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3년 7월
나는 개인적으로 이주헌 선생의 "미술로 보는 20세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고, 그가 집필한 책들은 거의 대부분을 신뢰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열심히 구해서 읽었다. 그럼에도 종종 그가 너무 많은 책을 너무 단기간에 많이 출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알라딘에 소개된 "저자 소개"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2005년 현재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과연 그는 집필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일까. 나는 실제의 이주헌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으며, 그와는 일면식도 없기에 그가 실제로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다음의 책들이 단기간에 쏟아지고 있는 현실을 말하고 싶다.
2005년 5월 "그림 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 2005년 3월 "아름다운 풍경화에 뭐가 숨어 있을까-어린이를 위한 이주헌의 주제별 그림읽기", 2004년 12월 "오늘 - 생각하는 그림들", "정-생각하는 그림들", 2003년엔 그와 관련된 책이 6권이나 나왔다. 불과 3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10권의 책이 나왔다. 그가 열심히 살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맞다. 그렇다."이다. 내가 그의 실생활을 모른다는 걸 전제로 그것이 전업 글쟁이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대한 상식 수준에서 한 마디하자면 문화로 먹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아직까지 밥벌이가 안 된다. 오늘 간만에 은행에 가서 통장정리를 했더니 3개월 전인가 마감시켜준 원고료가 들어왔다. 세금 떼고 어쩌고 하니 10만원이 안 된다. 내가 그 글을 쓰기 위해 읽은 책이 서너 권이고, 거기에 더해 하루 몇 시간씩 내 일당을 계산해보면 이건 분명히 적자다.
그에 비해 문화의 다른 영역들, 지방 자치 실시 10년이 지나면서 여기저기 우후죽순으로 생긴 지역 문화 축제 현장에는 눈 먼 돈(세금)들이 떠돌아다녀서 먼저 잡는 놈이 장땡이란 소식도 들려온다. 지역의 토산품 이름을 내건 무슨무슨 아가씨 시리즈들이 결국 "미스코리아" 대회의 아류들인 것처럼, 지역의 무슨무슨 축제들을 구경하노라면 어쩌면 이리도 판박이 같은지 모르겠다. 테마는 달라지더라도 실제 축제의 내용물들을 담고 있는 형식이나 내용의 실질적인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이 책하고 무슨 상관인가. 물론 큰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의 201쪽에 수록된 모딜리아니의 사망일이 1920년 11월 25일로 기재되어 있단 점을 빼놓곤 말이다. 실제 모딜리아니는 1920년 1월 24일 사망했다. 다른 부분에서도 틀린 부분이 있는지, 혹은 모딜리아니가 11월 25일 죽지 않고, 1월 24일 죽은 것이 뭐그리 중요하겠나. 하지만 평소 좋아하고 주목하고 있던 어떤 작가의 예기(銳氣)가 시드는 징조처럼 느껴지는 건 못내 아쉽다. 이를테면 그에게 생활이 적당한 무게로 유지되고 있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마음....(강우석 감독이 엊그제 영화배우 최민식과 송강호의 실명을 거론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이중의 부담을 안겨준다. 하나는 비록 서평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이렇게 말하는 게 괜찮을까 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네들보다 이주헌 선생이 못한 게 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좀더 오래 묵힌 글들을 책으로 엮지 못하고 급하게 내고 있는 건 아니냐는 나의 과도한 염려증 때문이다.)
"화가와 모델"이란 책에 대해 약간의 냉소를 섞어 이야기하자면 남성들은 남성이 주종이었을 서구 르네상스에서 근대에 이르는 화가들과 모델의 연애 에피소드를 소개받는 즐거움이 있다. 가끔 예술가들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은 오늘날에도 술자리에서 얼마나 즐거운 안주거리가 되는가. 또 여성들은 품격을 유지하는 (그들의 지적 수준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지만) 적절한 수준에서 환상적인 그림들을 보며 약간의 나르시시즘, 환상을 맛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 "화가와 모델"이 스노비즘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쿠르베와 조안나(그렇다. "세상의 근원"의 모델 - 조안나), 번 존스와 잠바코,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느, 에곤 실레와 게르티 실레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화가의 붓 끝에서 영원을 얻은 모델 이야기"란 부제에도 불구하고, 관음증의 흔적들, 남성은 주로 관찰하고, 창조하는 화가의 역할을 맡고 여성은 주요 소품(오브제)이 되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읽는 일은 화가와 모델만 관찰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자신의 시선 또한 따라 가보야만 한다는 숙제를 남긴다.
지나치게 우울한 서평인 듯하여 약간의 변명을 더하자면... 이주헌 선생의 이 책은 아주 재미있다.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으며, 관음증 문제는 단지 나의 관음적 시선 처리 문제의 고민일 뿐이다. Never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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