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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자식들/ 노르베르트 레버르트, 슈테판 레버르트, 이영희 옮김 / 사람과사람 / 2001년 3월
"나치의 자식들"은 몇 가지 점에서 주목해볼 책이다. 우선 과거사 청산 문제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공동 저자인 노르베르트 레버르트와 슈테판 레버르트가 부자지간으로 "나치의 자식들"이란 주제로 40년에 걸친 추적을 통했다는 것 - 아버지와 아들 세대가 보는 나치의 모습과 그들 자신의 이야기, 그리고 나치와 독일현대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처음 이 책의 시작은 아버지 노르베르트가 1959년 독일의 "벨트빌트 Weltbild" 에 실렸던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까닭에...'란 시리즈로부터 출발한다. 1945년 독일 패망으로부터 14년여가 흐른 지점에서 그는 나치 정권의 2인자였으나 덩케르크 이후 단독으로 영국으로 날아가 강화를 맺고자 했던 '루돌프 헤스', 허브 재배를 취미로하는 회계사였더라면 어울렸을 나치 친위대 대장 '하인리히 히믈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 영웅이었으나 헤스 이후 나치의 실질적 2인자가 된 '헤르만 괴링', 히틀러 유겐트를 만들어 아이들을 나치 신봉자로 길러낸 '발두어 폰 쉴라흐', 히틀러의 개인비서였으나 권력의 실세로 등극한 '마르틴 보르만' 등 모두 7명의 나치 전범과 그들의 자식들의 삶을 1차적으로 추적했다.
아버지 '노르베르트' 자신도 제2차 세계대전이 패망할 무렵 불과 15세의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으며 나치가 유럽을 점령해 나가던 시점에는 자신의 방에 커다란 지도를 붙여놓고 도시와 국가를 점령해 나갈 때마다 지도에 핀을 꽂아 표시하며 기뻐했었다. 그리고 아들 '슈테판'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 옛날 1959년에 아버지는 어떤 기분으로 원고를 썼을까를 생각해 봤다.
아마도 당시는 과거가 지독히도 터부시되던 때였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내일만을 바라볼 뿐, 어느 누구도 과거로 눈길을 돌리지 않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과거와는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유명한 역사학자 노르베르트 프라이가 과거 청산을 주제로 한 두툼한 사료집을 출판했는데, 나는 그 책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독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과거를 기피하는 경향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 또한 심각했다. 전범자들은 대부분 사회에 재편입되어 있었다.
나의 부친 역시 그 암흑의 시절과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다. 나치 전범들의 자녀들은 두 시대 사이에 낀 인물로 묘사하면서 냉정을 잃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과거에 대해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든지, 피비린내 나는 독일사의 질곡에 내던져진 무력한 존재임은 분명하지 않을까.
<본문 118쪽>
8.15를 어떤 이들은 해방이다. 광복이다라고 말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오늘날 이를 광복이나 해방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이 해방과 광복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 아니라 친일파들의 해방이었다고 말한다. 일제하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주인으로 섬겼던 주구들에게 그들의 주인이 사라진 그들만의 자유, 그들만의 행복, 그들만의 권력을 한껏 누릴 수 있는 해방이오, 광복이었다고 말이다. 일제 하의 서대문형무소에서 갓 출소한 독립운동가들은 해방의 기쁨을 미처 맛보기도 전에 과거 그들을 서대문형무소에 잡아가뒀던 일제하 고등계 형사, 경찰들에 의해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이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 가운데 하나는 철저했던 것(우리에 비해서는 당연히 철저했지만)으로 알려진 독일의 과거 청산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큰 철저하지 못했으며 역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동안 친일파의 대명사는 '이완용과 송병준'이었다. 이 책에 대입해보자면 괴링과 히믈러 정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해전 이들의 후손들이 과거의 땅을 되찾고자 했던 시도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 결말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과연 이들만 지탄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물론 '아니오'다. 친일파의 대명사와 나치 일급 전범의 후손들 사이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확실한 공통점은 그들이 너무나 유명한(?) 혹은 위대한(?) 부친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히믈러의 딸 구드룬 히믈러가 그렇게 유명한 아버지를 두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더 나아가 히믈러가 나치의 친위대 대장이 아니었고, 그저 작은 지역의 친위대 분견대장이나 분견대 하사관 정도였다면 전후 일급 전범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일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독일에서도 예전 나치 잔당들, 어떤 의미에서든 여전히 나치인 사람들도 사회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UN사무총장을 역임했던 발트하임을 떠올려 보라. 이완용과 송병준의 자식은 아버지가 너무 유명했던 관계로 그들의 재산을 되찾으려는 시도가 언론과 여론의 열렬한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잔챙이들은 여전히 친일파였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고, 아버지의 이름과 유산으로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 되어 잘 살아가고 있고,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어린 시절 열렬한 나치 지지자였던 아버지를 둔 아들이자 이 책의 저자 슈테판은 그렇게 아버지와 나치 전범, 자신과 그들 전범의 자식들 사이를 오간다.
내 부친도 하마터면 전범자가 될 뻔 했다. 부친은 열광적인 히틀러 소년단원이었다. 2차 대전 초기에 세계 지도를 펴놓고 히틀러가 함락시킨 국가마다 작은 깃발을 꽂았다. 나치 독일의 몰락을 엄청난 재앙으로 받아들였고 연합군의 진입은 해방이 아니라 패배로 느꼈다. 거리에 서서 진주해 오는 미군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을 경멸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있어 배반자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부친은 열 다섯 살에 불과했다. 훗날 아버지는 '당시 어렸다는 게 큰 행운이었다. 어렸기 때문에 나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본문 186쪽>
종종 역사의 순간들을 오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반문을 해보게 된다. 시민(부르주아)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치한다는 일을 상상도 할 수 없을 때, 나는 왕당파였을까? 아니면 시민군의 일원이었을까? 파리 꼬뮌이 성립하고 패망한 프랑스 군대가 비스마르크의 후원을 받으며 바리케이드를 넘어 들어올 때 나는 꼬뮌의 일원이 되어 총을 잡았을까? 아니면 파리 근교의 작은 주택 지하실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숨어 있었을까? 그날 광주에 어둠이 내리고, 밤 12시를 기해 광주 전역의 전화가 일제히 불통되고,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는 광주에 있었다면 나는 그때 도청으로 달려갔을까? 아니면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들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을까?
역사 속의 어느 한 순간을 회상해보는 것과 전자오락의 공통점은 그 선택의 결과가 실제 내 삶을 마감짓지는 않는다는데 있다. 지금 내가 그날 광주에 있었다면 난 틀림없이 도청으로 달려갔을 것이다라고 생각해보는 일과 미션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전자오락 속의 내 캐릭터가 죽는 일은 실제의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의 어느 한 순간을 이야기하며 역사 속의 어느 인물이 내렸던 판단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는 일은 때로 경박함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시민군이 이후 자코뱅과 지롱드로 갈려 서로가 서로를 길로틴의 제물로 바쳤음을 알고,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안다. 파리 코뮌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졌는지 알고, 그들이 벽에 일렬로 늘어선 채 학살당했는지 안다. 그날 광주 도청의 사람들이 10분만에 모두 사살당했음을 안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내가 과연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보나파르트의 독재가 시작될 것이란 사실을, 파리코뮌이 후세에 의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알 수 있었을까?
만약 이 책의 저자 슈테판의 아버지 "노르베르트"가 2살만 많았다면, 그는 국민척탄병으로 징집당해 베를린 사수작전에서 개 같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슈테판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보다 더 일찍 태어나 히틀러의 뮌헨폭동에 동참하고, 여러 공로를 세웠다면 그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을지 모르겠다. "어렸다는 것이 행운이었다"는 노르베르트의 고백은 그래서 마음에 묵직하게 전해진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이광수와 최남선"이었기에 일제는 더욱 많은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이름모를 지식인이 아니라,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적 순간에 침묵할 권리를 얻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역사적 순간에 무엇인가 말하도록, 어떤 입장인가 밝히도록 강요받는다. 그들이 불행한 것은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는 시기에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죄인가? 다만 역사의 갈림길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던 역사의 희생자들인가?
저자는 이런 의문에 대해 에필로그 "아직 끝나지 않은 그림자와의 싸움"이란 짤막한 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기억이란 복잡한 과정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토대로 자신만의 독특한 영화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과거의 사건일수록 그 대답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본문 245쪽>
그리스 비극의 대표격인 '오이디푸스'는 신탁에 의해 불행을 예언받았고, 이 불행을 피하기 위해 부모도, 자식도 노력했으나 결국 불행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테베는 테베를 위해 오이디푸스를 버렸고, 오이디푸스는 테베를 위해 자신이 왕이었던 도시를 떠난다. 지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였던 역사라는 우리의 아버지라는 짐을 짊어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이름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과거사 청산이란 이렇듯 바로 내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는 자세를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묻지 않고, 책임지지 않으며, 마침내 알려고도 하지 않는 "침묵의 공모"에 동참한다면 우리의 과거, 아버지란 이름으로 우리의 양 어깨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영영 걷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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