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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찾기에서 펴낸 가리야 데쓰의 책 『일본인과 천황』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조차 천황제가 배어있다. 일본인의 피부 깊숙이 천황제가 스며들어 있다”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천황제에 대한 비판과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계몽적인 만화책이다. 책에 두르고 있는 띠지엔 “만화 『맛의 달인』의 저자, 가리야 데쓰는 「천황제」라는 거대한 악마를 해부한다”로 광고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누렸고, 요리만화의 대명사 중 하나였던 만화의 작가인지라 그림체도 낯익은 “하나사키 아키라”의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작화는 “슈가 사토”란 이가 맡아서 『맛의 달인』을 생각하며 책을 펼치는 이들이라면 다소 생경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한국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다룬 일종의 교육만화인 『일본인과 천황』의 한국판을 번역 출간하자는 제의가 약간은 생경하고, 의외였던 모양이다. 가리야 데쓰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일본인과 천황』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았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한국인이 일본의 천황이라거나 일본의 역사에 대해 흥미 있어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도리어 한국인 독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본인들 가운데 '천황제와 천황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토록 신랄하게 비판적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고 한다면 그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진다. 『일본인과 천황』이 계몽적인 성격을 띠고 있긴 하지만 자신의 주장 자체를 만화로 설명하기보다는 천황과 천황제 문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 구조를 통해 이해를 돕고, 각 장 마다 심도 있는 해설을 곁들이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무래도 처음 기획부터 천황과 천황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는 주제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만화적 재미란 측면에선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내용은 전일본 대학축구 대회 결승전에 나선 도토대학 축구부가 스미카와 진 선수의 결승골에 힘입어 대회에 우승한 뒤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도토대학이 우승한 뒤 시상식에서 일본 국기인 ‘히노마루’가 계양되고, 그에 맞춰 ‘기미가요’를 제창하는데 도토대학 주장인 스미카와는 국가를 부르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것이 TV에 방영되면서 일본의 극우파는 물론 축구연맹에서조차 그를 ‘애국심도 없는 비국민’으로 몰아 축구계에서 제명하려고 든다. 도토대학 당국도 스미카와가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는다면 학교에서 제적시킬 수밖에 없다며 협박한다. 이때 도토대학의 이사장이 나서 스미카와를 옹호하고 나선다. 그러나 선후배관계로 똘똘 뭉친 대학축구부의 OB멤버들까지 나서 스미카와와 그를 지지하는 후배들을 ‘이지메’한다. 청년들은 선배들까지 나서 자신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지만 끝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세상을 진정으로 속이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신화라는 말이 있다. 거짓은 누구라도 그것이 거짓인 줄 알지만 신화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포장되어 있기에 아무도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신화’이기도 하다. 세상 밖으로 처음 피 묻은 머리를 내밀 때부터 우리는 속속들이 문화에 의해 포장된다. 문 밖에 걸리는 금줄이 그렇고, 임신이라는 자연스러운 생육활동을 현대식 병원에서 질병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것도 하나의 문화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혹은 군대에서 '사회화과정'을 거친다. ‘어른들 말씀하실 때 말대답하지 마라’ 부터 초등학교 때 조회 시간에 나란히 줄을 맞춰 서는 ‘앞으로 나란히’ 에 이르기 까지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다양한 문화를 체득하고, 주입받는다. 때때로 반사회화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약삭빠른 술수도 얻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거나 ‘군대와 사회는 알아서 기는 게 요령’ 이란 처방전적 지식들은 비록 합리적인 사회화 과정은 아닐지라도 세상살이에서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들이다. 그런 교훈들 속에 숨어있는 철학은 무엇일까?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되 자신의 실속을 챙기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권위란 종종 물리적 나이와 동일시된다. 아무리 합리적인 논쟁이 전개되던 와중이라도 “너 인마, 몇 살이야?”, “넌 애비, 에미도 없냐?”는 한 마디면 논쟁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진행될 수 없다.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상대방은 도덕적 파탄자, 파렴치한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과 천황』이 묘사하는 상명하복의 세계, 절대복종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가리야 데쓰의 말처럼 한국과는 의외의 인연이 아니라 매우 깊숙한 인연을 맺는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와 문화를 이처럼 '국외인',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가리야 데쓰는 1941년 중국 베이징에서 출생했고, 전후 일본사회로 귀환한 이른바 '인양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수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의 점령지 혹은 식민지였던 곳에 갇혀 고립되거나 굶주림, 협박 등의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중국에서 고립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중국인과 결혼관계를 맺거나 군인, 군속으로 억류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 귀환이 늦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고국인 일본으로 귀환했을 때, 이들은 인양자 혹은 귀환세대(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국외 각지의 일본인들이 패전국 국민으로서 본국 귀환)라 하여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로 치부되었다. 일본의 문제적 지식인 중 한 명인 “다치바나 다카시” 역시 다섯 살 때 중국에서 일본으로 귀환한 사람이다. 현재까지도 잔류일본인들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전후 처리 문제는 한,일간의 문제만이 아닌 일본 사회 내부의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인양자'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마치 양대 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끌려갔던 조선 여인네들이 귀국한 뒤 '환향녀(還鄕女)'로 부르고, 백안시했던 것처럼 패망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에 대해 일본 사회는 별종으로 취급하곤 했다.
가리야 데쓰에게 귀환한 일본은 어떤 나라였을까? 같은 일본인이지만 다른 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손쉽게 천황에도, 천황제에도 동화될 수 없는 일본인을 상상하는 일이 태어날 때부터 '한국인', '나의 조국, 대한민국' 이외에는 한 번도 상상해볼 여지가 없었던 우리들에겐 매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 같은 인양자들의 입장을 상상해보기 위해선 그와 비슷한 사례를 우리 사회 주변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을 텐데, 의외로 그런 입장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지난 100여 년 동안 한반도를 벗어나 외국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 수가 현재 대략 700만에 달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는 전체 인구의 10%에 해당한다. 유대인 가운데 75%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다는데, 그들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이천년에 걸친 것이란 점을 생각해볼 때, 한민족의 디아스포라는 매우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해방 이전,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 이전에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남한도, 북한도 선택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일지 우리는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가리야 데쓰가 일본의 천황제를 비판하지만, 사실 천황제라는 것은 일본식 극우민족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우리의 극우민족주의는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단일민족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피의 순결, 피의 순수성은 배달겨레만의 민족적 자존을 지켜주는 덕목이었기에 혼혈은 죄악이었다. 그래서 국가안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안보주의자들조차 혼혈인들은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 이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히도 이들에게 주민등록번호가 발부되더라도 이들은 결코 대한민국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폭력에 의해 건설되었고, 군대를 통한 사회화라는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국민을 생산해왔기 때문이다. 한 번 폭력에 노출된 사람은 자신의 신체와 영혼의 주인이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피부 깊숙이 체득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은 ‘주권재민’, 즉 시민 각자의 권리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 권력이 자신의 내부로부터 생산되지 않으며 외부로터 온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터득한 사람들은 결코 책임과 권리를 지닌 시민이 되지 못한다. 폭력으로 형성된 위계는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재생산되면서 사회는 끊임없이 위계화 된다.
이 같은 공포의 위계에 대항하는 것은 물론 공포와 직접 대면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엔 공포와 직접 대면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아니 공포의 주체가 누구인지 더욱 더 불명확해지고 있다. 지금까지 개인에게 가장 큰 공포는 모든 폭력을 장악하고 있는 국가로부터 왔다. 그러나 IMF외환위기 이후 국민들은 그동안 가장 강력한 폭력으로 인식해왔던 국가가 사실은 한낱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라는 국가의 새로운 정체를 목격한다. 과거 봉건제 아래에서 농노들은 누가 자신을 억압하는지, 누가 착취하는지, 누구에게 저항해야 하는지 알았다. 그들은 바로 성(城)에 살고 있는 영주와 귀족들과 그들과 영합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애써 이들을 타도한 뒤 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 이번엔 도시에 거주하는 자들, 이른바 부르주아지(bourgeoisie)를 만난다. 자본주의는 지배와 억압구조를 은폐함으로써 공포와 불안, 권력의 생산구조를 장악한다. 마침내 자본의 도구로서 국가기구들을 발견했을 때, 이번엔 또 다른 공포가 대중을 덮친다. 권력을 장악한 중심, 국가로부터 보이지 않는 ‘바깥’, ‘외부’로부터 보다 크고, 더욱 잔인해진 공포가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 일본의 천황제를 개선하는 것과 달리 이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본인과 천황』에서 비판하듯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폐해는 지난 역사를 통해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천황제가 미시정치에서 거시정치에 이르는 전방위 영역에서 속속들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것이 다른 사회에서와 달리 특히 일본 사회에서 또다시 극우민족주의의 형태로 발현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의 우경화 현상을 모두 ‘천황제와 천황 이데올로기’에서 찾는 것이 가능할까란 의문이 남는다. 이 말은 달리 말해 이것만으로 일본사회의 우경화 현상을 해석할 수 있을까란 것이다. 문제는 좀더 복잡하고, 원인은 더욱 복잡해 보인다. 우리는 최근에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자들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호명하고, 이 같은 호명이 먹혀들고 있는 현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잃어버린 10년은 우리만의 경험이 아니다. 일본 역시 부동산 버블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일본사회를 지배했던 완전고용과 평생고용의 신화는 깨졌고, 최근 우리 사회에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88만원 세대”란 호칭법 역시 꼭 우리가 원조라고 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국민소득 2만 달러 신화에 취해있을 무렵, 일본 사회 역시 ‘일억총중류층(一億總中流層)’ 신화에 젖어있었다. 고도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국가가 아닌 기업이 사회복지를 책임지는, 기업을 통한 소득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시스템을 통해 일본의 전국민이 중산층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버블경제의 해체 이후 누구보다 가파른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넘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 누구도 일본 사회의 미래 ‘일억총중류층’으로 가게 될 것이라 믿지 않는다. 평생고용을 통해 사회복지시스템의 중요한 근간을 구축했던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더 이상 복지 문제를 책임지지 않게 되자 유럽보다는 미국식에 가까웠던 일본의 이른바 ‘일하는’ 사회복지시스템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일본에서 새롭게 나타난 용어들이 우리의 양극화, 사회불평등에 해당하는 ‘격차사회’ 란 것이고, 청년실업의 여파로 비정규직 노동으로만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이들을 가리켜 ‘후리타(freeter)’라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 현상에 자리하고 있는 원인으로 천황제를 지목하는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문제의 본말을 오도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청년 계층의 보수화와 사회전반의 우경화, 복고주의의 원인이 ‘박정희 신드롬’에 있다고 진단하는 것은 오류란 말이다. 박정희 신드롬은 그 같은 현상의 일부분이지, 결코 그 원인이 아니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진정한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검증해봐야 할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야만’, 신자유주의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하기 때문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보강해보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가리야 데쓰의 책 『일본인과 천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사회를 반면교사해볼 수 있는 중요한 맥락들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앞서 지적한 것 이외에 몇 가지 더 이 책의 단점 혹은 허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선 주제의식의 강렬함이 만화적 완성도에 손상을 주는 부분이다. 한국 사회의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대학의 재단이사장으로 있는 이라면 그 사회의 지배질서에 비교적 잘 적응한 인물일 터인데, 그 같은 인물이 마치 반체제인사인 양 묘사되고 있는 대목에서 스토리의 개연성이 떨어진다. 또 하나는 천황제에 반대하는 스미카와와 그의 동료들은 축구부 선배들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만큼 강렬한 자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진 이들이지만, 어째서 작가는 이들 스스로가 자발적인 깨달음이나 성찰에 이르기 전에 언제나 이사장의 가르침과 훈육을 통해서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깨닫도록 설정해놓았을까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일본사회에도 믿을 만한 기성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까? 아니면 그 역시 일본이라는 집단사회의 룰에 자기도 모르게 감염되어있는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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