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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블로 네루다는 2004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와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가 네루다의 시 창작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위의 기다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식의 이름에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에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가브리엘 마르께스로 표기하기 보다는 그냥 마르께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물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네루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中에서)이라고 말한다.
 

 

- 파블로 네루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 15세 무렵의 네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고, 그가 칠레 전역에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것은 불과 2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의 공직 생활

  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 네루다의 파리 생활 무렵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파블로 네루다. 투사가 되다.

  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 파블로 네루다가 칠레의 압정을 피해 이탈리아에 망명해있던 시절을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 실제로 그가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을 무렵 이탈리아 당국은 칠레와의 외교 관게를 고려해 네루다를 추방하려 했지만 이탈리아 민중들의 열렬한 반대에 부딪쳐 추방을 포기했고, 네루다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에 머무를 수 있었다.

 

 

 

 

- 파블로 네루다 <사랑의 시편>

 

마추피추의 산정/ 파블로 네루다/ 민용태 옮김/ 열음사/ 1985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추원훈 옮김/ 청하/ 1992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서성철, 김창민 편/ 까치/ 2001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까치 출판사에서 출판한 여러 좋은 책들 중 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 작가들에 대해 글을 상재하고 있다. 이번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글은 그 중에서 김세훈 선생의 글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지음/ 조구호 옮김/ 크레파스/ 1989
- 미겔 리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산티아고 알바레스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미겔 리틴은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때 해외로 망명했다. 칠레 당국은 그의 귀국을 영구히 허가하지 않을 사람 명단에 올려 특별 관리했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귀국해서 독재정권 하의 칠레를 촬영해 전세계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책은 그런 미겔 리틴의 영화 제작기를 마르께스가 인터뷰하여 기록한 것이다.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배윤경 지음/ 이후/ 2000
-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인 가수이자 칠레의 저항가수였던 빅토르 하라의 일대기와 살바도르 아옌데 그밖에 많은 라틴 아메리카 가수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게다가 부록으로 빅토르 하라의 노래가 담긴 음반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반드시 사 볼만 한 책이다. 놓치면 아쉬워 할 것이다.

 http://www.uchile.cl/neruda/

 http://vinkka.telefragged.com/neruda/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현실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

단순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번째 신사가 이기고, 다음에는 두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 파블로 네루다 <추억> 중에서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詩)라네."

파블로 네루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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