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Beserk) - 원작 / 미우라 켄타로
당연한 말이지만 "베르세르크(Berserk)"를 DVD로 보기 전에 나는 이 책을 만화로 읽었는데, 한 번은 "불멸의 용병"이란 제목으로 나온 해적판 만화였고, 다른 한 번은 최근까지 27권이 나온 정식 출판된 만화로 읽었다. 미우라 켄타로(三浦建太郞)란 만화가는 사실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작품 목록 자체도 별로 많지 않다. 일본의 만화 산업의 특징인 인기있는 작가들의 문어발식 연재를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다. 1990년대 말부터 일본 만화(망가 혹은 아니메)계는 위기 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비디오 게임에 밀려 만화 산업의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이런 위기 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 만화의 창조력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4백만 권 이상이 판매되는 일본의 인기 만화 잡지<소년매거진>에 작품을 연재하는 20명의 만화가들 가운데 약 8명은 한 해에 1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유유백서"의 저자인 도가시 요시히로는 1994년 한 해에만 7백만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일본 만화 전문가인 프레드릭 L. 쇼트는 "이것이 일본만화다"에서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첨꾼에 둘러싸이고, 기사가 열어주는 승용차에 오르고, 친절하게 그림을 대신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문하생들 위에 교주처럼 군림할 때, 이 젊은 백만장자 만화가들의 창조적인 예술혼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들의 성공에 취한 많은 만화 프로덕션은 대량 생산에 혈안이 된 공장처럼 보인다. 20세기 후반에 많은 일본 제조 업체들을 괴롭힌 '질보다 양'이라는 질병에 걸린 것이다. 세상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더 특별한', '더 재미있는', '더 우수한' 것을 요구하고 있으나, 업계는 규모와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버린 것이다. 인기 있는 만화가들은 모이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연재물을 자신들이 동시에 만들고 있는지, 그들의 단행본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는지, 왜 하루에 네다섯 시간밖에 잘 수 없는지(이것은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에 대해 다투어 자랑하는 것은 음미할 만하다. 그 결과가 줄거리를 지루하게 만들고, 시각적인 부조화를 가져와 만화의 질을 떨어뜨리는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미우라 켄타로는 위의 언급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가 발표한 몇몇 단편들조차 "베르세르크"와 무관해보이지 않고, "베르세르크"를 탄생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처럼 보인다. 미우라 켄타로는 지난 1989년 <앵애니멀>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십수년간 그의 인생 거의 대부분을 "베르세르크"라는 한 작품에 집중시켜 오고 있다. 들리는 말로는 뎃생부터 배경, 스크린톤 처리에 이르는 전과정을 혼자 해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동시에 여러곳에 연재하면서 수십 권에 이르는 작품들을 단기간에 내놓는 일본의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볼 때 그가 "베르세르크"를 진행하는 속도는 더디기만 한다.
"베르세르크(Berserk)"란 말 자체가 "광기어린"이란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된다고 하는데, 본래 "베르세르크"란 말은 중세 유럽을 휩쓴 스칸디나비아, 게르만 역사와 전설에 등장하는 광기어린 사나운 전사를 일컫는 말이다. 선박의 진수식에 산제물로 산 사람을 바쳐 배가 사람의 허리를 두 동강내게 한다든지, 배를 타고 신속하게 이동하면서 약탈과 방화, 살인, 강간을 일삼으면서 그것을 통해 쾌락을 얻는 잔혹한 전사들의 무리를 일컬어 "버서커(berserker)" 일명 "광전사"라 했는데, 이들은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토템을 숭배하여 전투시에 몰아의 경지에 빠져들어 광란의 전투행위를 일삼은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화의 첫 페이지부터 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잔인하기 그지 없다. 물론 TV방송물을 담은 DVD는 만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잔인한 편이지만 피가 튀고, 사람이 두 동강 난다는 점에선 그다지 차이가 없다.
사실, 만화와 달리 아니메 "베르세르크"는 결코 걸작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일본 망가, 아니메에서 하드고어 장르의 전통을 매우 오래되었다. "세기말 구세주 전설 북두의 권", "강식장갑 가이버", "크라잉 프리맨", "데빌맨", "요수도시", "마계도시 신주쿠", "인어의 숲", "수병위인풍첩" 등 수많은 걸작과 범작들을 만들어냈다. 이 가운데 아니메 작가로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능력은 걸출한 것이었다. DVD로 제작된 아니메 "베르세르크"의 감독은 "타카하시 나오히토(高橋ナオヒト)"로 지난 1997년부터 일본 니혼TV를 통해 방영된 작품이다. 매회 25분 내외로 일반판 말고, 특별판은 도두 7장의 디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아니메 "베르세르크"는 만화의 전작을 수용하고 있지는 않다. 베르세르크와 그리피스가 단장으로 있는 "매의 단"이란 용병단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광마의식이 치러지는 순간까지를 축약해논 내용이다. 만화로 치자면 광마의식이 끝난 뒤 현재 27권까지 나왔으니 대략 출판된 만화의 초반부 에피소드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이 작품을 SF로 분류했는데, 굳이 장르를 세분하자면 하드고어 판타지물로 보는 것이 올바르다. "베르세르크"는 작가의 다층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데, 특별히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광전사(狂戰士), 베르세르크"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다른 차원이 혼재되어 있는 베르세르크의 세계를 알아두는 편이 좋다. 베르세르크의 시대 분위기와 배경은 서양의 중세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기독교를 지칭하진 않지만 기독교가 지배하는 중세의 분위기와 신분질서에 기초한 봉건제 하에서 미들랜드를 중심으로 전장을 누비는 용병단의 복색은 확실히 서양의 중세 기사들을 연상할 수 있다. 이것이 베르세르크의 현실 세계이다. 거기에 마물(魔物)이 사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존재한다. 이 지점까지는 다른 만화들과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 오기노 마코토의 "공작왕" 시리즈도 일본의 "신토(神道)이즘"에 입각한 마물들이 현실 세계를 침탈해오고 이에 대항해 싸우는 퇴마사 공작의 이야기이다.
"베르세르크"의 초반부는 어차피 "매의 단" 단장인 "그리피스"와 "캐스커" 그리고 "가츠"의 운명적인 조우와 이들 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이들의 운명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과율이란 세상을 지배하는 운명의 실타래 속에서 서로 어떤 운명을 걷게 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정지 작업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어째서 서로 우정을 쌓아가던 그리피스와 가츠가 서로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 서로를 증오하게 되는지, 그리피스는 어째서 동료들을 마물의 희생 제물로 바쳐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려고 하는지, 캐스커는 그리피스와 가츠 사이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무엇 때문에 기억상실 증세에 걸리며 이후 스토리 전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들이다. 그렇기에 초반부 결말 부분에 극적인 광마의식이 치뤄지기 전까지 내용의 대부분은 그저 현실 세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머지 이야기의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광마의식 이후 "인간이 사는 현실 세계"와 "마물이 사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혼돈되면서 "교차하는 협간의 세계(狹間界)"로 배경이 돌변하게 된다.
단칼에 마물들을 베어죽이는 괴력과 놀라운 생명력의 소유자 가츠는 태생부터가 범상치 않다. 사실 "베르세르크"의 기본 서사 구조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와 닮아 있다.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우정과 충성을 저버리고 살인을 저지르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 전쟁 영웅 맥베스는 절친한 친구 밴쿠오와 함께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 마녀들을 만나 왕이 될 거라는 예언을 듣는다. 동시에 친구 밴쿠오는 '왕들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예언을 듣는다. 마녀의 예언 가운데 하나가 들어맞아 영주가 된 맥베스는 마녀의 나머지 예언을 믿어 아내와 함께 던컨 왕을 살해한다. 맥베스는 친구인 밴쿠오도 살해하고, 자신을 의심하는 충신 맥더프의 가족도 살해한다. 살해와 음모로 인해 마음의 불안을 느낀 맥베스는 새로운 예언을 듣기 위해 마녀들을 찾아간다. 이 자리에서 맥베스는 버남 숲이 던지네 언덕으로 움직이기 전까지 맥베스는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란 예언과 여자가 낳은 자는 결코 맥베스를 쓰러뜨릴 수 없을 거란 예언이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맥베스의 눈 앞에 맬컴의 군대가 가지를 꺽어 위장한 버남숲이 움직이고, 맥베스는 "달이 차기도 전에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맥더프의 손에 목이 잘리우고 만다. 맥더프의 모티브는 J.R.R.톨킨에 의해 "반지의 제왕"에서 다시 사용되는데, 나즈굴의 대장 "앙그마르의 마술사왕"도 "인간 남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말하자 로한 왕국의 공주 에오윈은 "나는 여자다"라며 위치킹의 목을 뎅강 잘라낸다. 이야기가 곁으로 잠시 샛는데 주인공 가츠는 죽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다. 그런 운명의 사나이였기에 가츠가 걸어가는 길이 결코 쉬울 수 없다는 건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죽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가츠는 마침 용병 감비노의 아내가 거두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감비노의 아내는 가츠가 3살 때 죽고, 감비노는 아내의 죽음이 불운한 운명을 타고난 가츠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를 학대하며 키운다. 용병으로 길러진 가츠는 감비노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르지만 감비노는 9살에 불과한 가츠를 전투에 내보낸다. 그 첫 전투에서 감비노는 포격으로 다리 하나를 잃고 가츠에 대한 증오는 더욱 커진다.
감비노는 이 모든 것이 가츠의 탓이라 생각하고, 가츠를 죽이려 하지만 도리어 가츠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감비노의 죽음 이후 용병단을 빠져나와 다른 용병단을 전전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가츠는 일격에 다른 기사를 쳐죽일 만큼 뛰어난 능력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전장에서 우연히 그리피스의 눈에 띄어 둘은 "매의 단"에서 서로 둘도 없는 우정을 쌓아간다. 미들랜드를 위해 전장에 임한 그리피스와 돌격대장 가츠는 전장에서 불사신 조드를 맞닥뜨린다. 간신히 불사신 조드를 물리친 가츠, 조드는 가츠에게 그리피스의 꿈이 깨어지는 순간 친구로서 가츠는 불행한 운명에 직면하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듣는다. 가츠는 그리피스의 꿈에 자신의 꿈을 포갤 수 없음을 알고, 자신만의 꿈과 그리피스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그리피스를 떠나려 한다. 가츠가 떠난 충격에 빠진 그리피스는 섣불리 미들랜드의 공주 샤를로트를 범하여 지하 감옥에 갇힌 채 회생불가능한 고문을 당한다. 절망에 빠진 그리피스에게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그는 베헤리트를 이용해 "매의 단" 동료들을 제물로 바치고 고드 핸드에서 사도들의 왕으로 전생(轉生)하게 된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비롯해 다차원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에서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운명을 피하기 위해 태어난 아들의 복사뼈에 쇠못을 박아 내다 버린 오이디푸스(Oidipous)가 훗날 신탁의 운명대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취하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가츠 역시 그리피스의 운명(인과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리피스를 떠났으나 그가 떠난 것이 결과적으로 그리피스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고 만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인 리미티드 방식이 대폭 사용되고 있는 탓에 아니메 "베르세르크"의 작품성은 만화의 그것만큼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이야기들은 빼놓지 않고 있으며 무엇보다 일본 성우들의 놀라운 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니메 "베르세르크"는 나름의 흡족함을 선사한다. 특히 원작의 그림체는 어떤 이의 표현을 빌자면 지저분해보이기까지 하는데, 미우라 켄타로의 독특한 그림체와 등장하는 마물들의 모습, 하드고어 장면 묘사들은 프란치스코 데 고야의 연작 판화 작품들 "전쟁의 참화", "로스 카프리초스", "디스파라테스" 등이 묘사하고 있는 살육, 광기, 허무, 폭력과 부조리 등이 고스란히 옮겨진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유난히 검은 배경과 복장, 묘사의 검은 톤들은 고야 만년의 일명 "검은 그림(Pinturas negras)"를 연상케 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미우라 켄타로의 다음 작품들을 목매고 기다리는 형편인 것은 그가 이 엄청난 스토리들을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 그 결말은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지 하는 기대를 잠시도 접어놓을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 시대의 걸작 만화 가운데 하나가 될 터인데 말이다.
* 또 한 가지 주목하고 있는 만화는 히라노 코우타의 "헬싱"인데... 이건 미우라 켄타로보다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통(6권 나오고 1년만에 7권 나왔음)에 기다리다 환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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