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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민권을 노래한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여왕

 

 

 

밥 딜런

존 F. 케네디

해리 벨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마틴 루터 킹

체 게바라

마오쩌뚱

호치민

두브체크

멜리나 메르쿠리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레너드 코헨

 

당신은 자신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선택할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 존 바에즈
 

    바에즈. 나는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내어 부르기 전에,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며칠 밤을 커피만으로 지샌 사람처럼 가슴이 벌렁거린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팝스타들을 따라다니는 어린 소년, 소녀들은 있기 마련인데 우리나라는 이들을 가리켜 오빠부대라 하고, 영어권에선 이런 사람들을 그루피(groupie)라고 한다. 존 바에즈, 그녀를 위해서라면 난 언제라도 이런 사람으로 분류되고 싶다. 정() 중에는 첫정이 제일 무섭다고 하던가. 나는 존 바에즈를 통해 '머리 올린 어린 기생'이라도 된 심정이 들곤 하는 것이다. 이제사 고백하지만 존 바에즈는 뮤지션에게 바쳐진 나의 첫사랑이자, 어린 가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소년 시절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나는 대학로 어느 LP가게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녀의 골든 프라이즈 앨범(Golden Prize Album/ Vangard) 2장을 사고는 차비가 없어서 집까지 비를 쫄딱 맞고 걸어간 적이 있다. 집까지 가는 내내 그녀의 앨범이 비에 젖을 세라 가슴에 꼭 품고 가는 동안 단언컨대 그녀의 앨범엔 단 한 방울의 빗물도 튀기지 않도록 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이 홈피에서 뮤지션의 일대기를 이야기할 때마다 턴테이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무렵의 나는 턴테이블이 없어서 LP를 사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앨범에서 나온 부클릿(영문으로 되어 있었지만)을 보며 혼자 영어사전을 펼쳐놓고 행복한 마음으로 해석한 적이 있다.

  혼자만의 짝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아 부끄러울 지경이긴 하지만, 나는 존 바에즈의 노래를 듣노라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처연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윤기가 흐르면서도 거만하게 들리지 않는, 쥐어짜는 음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힘차게 부르는 노래에도 편안하게 기댈 수가 있다. 어쩌면 나는 그녀의 노래에 나의 거친 욕망과 다듬어지지 않은 이상을 덧칠했는지도 모른다. 1941년 생인 그녀의 나이도 우리 나이로 어느새 60 환갑이 지났지만 나의 머릿 속 그녀는 여전히 검은 머리를 흩날리며 깊게 패인 눈동자로 세상을 응시하는 그런 아티스트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존 바에즈. 그녀는 핵물리학자인 아버지와 희곡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멕시코 계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 속에 성장했다.

 

 

 

함께 노래하는 존 바에즈와 밥 딜런 - 1963년 워싱턴 D.C.에서 시민권 신장을 위한 행진을 한 뒤의 공연 모습이다.

 

 

 

뱅가드 레이블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존 바에즈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행진하는 존 바에즈(1966년 미시시피 그레나다) - 존 바에즈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의 영향으로 비폭력 노선을 주장했다.

 

 

 

애견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존 바에즈

 

 

 

존 바에즈(1997년)

 

 

 


아메리칸 포크(American Folk)

  웹스터 사전은 '포크(Folk)'라는 단어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운율, 후렴구, 멜로디를 가지고서 작곡된 곡"으로 정희하고 있다. 영국으로부터 신대륙으로 이주해온 백인들의 음악인 포크음악은 유럽의 포크 음악과는 다른 것이다. 미국의 포크 음악은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 흑인음악과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혼합되었다. 1930-40년대 미국의 정치적 급진파(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해서)들은 빈곤과 대공황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구전민중문화를 탐구했고, 일부는 포크송을 수집했다. 아메리칸 포크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가 미국 공산주의 청년동맹의 맹원이었던 사실이나, 피트 시거가 매카시즘 당시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던 것도 이런 뿌리가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 포크 음악의 음악적 뿌리는 컨트리 음악과 다르지 않고, 그 음악적 형식도 상당히 유사하다. 포크 음악의 '순수성' 이데올로기는 어쿠스틱 악기가 만드는 '자연음'과 '진실의 노래(song of substance)'로 상징되었다. 포크 음악의 악기 구성이 간단한 이유는 포크 음악이 가사에 담긴 진실된 메시지의 투명한 전달을 목표로 만들어진 음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초기 포크 음악은 피아노와 같은 악기를 부르주아 가정의 악기로, 일렉트릭 기타를 속물적이고 상업적인 악기로 치부했고, 하모니카나 밴조 정도를 추가하는 것만으로 악기 구성이 완료되었다.

우디 거스리는 전통 포크를 모던 포크로 다듬은 아티스트이자 평생 동안 방랑하며 포크 음악을 수집하고 자신의 창작곡을 남긴 선구자였다. 그는 피트 시거와 함께 구전 민요였던 포크 음악을 창작자가 있는 예술 작품으로 변모시켰다. 그러나 포크 음악은 매카시즘의 시기에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포크 음악의 '진실의 노래'를 추구하는 정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존 바에즈와 킹스턴 트리오, 피터 폴 앤 메리가 등장하면서 '포크송 리바이벌'이라는 포크 음악의 부흥이 시작되었고,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포크의 정신에 충만한 노래들과 실천으로 포크 음악의 왕과 여왕으로 군림했다.

특히 밥 딜런은 이제까지의 포크 음악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시적인 가사, 강렬한 보컬, 곡조와 박자를 무시하는 듯한 창법으로 포크 음악은 물론 일반 팝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은 상업적인 악기로 치부되던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와 '포크 록'이란 새로운 장르의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대중은 아직 그의 변화를 이해해 주지 않았다. 60년대 중반 이후 포크록은 포크 음악에 있어 하나의 대세가 되었고, 버즈(The Byrds), 마마스 앤 파파스, 사이몬 앤 가펑클 등이 포크 록 그룹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포크 록과 포크 음악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가는 음악으로서의 힘을 잃었고, 그 명맥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선 포크 음악 아티스트들로 분류되는 랜디 뉴먼, 제임스 테일러, 레너드 코헨, 돈 맥클린 등은 포크 뮤지션보다는 싱어송라이터로 분류된다. 어쨋든 포크 음악은 이런 싱어송라이터(이탈리아에선 '칸타토레')들을 통해 명맥이 유지되었고, 외국에선 안젤로 브란두아르디, 조르주 무스타키, 프랑소와 아르디, 루치오 바티스티 등이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다.

1970년대 말 이후 예전의 순수 포크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고, 포크 음악 공연장은 사실상 추억을 공유하는 이들의 동창회 같은 분위기로 유지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들어 수잔 베가, 트레이시 채프먼 등과 같은 여성 포크 뮤지션들의 등장으로 이어져 가고 있다. 한편 포크 음악이 점점 더 먹고 사는데 지장없는 이들을 위한 음악이 되는데 반기를 들고 나온 포크 음악이 바로 안티 포크(Anti Folk) 운동이었다. 아니 디프랑코 같은 뮤지션은 자신의 인디레이블을 설립하고, 음악적으로는 펑크, 힙합 등 이질적 장르를 섞고 정치적으로는 페미니즘적이고, 사회주의적인 내용을 담아 '이지 리스닝 팝'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던 포크 음악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혹자는 인디 록을 미국 대학생들의 포크 음악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데, 어쨌든 현재의 포크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를 통해 재현되지 않고, 그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 만큼은 명확한 듯 보인다.

(밑의 책. 음악평론가. 신현준의 글을 주요 텍스트로 아메리칸 포크 음악을 재정리해보았습니다.)
 

 


포크 음악의 마돈나, 존 바에즈의 성장기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 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고, 한때는 아버지를 따라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살기도 했다. 그녀의 부친은 물리학자로 MIT 등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되는 교수였지만, 멕시코계라는 이유로 존 바에즈는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 존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가정적 환경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존 바에즈가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Palo Alto)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14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고, 1956년엔 그녀만의 첫 기타를 구입해 이곳에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해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57년엔 간디주의 철학자인 아이라 샌드펄(Ira Sandperl)을 만나 그녀로부터 강한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 1958년 존 바에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데모 음반을 제작해 음반사에 보내지만 레코드 취입을 거절당하고, 아버지가 MIT와 인근의 몇 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자 아버지를 따라 매사추세츠주의 벨몬트로 이사한다. 보스톤 대학에 등록한 그녀는 학업보다는 자신의 뮤지션 경력을 꽃피우는 데 치중했다. 그녀는 처음엔 보스턴과 케임브리지 지역의 작은 클럽들에서 노래했는데, 곧 그리니치 빌리지로 옮겨 갔다.

  그녀가 정식으로 무대에 데뷔한 것은 1959년 캠브리지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에서였다. 존 바에즈는 이곳에서 빌 우드(Bill Wood)를 만났고, 얼마후엔 테드 알레비조스(Ted Alevizos)까지 합류하여 앨범 <Folksingers 'Round Harvard Square>를 보스톤의 지역 음반사인 베리타스에서 발표했다. 공연 기획자인 알버트 그로스만은 그녀를 눈여겨 봐두었다가 시카고의 유명한 포크 클럽인 <게이트 오브 혼(The Gate Of Horn)>에 서도록 했다(미국의 컨트리 음악이나 포크 음악에서의 뮤지션들은 대개 이런 경로를 통해 발굴된다). 존 바에즈가 미국 전역에 알려지는 계기는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1959년 7월 11일 개최된 제1회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서 밥 깁슨(Bob Gibson)의 백업 보컬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녀의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쏟았고, 이듬해에는 정식 멤버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를 주목한 포크/블루스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는 존 바에즈와 12년간의 계약을 맺었고,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둬 8장의 골드 앨범과 한 장의 골드 싱글을 기록한다.

포크의 왕과 여왕의 만남. 존 바에즈와 밥 딜런, 그리고 정의(正義)

  1961년 4월, 존 바에즈는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의 저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밥 딜런과 처음 만나게 된다. 그녀는 뱅가드에서 자신의 두 번째 음반을 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오프닝 공연에 함께 했고, 이후 포크의 왕과 여왕은 연인이 되어 동거하기도 했다. 이해에 그녀는 처음으로 전미 콘서트 투어에 들어갔는데, 그녀는 이 콘서트를 통해 인종차별주의와 흑인의 공민권 확보를 위한 주장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은 1962년 11월 23일자 <타임>지의 커버스토리로 실리게 된다. 1955년 알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발생한 흑인들의 버스승차거부운동은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던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좀더 자세한 사항은 <유리병편지> 79호를 참조하시길). 여기에 앞장 선 사람이 간디의 비폭력노선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목사였다. 존 바에즈는 1963년 3월 25만 명의 민중과 함께 인종차별 철폐와 흑인 공민권 확대를 요구하며 워싱턴 D.C까지 이어지는 거리 행진에 참여했고, 이들 앞에서 <우리 승리 하리라(We Shall Overcome)>을 노래했다. 이 해 8월엔 노예해방 선언 백주년을 기념하는 워싱턴 대행진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너무도 유명한 연설의 서두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을 말했다. 이 행진엔 존 바에즈, 밥 딜런, 피터 폴 앤 매리, 해리 벨라폰테, 마할리아 잭슨 등의 쟁쟁하고 의식있는 뮤지션들이 함께 했다.그러나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달라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1965년은 존 바에즈에게 그리고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녀는 1965년 5월 17일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 포크 페스티벌에 밥 딜런과 함께 출연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6월 17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북베트남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베트남전은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의 전면전이 되었다. 같은 해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엔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물론 피트 시거(그는 50년대 '위버스weavers'를 이끌며 학생 포크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매카시즘 선풍 때 공산당으로 몰리기도 했다), 미시시피 존 허트, 잭 엘리엇, 이안 앤 실비아, 탐 팩스턴, 필 오크스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포크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였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의 음악에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고, 존 바에즈의 노래는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녀의 노래들은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해 포크 음악이 배출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션이 되었다. 베트남전이 격화되면서 미국 정부는 막대한 전비를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의 수입 중 60%가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총탄과 포탄이 되는 세금으로 원천징수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그녀는 세금 징수에 불복했고, 존슨 대통령에게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 바에즈는 자신의 주장을 좀더 널리 알리기 위해 흑인 공민권 확대를 위한 콘서트와 반전 등 여러 현장에서 무료로 공연하며 자신의 의지를 실천으로 옮겼다. 이 해 연말 존 바에즈의 앨범은 그래미상의 '베스트 포크 레코딩' 부문 수상 후보작이 되었다

  이 해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연인 관계를 끝냈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의 관계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이 두 사람은 포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저항 정신을 실천한 운동가였다. 존 바에즈와 밥 딜런은 당시 미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 - 인종차별, 베트남전, 세대간의 갈등 등 - 을 저항과 리얼리즘의 정신으로 담아냈고, 삶에 대한 열의와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했던 청년 문화의 대변인이었다. 물론 존 바에즈에게 끼친 밥 딜런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밥 딜런을 가장 중요한 포크 뮤지션으로 주목받도록 한 사람이 존 바에즈란 사실도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다. <뉴스위크>지는 "포크송의 여왕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을 왕자로 책봉했다"고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에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고, 포크 음악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 서로 많은 교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프로테스탄트 포크라는 포크 음악의 순수함을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나갔고, 포크 음악의 대중화란 측면에선 밥 딜런보다 더 많은 공로를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억압받는 자의 노래하는 교사. 존 바에즈

  '진보'를 "강한 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약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존 바에즈만큼 이런 진보의 정신에 충실했던 뮤지션은 드물 것이다. 그녀의 노래는 늘 힘없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을 각성하게 만들었다. 가난한 이민자들로 대표되는 사회적 소수의 정서를 노래에 담았고, 잊혀진 그들의 권리와 상실된 권리를 찾도록 부추겼다. 그녀의 노래는 소외받는 민중들의 위안이자 실탄이 되었다. 1960년대의 미국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부였고, 국민 대다수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쟁을 지속시켰다. 더군다나 그 전쟁은 미국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불의의 전쟁이었다. 1966년 봄 그녀의 초기 앨범 3장이 미국 레코드 산업협회(RIAA)로부터 골든 앨범으로 인정받았다. 존 바에즈는 시종일관 약자 편에 서서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반전시위 현장에서 흑인의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쉬지 않고 노래했고, 시위에 직접 참여했다.

  존 바에즈는 미국 사회의 보수층을 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1967년 일본 공연에서 그녀의 정치적 발언이 의도적으로 오역되는 일이 일어났고, 당시 그녀의 통역자는 CIA요원으로부터 존 바에즈의 정치적 발언들을 오역하도록 압력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CIA는 이런 사실을 부인했다. 일본 공연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예정되었던 워싱턴 컨스티튜션 홀에서의 공연을 열 수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 유공자의 자손들 모임인 DAR(the 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이 그녀의 반전운동을 문제삼아 공연허가를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들의 공연허가 거부에도 불구하고 즉석에서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워싱턴 기념비 앞에서 무료로 콘서트를 개최했다. 존 바에즈의 확인되지 않은 일화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녀의 허가되지 않은 공연을 방해하기 위해 경찰관이 야외공연의 필수인 앰프와 마이크 사이의 연결되는 코드를 모두 빼앗자, 존 바에즈는 무대에서 내려와 청중들 한 가운데 자리잡고 노래했다. 청중이 그녀의 노래에 호응해 함께 노래를 하자 경찰이 압수했던 공연 장비를 어쩔 수 없이 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존 바에즈의 행동은 미국의 보수 우익들에겐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들의 증오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 해 10월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는 군 입소대 입구를 무단으로 점거하기까지 했다. 그로 인해 10일간의 형을 받기도 했다.

  1968년은 그렇게 밝아왔다. 68혁명에 참여하기도 했던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존 바에즈는 이 해 3월 26일 팔로 알토의 평화와 자유 공동체의 리더이자 행동가인 데이빗 해리스와 결혼한다. 68혁명에 대해서는 앞으로 별도의 장에서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이 한 해에는 정말 엄청난 일(프라하의 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등)들이 일어났고, 그 전해에 죽은 체 게바라는 1968년의 젊은이들이 숭배한 주요 영웅들(마오쩌뚱, 호치민, 두브체크와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젊은이들은 서구의 근대합리주의 문명이 창출해낸 모든 권위에 저항했고, 부인했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 체제들, 근대적 합리주의와 그것이 낳은 관리 사회, 인간 소외의 구조를 파시즘(전체주의)과 동일한 의미로 파악했고, 기성 세대의 권위를 깡그리 짓밟고자 했다. 미국에서 청년들은 징집 영장을 공공연히 불태웠고, 프랑스에서는 바리케이트를 넘어서며 해방을 외쳤다. 그들은 모든 금기들 '정치적·사회적·성적 금기 등 모든 금기'에 대해 도전하고, 저항함으로써 혁명을 성취하고자 했다.

추락하는 순수의 시대와 마지막 생존자, 존 바에즈

  1969년 그녀의 남편 데이빗 해리스가 징병 기피 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았고, 20개월을 복역하게 되었다. 존 바에즈는 남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남편에게 바치는 <David's Album>을 발표했고, 8월에는 역사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벌(The Woodstock Festival)에 참가했다. 그렇게 1960년대가 저물고 있었다. 진보의 목소리가 세상을 뒤엎을 것 같았던 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되자 세상이 돌연 잠잠해졌다. 3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3일간의 음악, 평화, 사랑의 제전'을 제창한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성공은 60년대라는 시공간이 쌓아올린 금자탑이자 동시에 정점이었다. 그 이후엔 끝을 알 수 없는 '순수의 추락'이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열린 앨터몬트 페스티벌에서는 롤링 스톤스 공연 때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 - 인근의 악명높은 폭주족들이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로 맥주값 500달러에 행사진행 및 안전요원으로 채용되었다 - 공연을 관람하던 흑인 관객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듬해인 1970년엔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도어즈의 짐 모리슨이 약물로 인해 사망했고, 올맨 브라더스의 듀언 올맨, 더 버즈의 클라렌스 화이트 등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록의 혁명성과 포크의 순수를 믿었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었다. 록은 상업주의의 포로가 되었고, 포크 음악은 활로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밥 딜런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짊어졌고, 그의 노래에선 더 이상 '우리'란 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나'라는 개인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이런 시기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았다. 1971년 10월 그녀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신음하는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었고, 그 자리엔 그리스 최고의 여배우이자 역시 뛰어난 자유의 투사였던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ouri)와 그의 남편이자 영화감독 쥘 다생(Jules Dassin)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뱅가드 레이블을 떠나 A&M으로 옮겨갔고, 이제 그녀의 음악형식도 뱅가드 시절의 전통 포크의 모습에서 새로운 음악스타일로 옮겨 가게 되었다. A&M시절 그녀의 최대 명곡인 <Diamond & Rust>는 1972년 4월에 발매되었다. 1973년엔 국제인권사면위원회 엠네스티(Amnesty)의 기금 마련을 위한 활동을 했고, 1975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밥 딜런 등과 함께 전미투어를 했다. 76년엔 자신의 자작곡만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앨범 <Gulf Wind>를 발표했다. 그녀는 1977년 독재자 프랑코의 지배 아래있는 스페인을 방문해 TV 생방송 중 40여년 전부터 금지곡이었던 <No Nos Moveran(We Shall Not Be Moved)>을 노래했다.

  존 바에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무릎썼다. 그녀는 베트남의 하노이, 북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다. 그녀는 노래하고 또 노래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를 위해 노래했다. 이런 그녀의 활동을 인정한 안티오크 대학과 루트거스 대학에선 그녀의 정치적 행동과 음악성을 인정해 명예인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존 바에즈는 레이건 집권 이후 더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한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가장 최근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다. 존 바에즈는 한때 1 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수 없다."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팝아티스트 대사전』/ 세광음악출판사 편집국 엮음/ 세광음악출판사/ 1990년 - 팝 음악에 관심있던 때 사두었던 책인데 사전이란 의미에 충실한 탓인지 뮤지션들의 음반에만 관심있는 것인지 정작 뮤지션들의 생활이나 음악적인 관심사 등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록의 시대 - 저항과 실험의 카타타르시스』/ 알랭 디스테르 지음/ 성기완 옮김/ 시공사/ 1996년 - 서울대 출신 시인이자 음악컬럼니스트, 그 자신이 인디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는 성기완이 프랑스의 록음악 전문 칼럼니스트인 알랭 디스테르의 책을 번역하여 옮긴 것이다. 책의 중간중간에 우리로서는 다소 생소한 프랑스 록음악과 록그룹에 대한 이야기가 사족처럼 끼어든다는 사실을 제외하곤 풍족한 사진 자료와 함께 우리들로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록음악의 역사를 읽어볼 수 있다.

『록음악의 아홉가지 갈래들』/ 신현준 지음/ 문학과지성사/ 1997년 - 록 음악은 그 하위 장르가 많기로 유명한 음악 장르이기도 하다. 앞의『록의 시대 - 저항과 실험의 카타르시스』의 경우가 록음악사에 관한 책이라면 이 책은 록 음악의 장르에 대한 책이다. 블루스로부터 펑크 음악까지 록 음악의 다양한 장르를 두루 섭렵하고 있다.

『록 젊음의 반란』/ 서동진 지음/ 새길/ 1998년 - 지금은 문화비평가로, 퀴어영화제 기획자로 더 잘 알려진 서동진의 록 음악 역사서이다. 현재 국내에서 우리말로 된 록음악의 역사서 중 가장 뛰어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이 아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어쨌든 좋은 책이다.

The Madonna of Folk - 존 바에즈의 팬이 만든 존 바에즈의 팬 사이트이다. 링크를 비롯해서 많은 아티클들이 있다.(영문)

Vangard - 존 바에즈와 오랫동안 함께 한 레이블인 뱅가드의 사이트이다. 후배가수인 제니스 이안이 존 바에즈에 대해 쓴 글도 있다.(영문)

존 바에즈 팬페이지 - 존 바에즈의 가장 최근 근황까지 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영문)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 - 이미 몇 차례에 걸쳐 소개된 바 있지만 인터넷 서핑을 처음 시작했을 때, 만난 가장 유익한 홈페이지들 중 하나였다.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페이지이지요. 그리고 저도 이처럼 홈페이지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주 좋은 페이지이다. (한글)

 


존 바에즈와 포크음악

  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상업화된 록 음악에 애써 혁명성을 덧칠하거나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부 음악 평론가나 지식인의 행동은 일종의 코스츔에 불과하단 생각을 하고 있다. 또한 운동가요 혹은 민중가요가 예전의 효용을 되찾기 위해 록음악의 형식을 띄는 것, 저녁 시간에 청춘 문화의 상징 어쩌구 하면서 다 늙은 포크송 가수들이 나와 과거의 낭만 타령을 하는 방송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 다 비슷한 일들로 여겨진다. 밥 딜런이 어쿠스틱 기타를 포기했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일렉트릭 기타를 이용해 만든 음악의 내용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록음악이란 형식을 이용한 음악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천의 무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한 서구의 음악적 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우리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일삼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록음악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이유는 될지 언정 그다지 책임있는 비평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지난 1980년대 '운동가'라는 형식을 띈 여러 형태의 음악들을 만났다. 이중 일부는 현재까지 즐겨 노래하게 되는 명곡으로 살아남은 것들도 있지만 현재는 예전에 비해 그 중요성이 많이 반감된 것도 사실이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음악의 부흥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밀접한 현장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음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밥 딜런이 이야기했다는 "브로드웨이에 죽치고 앉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노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허나 세상엔 사랑과 섹스 말고도 중요한 것이 존재하는 법입니다."란 말은 여전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존 바에즈가 전문적인 음악 교육 없이도 3옥타브를 넘나드는 비브라토의 향연을 펼쳐보일 수 있다거나 하는 것은 그녀의 음악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는 거의 중요치 않은 점이다. 그녀는 늘 현장에서 함께했고, 말뿐인 지성인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신의 노랫말과 함께 했다. 그녀의 음악이 늘 시대와 동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것. 그것이 그녀의 노래가 지닌 가장 강한 힘이었다. 그것이 존 바에즈의 노래가 영혼을 움직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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