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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저편 - 체 게바라 시집
체 게바라 지음, 이산하 옮김, 엮음 / 문화산책 / 2002년 11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책은 2002년 11월에 나온 초판본이다. 2002년에 나온 책을 이제사 독후감 대상으로 올리는 까닭...
글쎄,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좋은 책일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체 게바라 평전의 출간과 더불어 홍수처럼 쏟아졌던 체 게바라 관련 상품들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 반항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결국, 쓸데없는 저항이었지만... 새삼스럽게 내가 체 게바라를 좋아한다는 애정고백을 할 필요는 없을 게다. 나는 체 게바라에 대한 개인 홈피를 만들 생각까지도 했었으니까. 지난 2002년 2월 무렵 내가 운영하는 홈피 게시판에 모업체에서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체게바라의 아시아권 라이센스를 저희 회사가 보유하고 있으며, 의류및,각종 캐릭터및 포스터는 차후. 사업진행중이며 체게바라를 사랑하는 매니아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체 게바라에 대한 아시아권 라이센스라니... 게바라에 대한 글을 홈피의 중요한 컨텐츠 중 하나로 만들어 두었던 나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체 게바라가 에이전시에 소속된 가수나 연예인이 아닌데, 도대체 누가 그에 대한 라이센스를 팔았다는 말인지 당황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짤막하게 그와 관련한 나의 서글픈 심정을 글로 올렸었다. 그런데 이 사이트의 운영자 되시는 분이 사업의욕이 앞섰는지 댓글을 썼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어차피 출판사도 체 게바라를 책으로 만들어 팔아서 먹고 사는 것 아니냐, 그런데 우리가 그에 대한 라이센스가 있다고 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때 오갔던 설전을 다시 옮기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므로 그 때 내가 올렸던 이야기의 요지만 말하자면 이랬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와 상징들이 상업적인 용도로 차용되어 사용되는 부분에 대해 불쾌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근본적으로 혁명가이고, 체 게바라가 살아온 길과 염원했던 이상(理想)이 분명 자본주의적 발전 양식을 거부하고 비자본주의적, 반자본주의적 발전양식, 삶의 방식을 일평생 목숨을 걸고 추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처럼 직접 투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삶이 지닌 혁명적 순수성에 매료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 한 인물의 상징성을 바탕으로 지적재산권을 운운하는 것이 체 게바라라는 한 인간에 대해 얼마나 모욕적인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문화를 상품으로 판매하겠다면 판매자가 먼저 문화인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불행히도 자본주의는 칼 마르크스 같은 천재적인 두뇌조차 예상할 수 없을 만큼 탄력적인 체제이다. 그런 까닭에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그 어떤 이론, 그것이 제 아무리 혁명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방식과 질서에 따르지 않고서는 대중에게 전달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뤼시엥 골드만은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에서 소설을 "타락한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하지 않았던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더이상 위험하지 않은 혁명가 "체 게바라"가 세상에 유통되는 방식도 불행하지만 이런 정의는 가능하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 책을 "시집"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완전히 옳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엮은이인 이산하 시인이 서문에서 고백 "이 시집을 엮으며 거듭 느끼는 것은 그가 비록 완전한 형태의 시집으로 묶여진 적은 없다 하더라도, 그의 저서 군데군데 섬세하게 빛나는 간결한 구절들은 그 자체가 이미 뛰어난 시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었다. 오래전부터 내 손으로 꼭 체 게바라의 글들을 시집 형태로 한 번 엮어보리라는 꿈이 이제야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체 게바라의 시와 그의 여러 글들에서 간추려 시처럼(?) 혹은 시로 엮어낸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책은 이산하 시인이 "한 권의 시집으로 엮기 위해 의역과 재구성"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이 시집이 주는 감동은 한밤에 얼음물 세례를 받은 것처럼 선연하다.
체 게바라의 시들은 어쩐지 김남주 시인의 번역 시선인 "은박지에 새긴 사랑"과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서 읽었던 시인들의 그것과 매우 닮아 있다. 한 예로 게바라의 '탐독'이란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 네루다, 로르카, 마야코프스키 - 은 놀랍게도 김남주 시인의 번역 시선에 수록된 시인들의 명단과 일치한다. 김남주 시인의 책에 대한 문학평론가 염무웅의 이야기에 따르면 "번역원고를 들키면 빼앗길지도 모르고 도대체 펜과 종이조차 제대로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하이네를, 브레히트를, 네루다를 번역하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해보라. 아마 이것은 세계 번역사에 남을 참혹하게 위대한, 최악의 고통 속에서만 솟아오를 수 있는 영광의 한 페이지"이다.
김남주 평전의 저자 강대석이 김남주를 "한국의 체 게바라"에 비견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1980년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목에 현상금이 걸려 저자거리마다 내걸린 현상수배범들의 사진을 보며 언젠가 역사책에서나 보았음직한 동학농민군의 효수된 사진과 이미지가 흡사하단 말을 했었다. 선연한 눈빛, 무언가 쏘아보는 듯한 표정에서 보이는 꿈꾸는 자들의 공통점이 그네들의 눈에 별이 되어 담겨 있다. 엘뤼아르는 "별이 없는 꿈은 잊혀진 꿈"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당국에서 밥 나와 먹지
집을 주어 살지
호위병이 번갈아가며
호위해주지
물 구경 산 구경
마음대로 하지
사내 자식으로 태어나
여기 한 번 와보는 것도
괜찮은 일 아닌가
<호치민 시, 김남주 옮김, 호송 중의 느낌, 전문>
가슴과 허벅지에
총알이 뚫고 갔다
'고양이의 목숨은
일곱 개' 라는
스페인 속담이 있다
나는 이제
두 개의 목숨을 썼지만
아직,
다섯 개나 남아 있다
<체 게바라 시, 이산하 옮김, 일곱 개의 목숨, 전문>
이제 우리는 한 혁명가의 심장이 담긴 시집 한 권을 얻었다. 희망! 한때 선연했으나 이제는 퇴락한 시대 아직도 그는 희망을 부르짖고 있지 않은가. "내가 패배할지라도/ 승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에베레스트산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하다 실패했지만/ 결국은 정복되고 말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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