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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보낸 편지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린 로너 엮음, 양희정 옮김 / 민음사
"제발 긴 편지를 보내다오"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 갇힌 아비에게 편지를 잘 쓰지 않고 어쩌다 한 번씩 짤막한 엽서만 보내오는 작은아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왜 아빠에게 편지를 더 쓰지 않니?" "제발 긴 편지를 보내다오"라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 글은 길다. 대체로 글이 길고, 문장도 길다. 그리고 같은 글이라면 아포리즘 성격의 짤막한 글들보다 긴글을 보다 좋아한다. 길고 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재미난 이야기가 멈춰버리는 것처럼 날 슬프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지구상에 생존하고 있는 동안 거듭 반복될 일들이 어느날 문득 다 돌아간 영화 필름처럼 멈춰버리는 일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세상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진정으로 읽을 만한 것들은 죄다 금서(禁書)이거나 혹은 금서였거나 하는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정말 좋은 사람들은 죄다 일찍 죽었거나 혹은 감옥에 갇힌다. 세상과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창조주의 권한이지만 인간은 타인의 생명을 법이란 이름을 빌어 앗아버린다. 질서는 신만의 것이 아니다. 어쩌면 신은 애초부터 이 세상에 질서 따위는 부여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망명과 유배, 그리고 감옥. 거주, 이동이 제한되거나, 특정 시공간에 오래도록 사로잡힌다는 의미에서 우리들은 제 아무리 뛰어난 방랑자라 하더라도 갇혀 있다. 지구란 별로의 유배, 자궁에서 탈출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 이 행성으로 유배된 자들이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처음 발견(?)한 영국인들은 오랜 애물단지들을 이 대륙으로 내보내기로 결정한다. 영국 국내의 수형자들을 광대한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로 실어 나른다. 그들에게 오스트레일리아는 약속의 땅이었을까? 아니면 광대한 유형지였을까. 새출발을 결심한 이들에겐 약속의 땅이었을 테고, 영국이란 작은 섬에 연인을 두고온 유형자는 이것은 보다 큰 감옥이었을 게다. 섬에서 대륙으로 보낸 역사상 가장 큰 감옥으로의 유배.
인생은 낯선 풍경들을 캡춰하는 건 아닐게다. 존재가 사라진 뒤에 남는 흔적이란 없다. 혹은 있다. 다시 흙으로, 풀로, 순환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감옥, 작은 섬 영국에서 거대한 대륙으로 보내진 유형일지도 모르겠다. 그곳을 거친 이들의 우울한 회고처럼 그곳은 자아와의 대면을 강요받는 거대한 거울이자 학교이다. 오랜 동안 외부와의 단절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와의 대면, 그리고 세계와의 대결을 거치며 사람들은 때로 심신을 단련하거나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무언가 얻기를 갈망하며 떠났던 여행 중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돌아오는가.
무엇을 얻기보다 무엇을 잃지 않아야 하는지, 그것을 깨우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어야 한다. 여행이란 결국 스스로가 이미 내린 결론을 확정짓기 위한 교묘한 독백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모든 걸 배울 수 없듯 우리는 인생이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다. 배우지 못하기에 인생은 대대손손 반복된다. 똑같은 유형으로, 똑같이 반복된다. 태어나서 죽는다. 제발 긴 편지를 쓰도록 하자. 남에게 읽게 만들어도 좋을 만한 긴 편지.... 삶이란 그렇게 쓰이는 편지가 아닐까.
여러 시대의, 여러 종류의 감옥에 갇힌 여러 망명자들이 글을 쓴다.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우가 원했던 것,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 동료였다. 패망한 나라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로부터 발터 벤야민에 이르는 그들의 무거운 발걸음이 나를 매혹시킨다. 실패한 자객들의 열전을 읽는 일이란 내게는 일본 적군파의 일원이었던 다미야 다까마로의 글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내렸던 치열한 결론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가 미처 처분할 수 없었던 "신화의 시간"을 살아 낸다.
안토니오 그람시. 한 동안 나는 그의 저작들을 읽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었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누군가의 명성에 기대려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진 몰라도 찾아보기 전에야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최고의 방주가 무너지고, 도장 간판이 떨어졌을 때 수많은 문파가 생겨난다. 이전까진 주목받지 못하던 작지만 작지 않은 스승들에 대한 과도한 열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마극사(馬克思)와 열영(列寧) 선생이 떠난 뒤 그람시,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열풍은 그렇게 불어온다. 그러나 이런 스승찾기 시도들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해서 이것이 새로운 검법을 배워 스승의 복수를 하게 해주는 건 아닐게다. 새로운 초식과 절대무공의 세계를 설령 안다해도 그걸 운용할 수 있는 고수의 출현 없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유배자들의 편지를 읽을 밖에....
이 책 "감옥에서 보낸 편지"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함께 그람시의 양대저작으로 손꼽힌다. "헤게모니론의 창시자, 불운의 곱사등이, 마르크스 이후 가장 천재적인 좌파 사상가"라 불리운 "안토니오 그람시"는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라는 독특한 지적·정치적 운동의 토대를 놓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경제결정론)적, 파국론적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으며, 동시에 극좌주의자들과도 투쟁했다. 그는 '자본론에 반하는 혁명'으로의 카운터 헤게모니 구성을 통한 진지전을 모색했던 혁명가였다. 러시아 10월혁명이 전격적이었다면 자본주의의 뿌리가 깊은 서구에서 이와 같은 전격전은 보다 많은 피를 부르고, 좌절할 수 있다는 로자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실패를 그는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지전은 어렵다. 체포된 강도단이 서로를 의심하여 공범의 죄를 누설하듯, 진지전은 자본주의의 쾌락에 익숙해진 발가락부터 썩어 들어간다.
1926년 11월8일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체포될 당시 그람시의 나이는 35살이었다. 한때 무솔리니도 좌파였다. 그는 이탈리아 좌파 잡지인 "아반띠"의 편집장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래 대부분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적인 좌파가 아닌, 학문(?)적인 좌파로 들어갔음에도 그람시는 공장평의회운동에 참여하며 노동하는 민중에게 신뢰를 보냈다. 그는 한쪽으로는 준동하는 파시즘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험적인 극좌파들과 투쟁했다. 러시아와는 다른 환경 아래 놓여 있는 서구에서의 혁명전략을 탐구했다. 무솔리니가 지배하는 파시스트 법정에서 "20년동안 저 사람의 두뇌가 활동하지 못하도록"하는 것이라는 판결을 받았던 그는 결국 자유를 박탈당하고 옥중의 병마와 고독 속에서 『옥중수고』,『감옥에서 보낸 편지』라는 위대한 유산을 남겨놓은 채 사망한다.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는 그렇게 쓰인 것이다. 육체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인간의 의지는 시험대에 오른다.
안토니오 그람시를 비롯한 수많은 유형자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범죄자가 아니라 싸우는 전사"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게다. 스스로를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역사의 영원한 패자로 기록됨으로써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승자이자 아직 성취해야할 그 무엇으로 남았던 이들을 욕되게 할 필요는 없다. 큰 감옥이든 작은 감옥이든...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고 여기는 인간을 움직이는 건 때로 희망이 아니라 의지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긴 편지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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