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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발명 - 전쟁과 국제 질서에 대한 성찰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전통과현대 / 2002년 10월
이 책은 뒤의 판권까지 모두 합쳐봐야 200쪽이 안된다(172쪽에 불과하다). 처음 내가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책 자체보다는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 때문이었다. 그는 '히스토리아문디01'시리즈의 첫번째 책인 "20세기의 역사"의 대표적 필자 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유별나게 영국 역사학자들의 글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들의 글은 같은 영미권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미국계 학자들의 글에 비해 덜 편협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데, 과거 제국을 경영했던 경험에서 빚어지는 거시적 안목과 더불어 약간의 반성과 현실적인 시선이 내 마음에 들어서였다.
사실 이 책은 지난 해 초판이 발간됨과 거의 동시에 구했고, 그 무렵에 읽었던 책이다. 이라크전쟁과 맞물려 반전 분위기가 오르면서 "평화의 발명"이란 이 책은 꽤 많은 이들에게 건네진 것으로 기억한다. 나역시 그 무렵에 읽었다. 처음 책을 받아들었을 때 받은 인상은 '뭐야, 책이 이렇게 얇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나는 이 책을 세 번에 걸쳐 다시 읽게 되었다. 그 다음에 들었던 첫 번째 의문은 어째서 저자 마이클 하워드는 평화의 '발견'이라 하지 않고, 평화의 '발명'이라 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 책의 제목은 19세기 영국 법학자 헨리 메인 경의 정의“전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지만, 평화는 근대의 발명품이다.”에서 따온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통찰(洞察, insight) 혹은 통찰력에 대해 말한다. 인도에서는 철학, 종교 체계를 일컬어 '다르샤나(darsana, 통찰)'이라고 하는데, 이때 산스크리트어의 다르샤나는 '보다(drs)'라는 어근에서 나왔다고 한다. 다르샤나는 단순한 철학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 사상의 체험 또는 실감이란 의미를 갖는다. 심리학에서는 통찰을 문제해결이나 학습의 기본적인 행동양식으로서 강조한다. 생활체로서의 개인은 자기를 둘러싼 내적, 외적 전체구조를 새로운 시점에서 파악함으로써 통찰을 얻는다. 통찰을 얻기 위해서는 주위의 상황을 새로운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재구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이렇듯 지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가 그것을 재구성해내고,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마이클 하워드는 그런 점에서 매우 통찰력있는 학자였다. '발견(發見, discovery)'는 이미 자연에 존재하는 사실이나 법칙으로 본래부터 '객관적'으로 실재하지만, 단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발명(發明)'은 새로운 방법·기술이나 물질·기구 등을 처음으로 고안하거나 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명과 발견은 종종 인간의 여러 활동, 발전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혼재되어 사용되지만, 발명은 물질적, 제도적 창조라는 점에서, 발견은 의식 또는 인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저자는 구태여 평화의 발견이라 말하지 않고, 발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고대 노예제 사회였던 그리스.로마 시대의, 특히 로마가 제국에 된 시대의 발명이란 대개 생산력 증대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생산을 수행하던 이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발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발명할 시간이 없었을 테고, 지배자들은그들이 직접 종사하지도 않는 일에 구태여 정력을 쏟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로마 시대의 발명 중 거의 대부분은 전쟁 방식에 대한 것, 혹은 제국 건설에 필요한 토목 기술과 관련한 발명에 치중되어 있다. 발명의 변천사는 동시에 그 시대와 사회적 요구, 목적, 이용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등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평화는 관념적 실재로는 이미 존재한다 할지 몰라도, 실재하지 않으므로 발명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기가 막힌 통찰이다. 이 책은 서문과 후기를 제외하고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서론에서는 평화가 전쟁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토마스 흡스를 인용하면서 평화를 전쟁이 임박하지도 실제로 행해지지도 않는 상태라고 정의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정의로서 포괄적이지 못하다고 말한다. 평화에는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와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가 있으며 흡스가 내린 평화에 대한 정의는 단지 '소극적 평화'에 머무른다고 비판한다. 이에 반해 '적극적 평화'는 일반적으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질서를 사회에 이룩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발명된 평화 즉, 전쟁이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는 국제질서는 어느 시기에나 미래를 꿈꾸는 이들의 공통된 바램이었으나 이것이 실현 가능하며 진실로 추구되어야 할 가치, 목표로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근래 200여년 사이의 변화라는 것이다. 그는 2부와 5부에 걸쳐 AD800년부터 2000년에 이르는 근대 유럽의 전쟁사를 재고찰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중세 말의 종교전쟁으로터 30년 전쟁,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비롯된 전쟁, 남북전쟁,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하워드가 직접 경험했던 제1차, 2차 세계대전에 걸친 거의 1,200여년에 걸친 전쟁과 그 중간의 휴지기(굳이 평화라 하지 않고 '휴지기'라 한 것은 이 시기가 '적극적 평화'를 추구한 시기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를 볼 수 있다.
마이클 하워드의 이 짤막한 글은 사실 지난 2000년 7월 런던대학의 역사연구소에서 개최한 전쟁과 평화에 대한 영미 학술 회의의 개시를 알리는 첫 공식 강연 내용을 다시 수정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나오고 얼마 뒤 뉴욕과 워싱턴은 알 카에다로 추정되는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으로 대략 3,000여 명의 민간인들이 숨지는 사건(9.11테러)이 일어났다. 저자는 다시 그 부분을 첨가해 후기에 담고 있다. 그는 거의 평생에 걸쳐 전쟁사를 연구한 학자였고, 그 자신이 제2차 세계대전에 종군한 베테랑이기도 하다. 마이클 하워드는 인류 역사 속에 벌어졌던 무수한 전쟁을 재구성하고, 전쟁이 분쟁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지 못한 채 단지 일정 기간 동안만 그것을 잠재우는 역할 이상을 할 수 없었음을 논증한다.
"서구의 정책은 아무리 끔찍하고 치욕스러운 퇴보가 있다고 하여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리고 300여년 전에 인류가 처음으로 그 가능성을 깨달은 이후 점차적으로 발전시켜 온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물론 저자의 이런 시각은 오랜 시간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며 안정과 평화를 얻어낸 한 유럽인의 시각에 국한된 것이란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도 인류는 여전히 생산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로마 제국 시대의 지배자들처럼 평화가 그다지 이득이 될 수 없는 지배 체제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가능성은 전세계 민중의 결집된 반전평화의 호소에서도 볼 수 있듯 뜨겁게 열려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겐 우리 전 세대의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평화를 발명해 내야만 하는 도덕적 책무를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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