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케테
콜비츠에게 <직조공 봉기> 이후 <농민전쟁>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는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개인적으로도
매우 행복한 시대였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랐고, 두 번에
걸쳐 파리를 방문할 수 있었다. 또 막스 클링거가 설립한
재단이 수상하는 빌라 로마나(Villa Romana)상을 수상(1907년)하여
1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기도 했다. 비록 이탈리아 체류가
그녀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진 못했지만 파리에서 로댕을
만나 그의 조각들을 감상(1904년)한 것은 그녀에게 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의식을 부추겼다. 케테가 <농민연작>을
끝마칠 무렵 어느덧 그녀의 나이도 마흔을 넘겨 한층 더
원숙해지고 있었다. 케테는 이 무렵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심경과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세세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4년
10월 30일 금요일자 일기에는 단 한 줄만이 적혀있었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6월 24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얼마 전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가 젊은 보스니아 청년에게 암살당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정치적
암살사건은 비교적 자주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전쟁까지 초래할 만큼 커다란 사건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고, 전쟁을 치를 때마다
큰 희생 없이 어렵지 않게 승리했던 빌헬름2세는 전쟁이
일어나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해두고 있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력을 키웠지만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하면 원료를 공급하고, 제품을 판매할 식민지가 부족했던
독일은 프랑스, 영국과 함께 식민지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식민지 경쟁에서
승리하고 유럽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맹국이
필요했다.
당시
유럽의 열강들은 유럽에서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고 해외
식민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 다퉈 군비를 증강하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이 복잡한 동맹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독일 역시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하며 이른바
‘슐리펜(Schlieffen) 전략'이란 전쟁계획까지 만들어두고
있었는데, 마침내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자 독일 역시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이번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러시아가 참전하게 되었고, 그 다음엔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이 잇따라 참전하면서
전쟁은 지역적인 사건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전까지의
전쟁들은 대부분 짧고 결정적인 전투 한두 번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사상자도 적고, 전쟁기간도 짧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은 이번에도 그러하리라 생각했다.
전쟁이 벌어지자 독일 전역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의 독일 병사들은 조기에 승리를 거두고, 성탄절을
집에서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고, 자신만만하게 전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촉발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쟁을
보다 대량으로, 효율적인 살상이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
버렸다. 미처 이런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열렬한 애국심에 사로잡혀 전선으로 달려갔다.
케테
콜비츠의 아들 페터 역시 조국을 위해 참전하길 원했다.
아버지 칼은 흥분으로 들뜬 아들 페터에게 말했다.
“조국은
아직 너를 필요로 하지 않아! 그랬다면 벌써 너를 소환했을
거야.”
하지만
페터는 평소와 달리 아버지를 쳐다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평소의 페터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조국은
내 또래 아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겠지만 바로 나를 필요로
해요.”
페터는
벌떡 일어나 걱정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어머니 케테에게
아버지를 설득시켜 달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엄마,
엄마는 나를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했죠. ‘자신이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단다.’라고 말예요.”
케테는
남편과 아들 페터의 대화를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터가 어머니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케테는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한 페터가 전쟁터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녀는 문에 기댄 채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그들은 페터를 막을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케테는 다시 페터를 설득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칼은 케테에게 ‘이젠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고 힘없이
말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페터는 어머니에게 고맙다며
입맞춤했고, 곧바로 칼이 서명해준 입대허가서를 들고,
자신이 배속된 연대로 달려갔다. 부부는 밤새 울고 또 울었다.
“아기의
탯줄을 또 한 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낳았는데 이제는
죽으러 가는구나.”
그러나
페터의 전사가 마지막 희생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독일에서만 1천3백만의 젊은이가 징집되었고
그중 1백 7십만 명이 전사했다. 가장 근대화되고 발전된
유럽에서 한 세대가 전멸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들의
비참한 죽음 뒤에 케테는 “나는
늙기 시작하여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더 이상 똑바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꺾여 버렸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 아래로 가고 있나 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케테의 상심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페터를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 아들의
기념비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또한 그녀는 더 이상
페터와 같은 젊은이들이 희생당하지 않기 위해 앞장서서
전쟁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잡지에 이런 글을 썼다.
“이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이상 누구도 전사해서는
안 된다. 씨앗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은 페터가 죽은 뒤로도 4년을 더 끌다가 1919년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은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연합군 총사령관은
“이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20년간의 휴전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만큼 제1차 세계대전은 불완전한 상태로 종결되고
말았다.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유럽 열강의 식민정책이
철회된 것도 아니었고,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들 사이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겐 너무나 가혹한 조건이었다.
비스마르크의 철혈정책 이후 유럽에서, 특히 독일에서는
비대해진 군부 세력을 견제할 만한 시민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성장한 시민 세력이
프랑스의 군부를 제어하는 데 성공했지만 독일이나 일본
같은 신흥 공업국들에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유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주로
귀족들로 이루어진 독일 군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하는데
단 한 명의 대표도 파견하지 않았고,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패전의 책임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군은
마치 승전한 군대처럼 의기양양하게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개선했다. 독일의 극우 세력들은 공공연하게 독일군은 전선에
용감하게 싸웠으나 후방의 정치인들과 독일의 영광을 시기한
내부의 불순한 세력(유태인)들이 농간을 부린 탓에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독일은 그나마 얼마 없었던
해외의 모든 식민지를 빼앗겼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빼앗았던 알자스-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반환해야 했다.
또 징벌적 성격의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징병제 금지, 군함
보유량의 제한, 공군·잠수함의 보유를 금지 당했으므로
독일인들은 베르사유조약을 ‘조약’이 아니라 ‘명령’이라
불렀다. 전후 부족한 물자와 치솟는 물가, 핍폐한 경제
상황은 독일 국민들이 치욕을 느낄 새도 없이 가난과 굶주림의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케테
콜비츠는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아들 페터의 기념비를
대신해 자식을 잃은 모든 부모를 대신해 전몰용사 기념비
「부모」를 세운다. 페터의 전사통지서를 받은 뒤로 장장
17년이란 긴 세월이 걸려 완성된 작품이었다. 그녀가 세운
이 기념비는 국가의 공식적인 의뢰나 유가족 협회의 주문을
받고 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케테와 칼 콜비츠 내외를
닮은 형상의 이 기념비는 오늘날까지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모든 부모의 가슴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에는 사랑하는
자식과 전쟁으로 고통 받았던 독일 국민들에게 두 번 다시
씨앗이 짓이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케테는 계속해서 전쟁을 기억하는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1922년 <전쟁> 연작을 완성하게 되자
평화주의자이자 작가였던 로망 롤랑에게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편지를 쓴다.
“나는
그 전쟁을 형상화해내기 위해 무던히 애썼지만 그것을 포착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내가 말하고 싶어 한 것을
어느 정도 말해줄 목판화 시리즈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일곱 개의 판화입니다. 그 제목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과부들」, 「민중」입니다. 이 그림들은 마땅히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보시오,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참담한 과거를.”
케테의
<전쟁> 연작 중 「희생」은 제국주의의 침탈로 고통
받고 있던 머나먼 중국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된 루쉰(魯迅, 1881~1936)은 그녀의
작품을 중국 사회에 널리 소개하면서 오랫동안 일본제국주의에
신음하는 중국인들이 힘을 얻길 바랐다. 오랫동안 판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에서는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활발한 판화운동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
패전
이후 독일은 극심한 좌·우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급진적인 좌파였던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가 일어나자 군부를
비롯한 반동적인 극우세력은 이 일을 빌미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와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1871~1919) 등 독일의 좌파 지도자들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두 사람은 독일 사회민주당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해 혁명을 통한 전쟁 종식과
민중정부수립을 위해 투쟁했다. 두 사람이 살해당한 뒤
리프크네히트의 유족들은 케테를 찾아왔다. 리프크네히트의
유족들은 케테에게 고인이 된 그의 시신을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케테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적 입장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는다.
“그를
애도하기 위해 모여든 수천 명의 인파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다시 이것을 작품으로 옮기도록
했다. 동판으로 시작했지만 곧 그만두고 석판으로 다시
했는데 그것도 그만두었다. 결국에는 목판으로 다시 시작해
끝을 보게 되었다.”
케테
콜비츠는 ‘혁명’이나 ‘무장봉기’라는 이들의 방식에
동조하진 않았지만 이들의 죽음으로 다시 커다란 상처를
받았다. 유족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판화작업은 그로부터
2년이 걸렸고, 판화에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1919년
1월 15일을 추억하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녀에겐
너무나 많은 슬픔과 죽음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토록 단호하게 저항과 투쟁의 전선에 서 있던 그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벌어진 반동적인 사건들로 인해
이제 서서히 죽음과 대면하게 되었다.
“무서운
생각이 든다. 만일 에베르트의 독재와 리프크네히트의 독재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에베르트의
독재를 택할 것이다. 갑자기 나는, 진정한 혁명가들이 무슨
일을 수행했던가를 깨닫게 되었다. 좌파의 이런 끊임없는
압력이 없었다면 혁명이란 없었을 것이며 군국주의를 물리치지
못했을 것이다. 다수당이라고 해서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구원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철저하고 자립적인 사람들,
스파르타쿠스 사람들이 오늘날의 개척자들이다. 그들은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전진한다. 그것이 비록 어리석은
일일지라도, 독일을 망치는 일이라 할지라도.”
구태여
케테 콜비츠를 ‘좌와 우’라는 이념적 구분으로 나누어야
한다면 그녀의 철학이나 삶의 태도는 좌파적인 예술가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케테의 역사적인 연작들이 역사서술자로서의
입장도, 학술적인 입장도 아닌 예술가로서의 작품이었던
것처럼 그녀의 행동이나 실천 역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나
노선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고자 노력했다.
“제발
사람들이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두었으면 한다. 사람들은
나 같은 여성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느끼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케테는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는 판화 작업을 마친 뒤부터 다시
정력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도저히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게 했다. 케테 콜비츠는 연달아 <빈이 죽어간다!
그곳 어린이들을 구하라>, <러시아를 돕자>, <전쟁에
반대한다>, <독일의 아이들이 굶주린다> 등 포스터를
위한 판화 작업에 몰두했다. 긴급한 사안이었으므로 작품
하나하나를 쫓기듯 완성해야 했지만 이 시기에 만들어진
그녀의 작품들 역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독일은 경제공황과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땔감 대신 지폐를 불태울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실의에 빠졌고, 누군가 이런 상황을 타개해줄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극심한 혼란기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였다.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도탄에
빠진 독일을 구원할 지도자로 보았지만 케테 콜비츠를 비롯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만, 아놀드 츠바이크 등은
히틀러와 나치즘이 도리어 시민사회를 위협하고, 독일을
또 한 차례의 전쟁으로 몰고 갈 주범이 될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다. 이들은 제국선거를 앞둔 1932년 7월 18일, 파시즘의
위협에 맞서 좌파들의 단결을 촉구했고, 긴급한 사태를
알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당시 가장 선진적인 헌법으로
알려진 바이마르 헌법의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자 이번엔 두 번째의 긴급호소문이
작성되었다.
“지금
이 순간 파시즘을 거부하는 모든 세력들이 원칙에 상관없이
결집되지 않는다면 독일의 모든 개인적 ․
정치적 자유는 곧 압살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자들은 히틀러가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고, 상처받은 독일의 시민들은 독일의 국가적 자존심을
다시 세워줄 적임자라 생각했다. 좌파 세력의 성장에 위기의식을
느낀 자본가와 종교인, 지주들 역시 무기력한 민주주의와
위협적인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나치당을 선택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에 저항했던 사람들은 하나하나 제거되었다. 케테
콜비츠와 하인리히 만 역시 나치의 압력으로 프로이센 예술아카데미를
탈퇴해야만 했다. 하인리히 만은 예술아카데미를 탈퇴한
뒤 곧바로 망명했지만, 케테 콜비츠는 망명하는 대신 독일
국내에서 망명자처럼 살아야 했다. 히틀러가 수상에 오른
지 한 달여 만에 독일제국의회의사당 방화사건(1933년 2월
27일)이 발생한다. 누가보아도 나치당의 조작이 분명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당은 방화사건의 배후로 독일 공산당을 지목했다.
나치는 사건 당일 밤 안으로 4,000여 명에 달하는 공산당과
그들의 정적을 공범으로 몰아 체포했고, 국가안보가 위태롭다는
명분으로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인신보호법’을 무력화시키는
'긴급명령'을 발효시켰다. 케테 콜비츠와 그의 동료들이
경고했던 대로 이 날 이후 독일 어디에서도 시민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괴테와
베토벤을 사랑했던 독일 시민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처음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그 다음엔 오래전부터 인종적 편견과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유대인들이
거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엔 공산당이, 다시 그 다음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거되었다. 하나씩 하나씩 나치즘에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사라진 뒤엔 언제 자기 차례가 올지
몰라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저항할 정치세력도, 도와줄
사람이 사라지자 그들은 나치의 명령을 순순히 따르든지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든지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묵했다.
1933년
3월 13일 독일에서는 이른바 독일 정신에 위배되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에리히 케스트너 등 131명에 이르는 작가와 지식인들의
책이 불태워졌다. 또 1937년엔 ‘퇴폐미술전(Entratete
Kunst)’이란 전시회를 기획해 오스카 코코슈카, 에밀 놀데,
오토 딕스, 게오르그 그로츠,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 파울 클레, 라이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 바우하우스의 작품들이 독일정신을 좀먹는
‘퇴폐예술’ 죄목으로 끌려 나왔다. 이 같은 전시는 1937년부터
이듬해 뮌헨에서 함부르크 등지로 이어졌는데 관객이 많은
날은 하루에 4만 명의 관객들이 몰려들 만큼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슈많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인리히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브루노 발터 등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망명을 떠났다. 그러나 케테 콜비츠는
떠나지 않았다. 케테 콜비츠는 이 무렵 세계를 뒤덮은 죽음의
기운과 홀로 투쟁하고 있었다.
나치는
1936년 케테 콜비츠에게 어떤 전시회도 개최할 수 없고,
참석할 수 없다고 통보했지만 70세 생일을 맞은 케테 콜비츠는
잊히지 않았다. 비록 정부 당국의 공식적인 축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괴벨스가 주도하는 퇴폐미술전에 참가하기 전에
먼저 케테 콜비츠를 기억했고, 세계 여러 곳에서 축하 메시지를
보내왔다. 미국에서는 그녀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작품전
개최를 제의해 왔고, 중국의 루쉰은 케테 콜비츠를 찬양했다.
“이
위대한 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 작품은
점점 극동에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케테가
침묵하고 있는 동안 죽음의 기운은 그녀의 온몸을 사로잡았고,
세상은 다시 한 번 전쟁의 불구덩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녀의 70회 생일이 지난 지 2년 만인 1939년 9월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남편 칼 콜비츠가 죽었고, 1942년
9월엔 손자 페터가 동부전선에서 전사했다. 페터의 이름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아들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오랫동안 죽음을 친숙한 친구처럼 여겨왔던 케테 콜비츠는
마지막 힘을 기울여 마치 유언과 같은 작품을 남긴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제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요즈음은
무척 우울하다. 나는 다시 한 번 똑같은 것을 파고 있다.
망아지처럼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베를린의 소년들을
한 여인이 저지한다. 이 늙은 여인은 자신의 외투 속에
이 소년들을 숨기고서 그 위로 팔을 힘 있게 뻗치고 있다.
씨앗들을 짓이겨서는 안 된다. 이 요구는 ‘이제 전쟁은
그만’에서처럼 막연한 소원이 아니라 명령이다. 요구다.”
케테
콜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며칠 전인 1945년 4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는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사라지는 것도, 독일이 다시 분단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너무나 괴로웠기에 세상과 작별할 시간만을 염원했던 한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 세계에 알려지지 못했다. 전쟁 속에서 태어나 전쟁
속에 세상을 떠난 케테 콜비츠는 마지막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아니 인류의 모든 어머니들처럼 나약하고 가녀린
생명들을 품안에 가득 안고 있었다.
빵을,
<1924>,
석판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나게
내버려두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200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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