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경쟁
장 자끄 상뻬 지음, 이건수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4월
어떤 뮤지션들, 어떤 작가들, 어떤, 어떤... 사람이든 그가 예술가라면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새로운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자신이 내보내는 작품이 과연 어떤 반응을 받게 될 것인지... 고민할 것이고, 그것이 과연 새로운 창작, 창조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예술가들만큼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에 민감한 존재도 드물다. 사람들 역시 늘 고만고만한 예술가를 보면 화가 날테지. 어제 했던 얘기를 내일 다시 살짝 변주하여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작가들 만큼 짜증나고 몰염치해보이는 이들도 없으므로...
그런데 장 자끄 상뻬는 이 경우 조금 예외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의 작업들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많은 지라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라 해도 좋을 만큼 풍성한 번역본들을 가지고 있다. 엄밀하게 얘기해서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고, 특히 지금 말하려는 "어설픈 경쟁"과 "거창한 꿈" 같은 작품집은 빼어난 걸작이라 하긴 곤란하고 작가의 소품집 정도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상뻬의 "어설픈 경쟁" 표지부터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다. 체스판 위에 놓인 넥타이를 맨 남자의 모습, 어쩐지 남의 얼굴을 보는 것 같지 않다.
사실 이 책은 현재 품절 상태인데, 지난 번에 헌책방에 갔다가 "거창한 꿈"과 함께 구입했다. (한 마디로 땡 잡았지) 첫 장을 넘기면 거대한 보잉 747 점보 제트기 앞에 탑승을 기다리며 줄줄이 늘어선 넥타이 부대원들의 모습이 왜소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을 함께 보여주기 전에야 상뻬의 작품들이 지닌 매력을 전부 알려줄 수 있을까? 15쪽에 이런 그림이 있다. 펼친 면을 이용해 가득하게 들어찬 수풀과 나무들, 그 앞에 자그마한 이젤을 놓고 화가인듯한 양반이 팔레트를 손에 끼고 이렇게 읊조린다.
"먼저 내 소개를 하겠소. 나는 세자르 라베르뉴고, 여러 전람회에 출품하여 수 차례 금, 은, 동메달을 땄소."
위대한 창조자 자연 앞에서 작은 창조자인 화가(인간)이 우쭐대는 순간.. 인간은 더욱 왜소해보인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작가와 방송 진행자가 앉아 있다. 방송진행자가 질문한다.
"선생께서는 열두 권의 소설책을 집필하셨고 수십만의 독자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또한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지요. 선생께서는 여러 나라에 수많은 저택을 소유하고 계시고 여러 대의 요트는 물론 다양한 종류의 자동차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점은, 왜 선생은 딱 한 번만 결혼하셨습니까?"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거대한 마천루,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 북적대는 사람들 틈에 두 사람이 걸어간다.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해본다네. 누군가 미소지으며 길을 건너와서는, 내게 악수를 청하며 말을 거는 거야. 감사합니다. 당신이 안계셨더라면 이 황량한 세상에 정말 뭔가가 부족한 듯 아쉬웠을 겁니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이 지닌 매력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이 특별한 변화를 꾀하는 어떤 스타일 상의 변화를 매 작품마다 이루는 건 아니다. 그의 초기작으로부터 후기작에 이르는 동안 물론 그림체에도 약간의 변화들이 있었다. 선이 좀더 가늘어졌다거나 등장하는 이들의 머리숱이 제법 줄어들었다거나 하는 변화는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일관된 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인간에 의한 따스함이다. 물론 그의 작품들 속에서 종종 자연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 속 세계는 철저하게 인간의 세계, 인간의 관계가 빚어내는 묘한 아우라의 향연들이다.
그런 점에서 상뻬는 철저한 인본주의자이고, 뼈아프지만 결코 무거운 통증이 아닌 정도의 무게감을 지닌 풍자가 돋보인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어느 페이지부터 펼쳐 보아도 역시 상뻬는 봄날 오후 햇빛 가득한 창가에 기대어 홀로 키득대고 웃다가 슬퍼지게 만드는 그런 드문 작가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그의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철없는 어린이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나는 체스판에 놓여 있다. 집값을 염려하고, 날로 두둑해지는 아랫배의 지방질을 걱정하는... 그럼에도 이 황량한 세상에서 누군가 내게 당신이 계셔서 다행이란 말을 듣고 싶은 건 나의 거창한 꿈일까? 날로 왜소해져 가는 내게 그나마 희망 같은 건 아마도 그런 류의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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