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인가 생존인가
노암 촘스키 지음, 황의방 외 옮김 / 까치글방 / 2004년 11월
"증오심을 즐기는 우리에게 평화 시대가 찾아온다면 우리를 기꺼이 인정해줄 적수들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혼란한 시대에는 가질 수 없는, 더없이 즐거운 걱정거리이다." - 에밀 시오랑
이 책과 김동춘 선생의 책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을 묶어 서평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 같다. 일단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번역투 문장에 익숙한 나로서도 책을 읽는 내내 짜증이 날 만큼 문장이 툭툭 끊기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앞서 다른 분(딸기)의 서평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미국(미국사와 세계사)에 대한 사전지식이 부족한 이라면 해독의 어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다. 결론삼아 미리 말하자면 그렇다고 이 책이 읽어도 그만이고, 안 읽어도 그만인 책은 아니다. 읽어두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현재 이 책의 평점으로 주어져 있는 별3.5개는 가장 적절한 수치인 듯 싶다.
우선, 이 책을 논하고 있는 신문기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책은 노암 촘스키의 가장 최신작이긴 하지만 2004년판은 아니며, 실제로는 2003년판 책 뒤에 후기를 보충한 형태로 출간된 책이다. 그의 명성은 이미 국내엔 하워드 진과 더불어 상당한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을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만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 너댓권은 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전의 다른 책들에서 나역시 촘스키의 명성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 책을 읽는 내내 짜증이 났던 이유는 앞서 말한 번역상의 문제나, 미국에 관한 여러 종의 책들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 탓만은 아니다. 실제로 노암 촘스키의 책을 읽는 이들이라면 대개 그 정도 기초 교양은 체득해둔 이들일테니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이 방면의 저서로 특히 권하고 싶은 것은 이삼성 교수의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문명과 야만"이다).
『패권인가 생존인가』는 9.11과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며 현재의 미국 사회에 대해 노암 촘스키가 내린 진단이다. 그가 2003년 그리고 부시2세의 재선을 지켜 본 뒤인 2004년 사이의 간극은 "후기" 이외엔 확인할 수 없는데, 그 후기가 또 지나치게 짧다. 부시가 아닌 캐리가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미국이 현재 제국이란 점은 차이가 없다. 저자는 1장 '우선 순위와 전망'을 통해 실질적으로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명확히 하고 있는데, 요약해보면 현재 미국은 제1의 패권국이자 세계 제국으로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이는 미국 국민의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도 반하는 것으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선 이에 대응할 만한 제2의 초강대국, 슈퍼 파워를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2의 초강대국은 미국 혹은 이전의 다른 제국들처럼 국민국가(nation-state)의 형태가 아닌 네트워크 형태로 연대하는 세계 여론(world Public opinion)이다.
이후 2장 '제국주의적 대전략'부터 5장 '이라크 커넥션'까지는 냉전 이후 미국이 슈퍼 파워로 성장해가면서 일찌감치 제국주의 전략을 채택해왔음을 역사적 실제 사실들을 근거로 들어 비판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제2장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2002년 가을, 가장 중대한 세계적 어젠다는 역사상 최강의 국가가 군사력 사용 및 위협을 통해서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한 것이었다. 국가안보전략에 대한 공식발표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군사력은 잠재적인 적들이 미국의 국력을 능가하거나 대등해지겠다는 희망하에서 군사력 증강을 추구하는 것을 단념하도록 할 만큼 충분히 강해질 것이다.”
저명한 국제문제 전문가인 존 아이컨버리는 이 같은 선언을 “미국이 대등한 경쟁자가 존재하지 않는 일극(一極)세계(a unipolar world)를 유지하겠다는 근본적인 공약에서 시작되는 대전략”이라고 설명한다. <본문 19쪽>
사실, 9.11 이전까지 미국에 대한 분석틀은 기본적으로 미국을 제국으로 상정하기 보다는 다른 국민국가들 가운데 우월한 위치를 점한 국민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것이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에 이르러서는 더이상 미국을 국민국가의 틀로 분석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노암 촘스키는 그렇다면 미국이 언제부터 제국의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는가를 분석하고 이를 비판한다. 즉, 미국이 2002년의 아젠다를 통해 본격적인 제국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처럼 보일지라도(실제로 미국의 지식인, 정치인들은 미국이 제국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여전히 부당한 지적이라는 식의 엄살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국주의적 대전략 아래 제국이 되어 왔다는 것이 노암 촘스키의 지적이다(이런 비판이 노암 촘스키에 의해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이냐시오 라모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미국을 제국으로 규정해왔으며, 국내적으로는 권용립 교수가 9.11 이전부터 미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규정했다고 생각한다).
6장 '지배의 딜레머'와 7장 '증오의 큰 솥', 8장 '테러리즘과 정의 : 몇 개의 유용한 이치들'은 제국으로서의 미국이 직면하게 될 위협, 반대로 그 댓가로 인류가 치뤄야 할 위험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중간중간에 저절로 미국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실제로 미국의 정치적 전통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로마공화정으로부터 비롯되는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이라 할 때, 우파 저술가인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미국의 현재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로마 제국의 모든 면모가 현재의 미국에 고스란히 대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로마 제국이 직면했던 딜레마는 미 제국의 딜레마에 고스란히 대입되는 것이다.
역사상 모든 제국은 팽창했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모든 제국의 최대 고민은 제국의 영역을 어느 정도로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는 톨스토이의 우화에 등장하는 어리석은 젊은이의 이야기와 같다. 하루 낮사이에 걸어서 도달했다가 되돌아 올 수 있는 만큼의 토지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은 젊은이는 자신의 한계보다 더 많은 토지를 욕심내 최대한 멀리까지 나갔다가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숨가쁘게 돌아오다 숨이 턱에 치받쳐 결국 숨진다. 제국의 팽창은 제국의 역량이 감당할 만큼이란 적절한 규모를 요구하지만, 한 번 팽창한 제국은 적절한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과도한 개입으로 인해 국력 쇠퇴를 경험하게 된다. 이는 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며 대영제국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제국 해체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한다.
미국 역시 이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이 이전의 제국들과는 전혀 다른(혹은 중요한 차이를 지닌) 방식의 제국이란데 있다. 촘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도 미국은 역사상 최대 강대국이었으나,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미국은 어떻게 해서 이런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지금 세계의 조직 체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정도의 힘의 불균형은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다. 팍스 브리태니카는 느슨하게 운영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필립 2세의 스페인은 강력한 적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힘의 다극 구조의 일부였다. 샤를마뉴 대제의 서로마 제국도 서유럽의 일부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로마 제국 또한 페르시아 제국과 그보다 더 강대했던 중국의 한 제국과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의 미국 제국과 비교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
"제국의 흥망"을 저술한 폴 케네디의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미국 제국은 일극 구조이며 느슨한 운영이 아닌 치밀하게 계산된 작동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 둘째 미국 제국은 영토적으로, 군사적으로 어느 위협 세력과도 국경을 접하거나 그런 개념을 초월한 제국이란 점이다. 실제로 미국은 전세계 수많은 곳(대략 700여 곳이라고 들었는데 정확치는 않음)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있지만, 직접 지배하고 있는 지역은 없다(물론, 과거 형태의 식민지라 할 만한 곳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미국은 지배 엘리트를 이식하거나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들 나라들을 제국의 하부 구조로 편입하고 있다. 제국으로서 미국의 세계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실질적인 기둥은 달러와 미사일, 할리우드와 인터넷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국 대선은 이전의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외부(타자들)의 시선이 잘못 되었음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부시2세 정권의 기반을 단지 군수산업과 석유자본에 의한 것이고, 그에 비해 민주당 후보의 기반을 IT산업과 금융자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 부시2세의 낙선이 하드한 자본과 소프트한 자본의 대결에 의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9.11 이후 본격적인 제국의 길을 선택한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은 갈등이라 부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시각을 뒷받침하는 것은 베트남전을 전후한 시기부터 등장한 미국의 신좌파 역사학자들의 관점(계급과 시장의 갈등)에 의한 것인데, 이것만으로는 미국의 정치문명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반미론자들은 때로 이들의 시각만을 수입하여 이해함으로써 도리어 미국의 세계 전략에 이용당하는 측면이 있다. 촘스키의 책이 지닌 약점 역시 거기에 있다. 미국의 이중적 언술과 선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촘스키는 단순히 사례만으로 그것이 지닌 모순들을 설파하는데 그치고 있다(물론 촘스키가 옳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세계의 누가 미국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사무엘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을 통해 마치 미국이 서유럽 문명의 일원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 미국은 서유럽 문명과는 확연히 다른 정치적 전통 속에서 건국되고, 성장한 국가이다. 서유럽 문명이 건설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국민국가는 혈연과 동일한 역사적 전통 속에서 구축된 것인데 반해서 미국은 먼저 국가와 이념을 설정한 뒤 이민을 받아들여 국민을 건설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미국의 건국 신화는 다른 타유럽 문명권이나 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들이 지닌 건국 신화보다 강렬하고 현재지속형이다. 유럽 국가들이 이념과 국가관이 사회 변동에 의해 함께 성장하거나 변화를 경험하는데 비해, 미국에서 이런 변화는 상대적으로 거의 없는 편이다. 그와 반대로 미국의 국가 정체성은 늘 현재의 문제이며, 미국이 지닌 태생적 보수주의의 원천이다.
신격화된 미국의 건국신화는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의 신화화로 이어진다. 미국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 인도에 기원을 둔 영어, 팔레스타인에 뿌리를 둔 기독교, 그리스 문명, 로마에서 기원한 법, 영국의 대의 민주주의, 네덜란드의 연방 정신과 관용 등 세계 정치 전통의 정수만을 모아 건국된 인류 보편적 미덕을 갖춘 유일한 나라라는 자부심이 그것이다. 촘스키도 언급하고 있듯 미국의 이런 자부심은 때로 윌슨식 이상주의 외교 형태로 드러나 "세계 모든 나라의 미국화"를 주장한다. 이것이 냉전 기간 동안 우리가 받아들여 왔던 미국의 신화이며, 미국민 자신들이 믿는 미국이다.
그런 상황에서 터져나온 9.11 사건은 미국과 미국민들에게 세계의 위험과 무질서에 대해 미국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9.11은 진주만 사건과 필적할 만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사실, 인류는 오랫동안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애써왔다. 현실적인 맥락에서 파악할 때,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유럽 문명이 꿈꿨던 평화체제는 다극화된 강대국들에 의한 힘의 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극화된 강대국들에 의해 유지되는 힘의 균형은 극도로 불안전한 형태였고, 작은 불씨 하나로도 전유럽을 불태울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체제임이 입증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이 유럽에서 더이상 힘의 균형상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고, 유럽의 다극적 불균형상태(의 한 원인은 소비에트 체제의 구축이었다)를 영국과 독일의 이극 체제로 대체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유럽의 시도는 실패했고, 미국의 개입 없이 세계의 안전은 보장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양극화된 세계 체제는 유럽의 평화는 가져왔으나 제3세계의 국지전 양상을 불러왔고, 냉전의 결과 현재는 미국의 일극 체제가 완성되어가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장이모우가 "영웅"을 통해 물어왔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춘추전국시대를 유지할 것인가? 진의 천하통일을 눈감을 것인가? 노암 촘스키는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려야만 다음 큐브로 넘어갈 수 있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제국이자 패권 국가로 유지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난 양심에 묻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에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 우리는 그 고비에 서 있다.
"식민지 국민에 대해서도,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에 대해서도 말하지 마라. 폭군은 너무 늦게 살해된다는 것, 그것이 그들이 주로 하는 변명이다." - 에밀 시오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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