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2/ 정연식 지음 / 청년사 / 2001년 8월
"모씨(某氏) 가문 보지(譜紙)는 천하에 좋은 커다란 보지이니 우리가 정성껏 해주지 않으면 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은 이 책 1권 4장 괴로워라, 중 노릇에 나오는 일화의 대사이다. 조선시대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잘 배운대로 숭유억불 정책을 써온 사회라 중노릇 하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시시때때로 각종 관역이나 사역에 끌려다니거나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있는 사찰의 특성 상 구경 나온 양반님네들의 가마 메는 노역에까지 끌려 다녀야 했다. 그나마 이렇게 몸을 떼우는 일이야 어떻게든 버텨보면 될 일인데, 관아나 서원, 향교에 종이를 만들어 상납하라는 독촉이 빈번하니 가뜩이나 가난한 사찰 경제를 붕괴시키는 노역 중에서도 상노역이었던 모양이다.
관아에 바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지방에서 힘깨나 쓴다는 양반토호들까지 가세하여 종이를 상납하라고 하니 스님들도 어지간히 참을 만큼 참았던 것이 폭발했다. 폭발했다고 해서 힘없는 자가 힘있는 자에게 힘의 댓거리를 할 수는 없어 울며 겨자먹는 말로 비아냥 거린 것이다. 다음은 본문의 이야기이다.
김삿갓의 시에 얽힌 이런 일화가 생겨났다. 어떤 문중에 족보를 간행하기 위해 김천 직지사에다가 종이를 만들어내라고 하자 절에서 문중 사람들을 초청하여 종이 만들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기골이 장대한 중이 "모씨(某氏) 가문 보지(譜紙)는 천하에 좋은 커다란 보지이니 우리가 정성껏 해주지 않으면 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며 은근한 야유를 하자 문중 사람들이 제대로 항변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일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저 구절을 읽고는 떼굴떼굴 구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간 우리 역사를 보다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학자들이 많은 노력을 해왔고, 이 책 역시 그런 흐름을 타고 나온 책 중 하나이다. 이 책의 저자 정연식 선생은 '저자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 "역사학은 사람들의 삶의 자취를 더듬는 학문이다. 사람의 삶이 빠지고 나면 역사학이 설 자리도 없어진다. 그래서 프랑스 중세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훌륭한 역사가는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 같아서 사람의 살냄새를 찾아다닌다고 하였다. 생활사는 가장 가까이서 옛사람의 살냄새를 맡은 수 있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저자의 서문에서 이 책에 대한 중요한 관점 두 가지를 미리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날학파와 생활사이다.
그가 말하는 프랑스 중세사학자 마르크 블로크(Mark Bloch)는 또 누구인가? 역사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이들이라면 한 두 번은 충분히 그 이름을 들었던 기억이 날 것이다. 그는 루시앵 페브르(Lucien Febvre)와 함께 아날학파의 공동 창시자이자 명저 <봉건사회>를 저술한 중세 사학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그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뒤에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1944년 붙잡혀 총살형을 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마르크 블로크를 이야기하고 있는 정연식 선생 역시 우리 사학계에서는 제법 특이한 인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평소 글쓰기 지론은 "논문은 잡문처럼, 잡문은 논문처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생각의 발로가 책으로 묶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전체가 1,2권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권에서는 "말을 알아듣는 꽃, 기생/ 조선 여인들의 평생 소원, 쌍가마/ 말탄 아낙네, 나귀 탄 선비/ 괴로워라, 중 노릇/ 마마신의 저주/ 악처 열전/ 아! 고달픈 신참생활/ 간담 서늘한 형장 풍경/ 못 잊을 상사초, 담배/ 오래된 구경"으로 10장으로 구분하고 있고, 2권에서는 "푸른머리사내종, 벌건다리계집종/ 이름도 못 남기고 사라진 범/ 새벽에도 먹은 점심/ 칡신의 악몽, 고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비극/ 옷섶잘라 갈라선 부부/ 개구리밥꽃 귀양살이/ 큰말작은말, 누고치우기"의 8장으로 구분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구 근대 역사학은 랑케의 사실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근대 역사학은 사료의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역사학을 마치 고증학처럼 축소시켜 일반 대중에게는 까다롭기 그지 없는 학문으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는 동양의 인문학적 전통인 "문사철(文史哲)"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중요한 학문이었으나 실증주의 사학에서는 학문적 엄밀성이라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을 다른 학문의 정보제공자 정도로 위축시키는 단점을 드러냈다. 이에 아날학파는 '정치보다는 사회, 개인보다는 집단, 연대보다는 구조'를 역사인식의 중요한 골격으로 삼았다. 아날학파는 그런 관점에서 민중의 일상적인 삶을 역사의 무대에 소생시켜 주는 공헌을 했다. 최근 국내에서 봇물을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역사학 관련 저술들 중 상당수는 이런 아날학파의 영향 아래 있다. 물론 아날학파의 저술들은 역사를 지나치게 파편화시켜 거시적 관점이나 역사철학의 관점을 도외시하는 우를 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나, 일반 대중에게 역사가 반드시 어려운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학문으로 친근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책은 정연식 선생의 조선시대 생활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녹아들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조선 시대의 기생, 선비, 부부 생활, 승려, 마마나 호환과 같은 조선 시대의 질병과 두려움, 노비들의 생활 등등이 매우 재미있고, 쉽게 서술되고 있다. 해마다 우리 교육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높은 교육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그런 교육열은 아이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미취학 아동들을 대상으로 영어 발음을 좋게 해준다는 이유로 아이들의 혀 밑을 절개해주는 수술이 시행되는 형태로 그릇되게 나타나곤 한다. 그런 반면에 일선 학교에서는 지리를 전공한 선생님이 역사를 가르치고, 한문 선생님이 국사를 가르치는 일들이 벌어진다. 영어와 수학 같은 입시 전략 과목의 수업 비중을 높이기 위해 국사와 세계사 같은 역사 과목이 사라진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사학과를 지망하는 학생들은 점차 줄어들고, 국립대학에서조차 관련 강좌들이 폐강되는 사태가 빚어진다. 대학원은 미달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웃한 중국에서 동북공정과 같은 고구려사 왜곡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머리띠를 두르고 규탄 대회를 연다. 그러나 고구려사를 제대로 전공한 학자들을 찾기란 또 얼마나 어려운가, 그것이 우리의 역사학계가 처한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책을 덮고 나서 입맛이 개운치 않은 까닭은 어쩌면 거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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