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지음 / 대원씨아이 / 2002년 9월
1994년의 어느 겨울 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롯데월드로부터 올림픽공원까지 걸었다. 우리 셋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세 명 모두 이후 삶의 진로는 달라졌다. 그 무렵 TV에선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었고, 갓 발견된 "심은하"라는 앳된 얼굴의 탤런트는 장안의 뭇남성들을 설레게 했었다. "마지막 승부"가 방영되던 시절. 나와 그 두 친구는 뭔가 쓸쓸했다.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지만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나이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만, 그 확실하지 않은 것 가운데는 오랫동안 신념으로 삼아왔던 무엇인가가 사라진 뒤에 오는 그런 공황상태 비슷한 것도 있었다.
나에게 TV드라마 "마지막 승부"는 어떤 것들은 반드시 젊은 시절 한 순간에 통과해내지 않으면 평생 동안 느낄 수 없는 것들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한 10년쯤) 케이블TV에서 재방영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촌스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왜 그 나이땐 저 드라마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건지... 이 무렵 내 동생들은 한참 어떤 만화에 빠져있었는데 "슬램덩크"였다.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대표작이자 사실상 장편만화 데뷔작이기도 한 "슬램덩크"는 1990년 슈에이사(集英社)의 "소년점프"에 연재되면서 오늘날까지 1억부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만화이다. 물론 우리집에도 한 질이 있는데 완전판은 아니다(완전판은 만화방에서 보았을 뿐이다).
완전판과 구판의 가장 큰 차이는 일단 판형과 보다 좋아진 지질이다. 그 덕분에 이전의 작품집에선 볼 수 없었던 작가의 섬세한 선들이 잘 드러난다. 완전판이란 말이 정확하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애장판 수준은 된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는 여러가지 면에서 치바 데츠야의 "내일의 조"와 비교할 만하다. 우선 대히트를 쳤다는 점이 그렇고, 스포츠 만화라는 점, 1968년과 1990년이란 시간 차를 두고 시대상의 변천,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따라가보는 점 등에서 서로 비교할 만 하다.
1970년대초 일본항공(JAL)의 요도호 납치사건은 일본 적군파의 마지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말하는 이들에 따라 각기 다르긴 하지만 "우리는 <내일의 조>다"란 문구가 전공투 학생들의 입에서 나온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인 듯 싶다. 내가 읽은 일본 만화 관련 책자 두 곳에서 나오는데, 하나는 요도호 납치범들이 한 말로, 다른 하나는 전공투들이 와세다대학의 야스다강당 점거 농성 당시 벽에 남겨진 낙서 가운데 있었다는 말이라고도 한다.
"슬램덩크"야 너무 잘 알려진 만화책이므로 별다른 리뷰를 할 건 없다. 다만 문득 생각나서 적어보는 거다. 내가 이 만화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정대만"이고,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은 "윤대협"이다. 그래서 나중에 사내 아이를 낳는다면 이름을 "대협"이라고 지을까 생각도 해보았는데, 마침 내 성(性)이 "전"가라 그리되면 자식 이름이 "전대협"이 될 듯 하여 고만 머리속에서 지웠다. 윤대협과 정대만을 비교할 일은 아니겠지만, 윤대협이 순수한 의미에서의 천재라면 정대만은 겉보기엔 천재적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노력형에 가까운 수재형이라고 해야할 거다.
"슬램덩크"를 보면 일본만화 특유의 과장된 어법으로 등장하는 천재들도 있지만, 그 천재들조차 인간적이란데 매력이 있다. 만화의 주인공격인 자칭 '바스켓맨, 농구 천재' 강백호. 물론 그에게 놀라운 재능(무엇이든 빠르게 배우고 익히는 농구센스)이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 그 반면에 재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과정들과 어설픈 실수들이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농구붐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인(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스포츠였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에 레이업슛을 배우는데 워낙 운동신경도 없고, 핸드볼 공도 잡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손도 한 몫 거들어 슛 성공률은 제로였다. 백호가 농구를 하게 된 계기는 물론 채치수의 여동생에 혹한 때문이지만 그를 사로잡은 건 호쾌한 슬램덩크였다.
농구에 대단한 센스를 보이는 백호조차 멋진 슬램덩크를 성공시키키 귀해선 입문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었다. 만화에서는 일명 '풋내기 슛'이라고 하는 레이업 슛인데, 농구천재를 자청하는 강백호는 종종 엄청난 점프 능력을 가졌지만 정작 레이업 슛은 넣지 못한다. 슬램덩크를 꽂기 위해선 먼저 기초인 레이업슛부터 연습해야 한다는 작은 교훈을 주는 순간이다. 백호는 풋내기슛을 하루에 천 개씩(맞나?) 연습한다. 그러고보니 슛도사로 불렸던 전성기의 이충희 선수조차 시즌 중에도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백개 씩의 슛을 던졌다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백호는 슛을 쏘아올리며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왼손은 거들 뿐"
그는 이 한 가지 깨우침을 얻기 위해 무수히 많은 실패의 슛을 날린다. 사람들은 깨우침이란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한다. 어쩌면 안다는 말도 그렇다. 무엇을 안다는 건 저와 같다. 레이업슛을 잘 넣기 위해, 평범한 점프 슛을 잘 넣기 위해 "왼손은 거들 뿐"이란 건 머리로는 알지만 몸이 알지 못한다. 머리로만 알고 몸으로 알지 못하기에 그것은 완전한 배움, 완전한 깨달음이 되지 못한다. 마음의 평화를 가지라고 충고하지만 그렇게 충고하는 이조차 마음의 평화는 삽시간에 깨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은 안다는 건 그래서 허망하다. 아는 데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종종 글을 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아는 걸 공연히 부풀리고 싶다거나 하는 현학취는 물론, 조금이라도 멋지게 문장을 꾸며보고 싶다는 욕심이야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잠재된 욕망이다. 마치 탄알을 잰 권총의 팽팽한 방아쇠처럼 언제라도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 나는 학교에서 유도를 배웠고, 도장에 다니는 친구에게 권투를 배운 적이 있다. 유도엔 상대방을 메어꽂는 화려하고 호쾌한 기술들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메어꽂는 기술을 배우기 전에 먼저 자신이 메어꽂히는 걸 배우도록 한다. 낙법이란 것이다. 유도를 배우기 시작할 때 어느 도장에서든 가장 먼저 가르치는 건 낙법이다.
낙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는 남을 메어꽂을 수도, 자신이 메어꽂힐 때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다. 권투를 배울 땐 1라운드 3분간 쉬지 않고 푸트웍을 하면서 주먹을 계속 내밀 수 있는 기초체력부터 다지게 한다. 멋진 스트레이트, 속사포 같은 잽, 유도탄처럼 휘어들어가는 훅, 상대의 턱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어퍼컷을 배우는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아마추어는 라운드당 3분, 3라운드 경기를 뛴다. 링 위에 한 번이라도 서 본 사람은 안다. 마치 스키를 처음 배우는 이가 밑에서 바라본 입문자 코스용 완만한 슬로프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내려다보는 순간 절벽처럼 보이듯, 사각의 링 역시 내가 주먹을 뻗을 땐 태평양 같고, 상대방의 주먹이 와서 꽂힐 땐 막다른 벽이다. 그건 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거다.
시인 김정환은 "얼굴을 씻고 가슴을 씻고/ 가슴에 묻은 사랑의 소금끼를 씻고/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빼앗겼던 것을 씻듯이/ 내 가슴에 묻었던 그대의 얇은 가슴마저 씻으면서/ 근육에 배인 아픔만큼은/ 씻어내릴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라고 노래한다. 가장 확실한 깨달음은 몸으로 아는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씻어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글을 쓴다." 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한 이가 누구인지는 생각나지 않으나 저 말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글을 쓰는 이가 아무런 희망도 절망도 갖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희망이나 절망의 무게가 아니다. 그 무게를 짊어지고서라도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간다는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평생을 고민해야 떨쳐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사념들을 고민하느라 멈춰있는 동안에도 계속 나아간다. 물론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았으니 무어라 할 수는 없으나 살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먼저 살아간 이들의 궤적이 있기 때문이다.
"슬램덩크"에선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마치 나관중의 "삼국지"엔 등장하는 주요인물들 저마다에게 각각 그들만의 멋진 일합이 존재하는 것처럼, 예를 들어 유비의 오호대장군인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의 예를 들자면 관우는 "오관 돌파", 조운을 위해선 "장판파 전투"를 준비해둔다. 강백호에게도, 서태웅에게도, 송태섭에게도, 채치수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온다. 역시 방황 끝에 농구를 포기했다가 다시 농구로 되돌아온 사내 불꽃 남자 정대만에게도 그런 순간은 있다. 그는 중요한 게임에서 오랫동안 농구를 등한히 한 탓에 체력이 바닥나 백업도, 수비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때 그에게 패스된 농구공을 잡고 그는 스스로에게 되뇌인다.
“난 여기 서서 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정대만은 그 자리에서 슛을 날린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서서히 하강하고 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정확하게 꽂힌다. 그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그 유일한 일을 했다. 정대만은 순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정대만은 '불꽃 사나이'라는 그의 별칭에 어울릴 만큼 농구에 대한 동경과 증오를 오갔다. 그의 동경이 순수한 만큼 증오도 컸다. 그는 순수했으므로 아름답다. 중학시절 그의 팀이 결승전에서 뒤지고 있을 때 정대만은 공을 잡으려다가 넘어졌다. 그때 그를 주목해서 지켜봐주던 안 선생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그는 동경과 증오 사이를 방황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슬램덩크>의 여러 주인공들 중 유독 정대만을 좋아하는 이유다. "Dum vita est, spes est.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내가 편지 말미에 서명 대신에 쓰는 글이다. 종종 청춘의 어느 시기에 나는 건너야 할 강들을 자신있게 건너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인해 많은 것을 떠나보낸 경험도 있다. 물론 "내일의 조"와 "슬램덩크"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비장하고, 비장한 것이 결코 촌스럽다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던 시절의 "내일의 조"들은 이제 "슬램덩크" 세대의 코믹하면서 가벼운 자세에 대해 어째서 너는 나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건 철지난 청춘 드라마의 재방송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지나온 청춘의 고민을 현재의 청춘들이 똑같이 붙잡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모양만 다를 뿐 모두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슬램덩크가 걸작인 이유. 그건 삶의 자세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