바람만 불면 훅하고 꺼지는 것이었으므로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가까이 다가오는 모든 존재에 대해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나의 슬픈 욕망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익혔고, 거짓말에 능숙해지자 어른들은 영리하다고, 어른스럽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은 농익은 고름처럼 살갗 어디에나 배어 있어 어디를 누르더라도 용암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고, 그럴수록 나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피해 책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도서관에 앉아 홀로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으므로 나는 행복하게도 거짓말을 꾸며 나의 외피를 치장하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그렇게 만난 책들이 행복한 왕자의 제비처럼 저를 세상의 여러 모습들, 상황들로 이끌었습니다. 그 무렵 제가 살던 집 인근에는 공공도서관이 없었습니다. 저는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난 뒤나, 주일 미사를 마친 뒤 버스를 타고 구립 도서관에 갔습니다. 불어터진 우동 한 그릇에 500원, 차가운 도시락을 덥혀 먹으라고 파는 우동 국물 한 그릇에 200원 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버스를 타고 구립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는 그 무렵 한창 준비 중이던 올림픽 선수촌 아파트를 지나야 했습니다. 낡은 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있던 허름한 마을을 조금만 벗어나면 세상은 별천지였습니다.

그 때 구립 도서관 한 구석에 비치된 <라이프 인간 세계사 Great Ages of Man>이란 책을 통해 저는 처음 케테 콜비츠와 오토 딕스를 만났습니다. 루벤스, 르노와르, 드가의 그림과 달리 그녀의 그림에는 진짜 세상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공부를 하는 어린 중학생이 있고, 너무나 다정다감한 어머니와 엄한 아버지가 살고 있는 모든 세상의 풍파로부터 안전한 가정의 거실에 걸릴 법한 그림은 아니었습니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 속 세상은 그런 거실에 어울릴 화가들의 작품만 교과서로 보아왔던 제게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의 그늘진 골방 풍경으로 보였습니다. 예술이란 것이 드라마나 CF에 등장하는 것 같이 풍요로운 세계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린 제가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켜 준 화가가 바로 케테 콜비츠였습니다.

내 예술이 목적을 가졌다는데 동의한다. 나는 인간이 이토록 어쩔 줄 모르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고 싶다. - 케테 콜비츠

낫을 가는 여인(농민전쟁 연작 중에서)

<Whetting the Scythe>, etching, 299x295, 1905, Sprengel Museum Hannover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 1924

 

 

 

 

짓밟힌 사람들(Downtrodden ,1900)
- 빈사 상태의 아이를 어머니가 안고 있다. 아버지는 목을 졸라 죽이라고 줄을 내민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전쟁으로 만들어진 독일, 전쟁 속에서 태어난 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는 1867년 7월 8일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Köigsberg)에서 태어났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고향이었고,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은 폐교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란 지명조차 사라졌다. 이곳은 더 이상 독일 땅도 아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을 통일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프로이센(Preussen)의 군주들이 즉위식을 가진 곳이 쾨니히스베르크였다. 그러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섬처럼 자리 잡은 이곳은 오늘날 러시아 직할령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되었다. 그녀의 고향이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처럼 케테 콜비츠 역시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케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독일과 당시 유럽의 역사, 사회상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냉전 기간 동안 동·서독으로 분리되었던 두 개의 독일이 베를린에 수도를 둔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결과, 동과 서로 분단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근대 초기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의 독일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중세시대 독일은 ‘신성로마제국(Heiliges Rmisches Reich)’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신성로마제국’은 7명의 선제후들과 기타 100여개의 작은 제후국들로 나뉘어 있었고, 여기에 83개나 되는 제국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에 의해 최종적으로 해체되지만 제국의 실질적인 붕괴는 1517년 무명의 수도승이었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해서였다. 루터가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작성하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독일을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로 빠뜨렸다.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신교파와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구교파로 나뉜 독일 영방들은 서로에게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신교파와 구교파 군대가 번갈아가며 약탈하는 통에 가장 많이 일하면서도 아무 권리도 갖지 못했던 독일 농민들은 목숨을 빼앗기거나 굶주림에 시달려야만 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에 자극받은 농민들은 성서를 통해 얻어진 지식과 가르침에 따라 지상에 보다 살기 좋은 낙원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 농민들의 봉기는 기존의 봉건체제를 지키고자 했던 신교파와 구교파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농민들은 곳곳에서 학살당했다. 루터조차 농민들을 때려죽이라고 외쳤다. ‘농민전쟁’은 농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가혹한 시련을 남겼고, ‘30년 전쟁(1618~1648)’을 거치며 전국토가 폐허로 변한 독일의 신교와 구교 세력은 서로의 영토와 종교를 인정하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협정을 맺는다. 협정에 따라 독일의 영방 제후와 제국도시들은 ‘황제와 제국(帝國)을 적대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조건으로 상호 또는 외국과 동맹할 권리가 인정되었다. 이 같은 권리는 제후들에게 영토에 대한 완전한 주권과 외교권, 조약 체결권을 인정한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일은 비록 같은 언어와 문화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독일이라는 민족국가를 건설할 마음을 먹지 않았다. 이름은 독일연방이었지만 단단하게 연결된 연방국가가 아니라 작은 제후국들 간에 느슨하게 연결된 독립국가연합 같은 체제였다. 그러나 대혁명이 변질되면서 나폴레옹 통치 하의 프랑스가 유럽 을 제패하는 강대국으로 팽창하게 되면서 독일의 상황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독일연방의 여러 곳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에게 점령당했고, 독일연방 내의 강국이었던 프로이센마저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 들어가자 독일 내부에서는 프랑스의 압제를 몰아내고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적 열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프로이센은 1815년 나폴레옹을 몰아내는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독일 통일의 주도적인 국가로 부상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I, 1688~1740) 시대부터 만들어진 부국강병 정책으로 유럽의 어느 국가보다도 강력한 관료제와 군대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농민상비군 제도를 도입해 이전까지는 직업 군인들만 전투에 참가하던 것을 일반 농민들까지 군사훈련을 시키고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다. 당시 독일을 지배하던 귀족들은 거의 전부가 현역 장교이거나 퇴역 장교들이었고, 국가 세입의 80% 정도가 군대에 지출되었다. 18세기말 프로이센은 군대를 보유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보유한 군대라는 말을 들을 만큼 강력한 군사문화가 지배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일 통일에 나섰다.

    케테가 태어나던 무렵의 독일은 프로이센과 또 하나의 강력한 세력인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비롯해 작센, 하노버, 브룬슈비크, 브란덴부르크, 튀링겐, 바이에른 등 작은 여러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었다. 산업화에서 앞섰던 프로이센은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흡수하거나 지배적인 위치에 서면서 팽창해나갔고, 마침내 같은 게르만 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와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태어나기 바로 직전이었던 1866년 프로이센은 북부 독일지역의 패권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전쟁)을 벌여 커다란 승리를 거뒀다.

   이제 독일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마지막 장벽은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바이에른 등 프랑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남부독일이 프로이센에 흡수되어 거대한 독일이라는 새로운 강대국이 탄생하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프로이센의 철혈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프랑스를 교묘히 자극해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하도록 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에서 비스마르크는 잘 훈련된 프로이센 군대와 발전된 군사기술을 이용해 프랑스를 굴복시켰다.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마지막 세력을 제거하고, 황제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완성했다.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고, 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물어내야 했다.

   독일은 유럽의 신흥강대국으로 떠올랐고, 영국은 두려움을, 프랑스는 치욕을 느꼈다. 오랫동안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하나의 민족국가를 수립하는데 성공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황제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인 융커(Junker) 출신의 고위 관료, 군인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후진적인 국가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 당시 유럽은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시민 의식이 고양되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유무역 대신 보호무역을 추진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기업가와 지주들은 상호보완적인 동맹관계를 맺었다. 이들의 동맹은 당시 독일 사회에서 움트고 있던 정치적 자유주의와 시민의식, 노동자들의 진보적인 사회참여를 억눌렀다. 그런 가운데 독일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종종 자국의 사회적 위기를 ‘유대인 자본가’와 같은 내부의 적에서 찾아내곤 했다.

 

 


자유롭고 진보적인 가정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케테 콜비츠

   비록 통일은 늦었지만 이 무렵 독일의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석탄과 철, 직물 생산량이 급증했고, 1850년대부터 1870년대 사이에 독일의 철도망 길이는 세 배나 늘어났다. 산업 발전은 노동자의 비율을 증대시켜 1850년대까지 전체 인구 중 4%에 불과했던 노동자들은 1870년대에 이르러서는 10%대로 증가했다. 일인당 국민소득 역시 이 시기에 3분의 1이나 늘어났다. 신생 독일제국은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각 지역의 문화적 통일성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음악협회, 스포츠 협회, 문화협회 등이 주도하는 수많은 축제와 사격대회, 체조대회 등을 열었다. 정치조직 역시 과거의 국경을 넘어 발전해나갔다.

   이 시기 독일의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은 ‘민족협회(Nationalverein)’같은 전국적인 기구를 만들었고, 산업노동자들을 위한 각종 문화협회와 교육협회 등도 만들어졌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정당을 만들어 의회정치에 뛰어들고자 했다. 그러나 자유적인 정치세력과 진보적인 정치세력에 맞서 보수적인 세력들도 결집하고 있었다.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지방 등에는 가톨릭 정치세력이 출현하면서 독일은 점차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회주의가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주로 도시에서 벌어진 것들이었다. 아직까지도 독일의 농촌 지역은 교회가 일상을 지배하는 비교적 전통적인 촌락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일상을 침해하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전국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도시의 변화를 알지 못했다.

   통일 직후 찾아온 불황은 독일 경제를 위축시켰고, 빈부 격차는 더욱 커졌다. 물질적 궁핍과 정치적 억압 속에 노동자들은 더욱더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적으론 사회주의자들을 억압했지만 다른 한 편으론 진보적인 사회복지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 중에서도 경제적 조건이 조금씩 나아지는데 만족하는 사람들과 좀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충돌하기 시작했다. 케테가 성장하던 시기의 독일은 이념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황제와 비스마르크로 상징되는 보수적인 억압에 맞서 투쟁하던 시대였다.

   케테는 다섯째 아이로 태어났지만 위로 형제 둘이 죽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셋째 아이였다. 위로는 언니 율리에와 오빠 콘라트가 있었고, 밑으로 동생 리제가 있었다. 그녀의 집안은 사회적으론 중산층 지식계급에 속했지만 케테의 집안 분위기는 자신들이 속해 있는 계급보다는 그 사회에서 억압받는 계층, 소외되는 계급에 더욱 공감하고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케테의 아버지 칼 슈미트는 자유로운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진지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본래 그는 법관이었으나 당시 독일의 억압적인 분위기는 진보적인 사상을 갖는 것만으로도 국가질서를 크게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곳 프로이센에서 진보적인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행위이므로 계속 ‘국가의 공복’ 노릇을 할 수가 없다”며 양심대로 살아가기 위해 높은 보수와 존경을 받는 법관을 그만두고 건축기술자가 되었다.

   어머니 카타리나 슈미트 역시 자유 신앙 운동을 펼쳤던 케테의 외할아버지 율리우스 루프(Julius Rupp, 1809 - 1884)의 영향을 받아 온순하고 자상했지만 강인하고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율리우스 루프는 신학자이자 목사로서 평생을 교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신앙을 주창한 탓에 국가와 교회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자신의 신념대로 살았다. 케테는 아버지를 통해 바람직한 형제애로서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외할아버지를 통해 삶에 대한 경건한 태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 카타리나는 예술적인 감수성도 뛰어나 고전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모사한 그림들로 집안을 꾸몄는데, 케테의 형제들은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감성을 이어받았다. 특히 케테 보다 네 살 많았던 오빠 콘라트는 젊은 나이에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와 교류를 가질 만큼 일찌감치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논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건축기술자였던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직접 나무토막을 잘라 집짓기 놀이 등 다양한 블록놀이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케테와 아이들은 가끔씩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오는 건축설계도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비록 낙서에 가까운 그림들이었지만 아버지 칼은 아이들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 중 특히 케테가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좀더 폭넓은 교육이 시행되었고, 좀더 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여성이 전문적인 예술교육을 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칼 슈미트는 케테를 예술가로 키우려고 마음먹었고, 그녀를 위해선 무엇이든 해주고자 했다.

   케테의 동생 리제 역시 미술에 자질을 보였지만 너무 일찍 약혼했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케테는 열네 살 때부터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장 좋은 선생님들을 찾아가 미술을 배웠다. 특히 동판화가인 마우어의 가르침은 훗날 그녀가 판화가로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었다. 케테는 언제나 매우 열심이었고, 늘어가는 작품 실력은 아버지에게 커다란 보람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문적인 예술아카데미에 입학해 정식 교육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에밀 나이데라는 화가를 찾아가 개인교습을 받아야 했다.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 예술의 세계로

   케테에게 쾨니히스베르크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점점 더 너무 작은 세계가 되어가고 있었다. 케테가 17살이 되던 1885년은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케테는 이 때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어머니 카타리나와 함께 온천이 있는 엥가딘(Engadin)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케테와 여동생 리제를 함께 딸려 보냈는데, 본래 이 여행은 어머니의 휴식과 함께 케테와 여동생에게 베를린과 특히 뮌헨을 보여주기 위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었다.

   베를린에는 결혼해서 분가한 언니 율리에가 살고 있었다. 케테는 베를린에서 언니의 이웃에 살던 스물 두 살의 젊은 예술가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을 만날 수 있었다. 하우프트만은 훗날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로 19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로마에서 조각을 공부하다가 미술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무렵엔 베를린에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는 ‘하우프트만 클럽’이라 불리는 모임을 통해 당대의 주요 사조인 자연주의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던 과학자 ․ 철학자 ․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는 당시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던 케테의 오빠 콘라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케테는 이들과 어울리며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와는 완전히 다른 보다 자유롭고 활기 있는 생동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큰 방에는 기다란 식탁이 있었고, 식탁 위에는 장미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장미꽃 화관을 쓰고 포도주를 마셨다. 하우프트만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글을 낭독했다. 우리는 모두 젊었기 때문에 분위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것은 삶을 향해 열리는 황홀한 서곡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세계는 이 막을 수도 없이 내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케테는 베를린을 거쳐 뮌헨에서도 일주일 정도 머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루벤스의 작품을 감상한 케테는 들고 있던 책에 자기도 모르게 “루벤스! 루벤스!”라고 쓸 만큼 깊은 감명을 받았다. 미술공부를 위해 혼자 베를린으로 돌아간 케테는 이곳에서 베를린여자미술학교에 다녔다. 베를린여자미술학교에서 칼 슈타우퍼-베른(Karl Staufer-Bern)에게 미술을 공부한 케테는 그의 소개로 당대 독일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던 막스 클링거(Max Klinger, 1857~1920)의 판화작품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 슈타우퍼-베른은 케테에게 예술적 소질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도록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지만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케테는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좀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케테는 오빠의 친구였던 칼 콜비츠(Karl Kollwitz)와 결혼을 약속한다. 칼 콜비츠는 오래전부터 콘라트와 함께 토론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의학도였다. 케테의 예술적 자질에 대한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크게 실망했다. 그는 케테가 결혼한 뒤에는 예술가의 길을 포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빌헬름 2세가 독일 황제에 즉위하던 1888년, 케테를 뮌헨의 여자예술학교에 입학시킨다.

   케테는 뮌헨에서 루드비히 헤르테리히(Herterich)의 지도를 받으며 ‘그림 그리는 여자’로 살아간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 뮌헨은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고, 스스로 판화가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다.

“시간 나는 대로 막스 클링거의 『회화와 판화』를 읽었다. 읽으면서 나는 화가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헤르테리히의 탁월한 지도로 나는 뮌헨에서 제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

  뮌헨의 자유분방함은 케테에게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과도 터놓고 교우관계를 맺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케테는 이들과 친분을 맺고 지내면서 자신이 너무 일찍 약혼한 것은 아닐까 회의를 품기도 했다.

“자유로운 예술가 그룹이 나를 강하게 끌었다.”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뮌헨에서 한 학기를 더 보냈지만 케테는 뮌헨에서 그다지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곧 좀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베를린으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1899년 당시 베를린은 젊은 작가들과 화가, 사상가들로 넘쳐나는 곳이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뭔가 새로운 일과 사건이 벌이지고 있었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 만났던 하우프트만 역시 희곡 「해뜨기 전(Vor Sonnenaufgang)」을 무대에 올리면서 하룻밤 사이에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희곡작가가 되었다. 약혼자였던 칼 콜비츠 역시 의사로서 반 년간 군의관 복무를 위해 베를린에 있었고, 오빠 콘라트도 베를린에서 <전진>이란 잡지에서 편집 일을 하고 있었다.

“뮌헨과 비교할 때 베를린의 생활은 뭔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나는 당시의 끓어오르는 삶 속으로 빠져버렸을지 모르지만 유익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듬해 케테는 베를린이 아닌 뮌헨에 머물렀던 것을 후회하며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갔다. 케테는 이곳에서 몇 편의 작품을 팔아 그 돈으로 소규모 아틀리에를 빌릴 수 있었다. 케테는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의 『제르미날(Germinal)』 같은 작품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싸구려 선술집을 자주 찾아갔다. 여성이 혼자 자전거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눈초리를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녀 혼자서 술집을 찾아가는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곱지 않게 보일 일이었다. 케테 역시 뮌헨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남성노동자들의 왁자한 소음과 거친 행동으로 시끌벅적한 곳에 혼자서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녀는 노동자들의 활기찬 모습을 관찰하면서 독일 소시민들의 판에 박힌 답답한 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활력을 느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짐꾼이 나에게는 아름다워 보였고, 민중들의 활달함이 아름다웠다. 소시민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매력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예술가로서의 삶과 결혼생활을 함께 이루어나갈 수 있을지 염려했기 때문에 케테가 하루빨리 미술공부를 끝마치고 전시회를 열어 예술가로 먼저 성공해주길 바랐다. 그 무렵 약혼자 칼 콜비츠는 군복무를 마치고 베를린의 노동자거주 지역 의료보험조합의사가 되었고, 케테는 이제 아버지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만 칼과 결혼하겠어요.”

   딸이 훌륭한 예술가가 되기만을 바랐던 아버지였지만 딸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게 된 아버지 칼 슈미트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네가 선택한 거다. 두 가지를 조화시키는 건 아마도 굉장히 힘들 거야. 하지만 네가 진심으로 되고자 했던 것을 그대로 지켜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라.”

가난한 노동자들의 의사와 그의 아내, 케테 콜비츠

   1891년 봄, 케테 슈미트는 칼 콜비츠와 결혼해 케테 콜비츠가 되었다. 이들 케테 콜비츠 부부는 아버지의 예상대로 평생 힘든 세월을 함께 보내야 했지만 남편 칼 콜비츠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훌륭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로, 또 케테의 예술 활동을 이해하고, 지원하는 예술적 동반자였다. 케테 콜비츠는 남편이 의사로 일하고 있던 베를린 북부의 바이센부르크가 25번지에 집을 얻었다(이곳은 현재 케테 콜비츠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이 집에서 오십 년 동안 머물면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고, 아이를 낳으며 함께 했다. 남편 칼은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을 진료하는 의료보험조합 소속의 개업의였는데 그에겐 항상 너무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독일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당시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선 사회복지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 독일을 통치하던 비스마르크가 구사했던 채찍과 당근이라는 양면 정책 때문이었다.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전이었던 1848년 유럽은 온통 혁명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촉발된 유럽의 지각변동을 마무리 짓기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는 유럽을 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강력한 복고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미 혁명을 경험하며 각성된 자유주의적인 시민과 노동자들은 메테르니히의 보수주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출발해 독일까지 번진 시민혁명의 열기는 자유주의적인 학생과 시민들을 봉기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출판과 결사의 자유, 배심 재판제, 민주적인 의회 구성 등을 주장했다. 시위대의 요구 앞에서 프로이센 정부는 처음엔 단호한 자세를 취했지만 점차 악화되어가는 주변 상황에 밀려 결국 검열폐지 등의 일부 타협안을 내놓았다. 정부가 내놓은 타협안을 받아든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 한 군대가 우발적으로 발포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도시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고, 더욱 더 많은 시민들이 무장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것을 염려한 프로이센 국왕은 다음날 군대의 철수를 명령했고, 시민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내각과 의회를 구성하여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에 앞장설 것임을 천명했다. 이것이 독일의 3월 혁명이었다.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새롭게 수립된 자유주의 내각의 활동을 지켜보자고 했고, 일부는 좀더 강력하게 투쟁하자고 주장했다. 혁명을 통해 합법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자유주의자들은 옛 체제의 권력기구들, 정부, 군대 안에서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은 스스로 과거의 권력을 부활시켰다. 이에 반해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갈망했던 민주주의자들은 3월 혁명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3월 혁명을 통해 얻어낸 언론 ․ 출판 ․ 결사의 자유를 통해 수많은 잡지와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협회와 클럽, 위원회 등을 만들어 활동했다. 정국이 다시 안정되자 국왕과 비스마르크는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국왕 단독의 흠정헌법(欽定憲法)을 반포했다.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혁명적인 기운은 가라앉고 말았다.

   3월 혁명을 경험한 독일 정부는 혁명적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반(反)사회주의자법을 제정하는 등 억압적인 정책을 펼쳤다. 반사회주의자법은 3월 혁명의 결실이었던 집회, 조직, 산하 협회, 신문, 정기간행물을 금지하는 법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의원 입후보와 의회 진출은 허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사회주의는 대중과 직접 만나는 대신 의회 투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 법안은 1890년 비스마르크가 퇴임할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 정치적으로는 시민들의 요구를 억누르는 대신 시민과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유럽 최초로 사회복지법을 제정했다. 1883년 의료보험이 만들어졌고, 그 이듬해인 1884년엔 산재보험이, 1889년엔 오늘날과 같은 연금보험이 만들어졌다.

   케테 콜비츠의 남편 칼 콜비츠 역시 이런 의료보험 법안을 통해 만들어진 노동자의료보험조합의 의사였다. 비록 케테가 칼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으로 결혼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더욱 더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케테의 어머니는 결혼을 앞둔 딸이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앞으로 살면서 칼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은 결코 없을 거야.”

   언제나 너무 많은 일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남편 칼은 케테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을 돕기 위해 애썼다. 칼 콜비츠는 조용하고 성실한 남편이었고, 늘 케테를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는 원칙적이고 강인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동시에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내인 케테가 이성보다는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예술가적 기질을 보일 때조차 한결같은 태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감싸주었다. 두 사람은 혼인서약의 맹세대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괴롭고 아플 때도 평생을 서로 위로하며 힘든 시절을 견뎌냈다. 두 사람은 결혼 이듬해인 1892년 첫째 아이 한스(Hans)를 낳았고, 4년 뒤인 1896년엔 둘째 페터(Peter)를 낳았다. 케테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세 가지를 얻었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 세 가지는 자식들과 그렇게 충실한 인생의 반려가 있다는 것, 그리고 내 일을 가졌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남편 칼은 케테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피상적으로만 접했던 노동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현장을 제공했다. 칼은 케테가 하층민의 고통과 불행을 직접 경험하고, 그녀의 삶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케테는 결혼 초기에 남편을 도와 무료진료소 일을 거들었고, 종종 남편을 따라 노동자 가족을 직접 방문했다. 친숙해진 몇몇 노동자와 가족들은 직접 그녀의 방까지 찾아오곤 했다. 이들과 직접 대면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면서 케테 콜비츠는 이전까지 품었던 노동자 계급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결혼생활은 남편과 아내가 모두 건강할 때라야 유지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노동자의 아내들을 척도로 보던 판단 기준 역시 바로 이것이다. ‘그녀가 일할 수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노동자들의 세계는 부르주아의 그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세계이다. 그곳은 전혀 다른 가치척도가 지배한다.”

   산업혁명에서 뒤처진 독일이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들보다 몇 배나 더 잔인한 노동을 해야만 했다. 20세기 초반, 독일은 제2차 산업혁명에 접어들고 있었다. 제2차 산업혁명 기간 동안 독일공업의 중심은 과거의 석탄, 제철, 중공업 분야에서 전기와 화학 같은 새로운 산업구조로 개편되었다. 같은 시기 영국의 공업생산이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독일의 공업생산은 무려 다섯 배나 증가할 만큼 독일의 노동자들은 더 오래, 더 많이 일했다.

   경제철학적으로도 영국이 경제문제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추진했다면 오늘날의 경제개발도상국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처럼 독일은 국가가 직접 나서는 보호무역과 개입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도이체방크 같은 거대 투자은행을 통해 자본의 집중을 추구하고, 가격담합을 통해 생산과 판매 조건을 결정할 수 있는 카르텔을 허용했다. 국가가 주도한 독일의 경제구조는 비교적 견고한 편이었고, 정부의 보호 아래 기업의 성장은 촉진되었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를 추진한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경험했던 문제이지만 특히 독일은 몇 배나 빠른 산업화로 인해 더욱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산업화로 촉발된 도시화는 수많은 농촌 젊은이들을 도시로 끌어들였다. 교회가 탄생부터 죽음까지 관장하고, 물레방앗간의 공동 작업이란 촌락공동체(Gemeinschaft)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도시와 자본주의는 놀라운 문화충격이었다. 낯익은 사람들과 이루어지던 친숙하고 안정된 관계는 낯선 도시의 냉혹한 이해관계와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도시에 던져진 사람들은 종종 공동체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홀로 늑대우리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고립된 개인과 자본주의적 일상이 지배하는 사회(Gesellschaft) 속에서 대중은 불안했고, 은폐된 자본주의적 생산구조 속에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했다.

   제국의 수도로 급속히 팽창한 베를린에는 부자들을 위해 화려한 건물들이 연이어 지어졌지만 그 뒤편으로는 더러운 시궁창이 흘러가는 노동자들의 허름하고 보잘것없는 공동주택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골목에는 가난에 찌든 노동계급의 아이들이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무리지어 뛰어 놀았다. 때때로 노동계급의 부모들은 가혹한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남들 몰래 혹은 공공연히 신생아들을 안락사시켰다. 모두의 어깨에 드리워진 실업과 빈곤의 공포는 촌락공동체에 대한 향수를 증폭시켰고, 그로 인해 더욱 강력한 국가와 민족주의 감정이 싹텄다. 급속도로 팽창한 노동계급은 자본가들에 대한 분노로 비타협적인 사회주의로 흘렀고, 다른 한 편으론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로 흘러갔다.

케테 콜비츠의 행복한 시절 - <직조공> 연작과 <농민전쟁> 연작 사이

   첫째 아들 한스를 낳으면서 케테 콜비츠는 자신의 작업들을 조금씩 진척시켜 나가려 했다. 전시회에 참가하기 위해 손과 머리, 자화상 등을 동판화로 시도했지만 전시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다행히 전시회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자유예술전시회’가 열렸기 때문에 케테는 파스텔화 2점과 동판화 1점을 출품할 수 있었다. 미술비평가 율리우스 엘리아스가 그녀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지만, 케테에겐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때마침 예전에 만났던 하우프트만의 연극 「직조공(Die Weber)」이 ‘자유무대’에서 초연된다는 소식을 들은 케테는 이 연극을 반드시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1844년 독일 슐레지엔 지방의 직조공들의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고 있는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은 이들이 봉기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케테는 뮌헨에 머물렀던 탓에 베를린에서 초연된 하우프트만의 연극 「해뜨기 전」을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이제 그녀는 베를린에 있었고, 하우프트만의 새로운 연극이 초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희곡작가 중 하나였고, 정부당국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 때문에 젊은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최고의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그런 탓에 이 날의 공연은 당국의 검열로 일부에게만 허용된 비공개 공연이었다. 그나마도 경찰의 감시 속에 진행되었는데, 케테는 직조공들의 봉기 과정을 다룬 연극을 바라보면서 강렬한 자극을 받았다.

“이 공연으로 나의 작업에 한 획이 그어졌다.”

   그녀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제르미날> 연작을 뒤로 젖혀두고 <직조공 봉기(Ein Weberaufstand)> 연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케테는 이 연작들이 하우프트만의 <직조공> 뿐만 아니라 하이네의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케테의 동판화 기술은 아직 미흡했기 때문에 케테는 동판화 대신에 먼저 석판화로 석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세 개의 동판화 <직조공들의 행진>, <공장주의 집 앞에서>, <최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케테의 작업들은 마치 직조공들이 베틀에 앉아 한 올 한 올 옷감을 짜듯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에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비슷한 구도의 그림들을 숱하게 그리고 변화를 주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했다.

   그 결과 1893년에 시작한 <직조공 봉기> 연작은 1898년에 가서야 6점의 작품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연작을 완성한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나아갈 길이 판화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케테는 이 작품들을 지금까지 예술가의 길로 이끌어 준 아버지에게 바쳤다. 언젠가 케테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삶에는 즐거운 일들도 있단다. 그런데 왜 너는 이토록 어두운 면만 그리니?”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직조공 봉기> 연작엔 그녀의 대답이 담겨 있었다. ‘이들의 삶이 아름답지 않느냐’고. 때마침 70세를 맞이한 아버지의 생일 파티에서 처음으로 케테의 작품을 받아 본 아버지 칼은 자기 집 주변을 뛰어다니며 계속해서 케테의 어머니를 찾았다. ‘빨리 와서 케테가 한 걸 좀 보라’며 어머니에게 케테의 작품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딸의 작품이 정식으로 전시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케테는 1898년의 베를린대전시회에 이 작품을 출품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 안나 플렌은 상심해 있는 친구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케테를 대신해 심사위원회에 출품했고, 케테의 작품은 하우프트만의 연극 못지않은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노동자들이 처해있던 비참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형상화한 것은 케테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직조공 봉기> 연작 앞을 떠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의 저명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 금상을 주어야 한다고 추천했다. 그러나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은 모두 ‘시궁창 예술’이라고 비난했다. 당시는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말만으로도 혁명을 고무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황제는 얼마 전 하우프트만에게 시상하는 것을 거부했던 것처럼 케테 콜비츠의 금상 수여 또한 거부했다.

   케테 콜비츠는 스스로의 성공에 대해 뜻밖이라고 말했지만, 그녀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품들 속에는 당대의 사회현실과 노동자들이 처해있던 비참한 상황이 녹아있었고, 무엇보다 이들의 삶에 대한 낭만적인 시선을 넘어 예술적 성취에 도달해 있었다. 오늘날에도 판화는 회화나 다른 장르에 비해 예술 작품으로는 낮은 취급을 받는 편이지만 케테 콜비츠는 좀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가장 적합한 수단으로 판화를 선택했다. 케테는 시민계급을 넘어 노동계급을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고자했다.케테 콜비츠는 교양 있는 시민계급의 예술로서 ‘아틀리에 예술’에 대치되는 개념으로 평론가들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현실예술’로 규정하는 것에 만족했다.

“아틀리에 예술은 실패한 예술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 관객을 위한 예술이 평이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소박하고 참된 예술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직조공 봉기> 이후 10년 동안을 케테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한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예술가로 떠오른 케테는 자신이 미술을 공부했던 베를린여자예술학교에서 강의를 했고, 막스 리버만이 이끄는 베를린분리파(Sezession)에 가담하기도 했다. 케테는 “괴테라도 여자는 결코 되지 못 한다”고 말할 만큼 여성으로서의 강한 자부심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보다 예술가이자 한 인간으로 먼저 주목받길 원했다. 1916년 분리파 활동 중 여성 최초로 심사위원이 되었지만 여성예술가를 대변하는 몫으로 주어진 것이라며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또 1917년엔 여성예술협회로부터 시 예술위원으로 추천받았지만 스스로 거절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때부터 이미 먼 훗날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인 여성예술가’로 자신을 정형화시킬지 모른다는 고민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케테 콜비츠는 다시 한 번 역사적인 사건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얻은 판화 연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에게 <농민전쟁> 연작을 작업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당시 나는 침머만의 『농민전쟁』을 읽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농민들을 선동하였던 여자 농부 ‘검은 안나’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떨치고 일어서는 농부 집단을 대형판화로 만들었다. 이 작품에 의지하여 나는 연작을 완성해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된 이 작품에 연결되었다.”

   비록 케테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영감을 얻은 연작들을 발표해서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그녀가 역사가의 입장이나 학술적인 입장에서 판화 작업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케테 콜비츠는 언제나 예술가였고, 예술가로서 작업에 임했다. 케테의 작품이 주는 강렬함으로 인해 그녀의 작품이 예술적이기 보다는 선동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민중의 모습만 담겨져 있을 뿐 억압하는 자들의 모습은 담기지 않았다. 케테가 주목한 것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비탄에 빠진 민중이 떨쳐 일어나려는 역동성이 주는 아름다움이지 정치적 선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케테는 무엇보다 작품의 예술적 완결성을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작가였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농민전쟁>연작은 <직조공 봉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습작을 반복했고, 같은 주제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을 폐기해가며 완성된 것들이었다. 그 결과 연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순서와 작품의 완성 시기가 일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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