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 - 귀순 장교 출신 북한 담당 저널리스트가 쓴 북한군 A-Z 그리고 핵, KODEF 안보총서 2
이정연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7년 2월
세상은 윤리나 도덕, 이념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선생님은 지리교사였다. 그는 나중에 전교조에 가입하지도 않았고, 주변 학생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는 스승도 아닌 평범한 교사였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판단을 앞세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억하는 대표적인 이야기 중 하나가 세계지리시간에 남아프리카연방공화국에 대해 공부할 때의 일이다. 지금은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이 철폐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넬슨 만델라는 감옥에 있었고, ANC는 테러 단체였다.
지리 선생님은 불과 20% 미만의 백인들이 남아공의 부와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들이 80%에 달하는 흑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선생님들은 대체로 그 지점에서 더 이상 가르치지 않지만 이 분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만약 여러분이 남아공에서 흑인이 아닌 백인으로 태어났다면 그래도 여러분은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폐지를 주장할 수 있을까? 한 번 자문자답해보라.”고 가르쳤다.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분리정책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리 선생님은 도의적으로나 윤리적으로는 그것이 맞는 말이겠지만 현실적으로 남아공의 백인이라면 이 악명 높은 인종정책을 철폐하는데 상당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남아공 식민지를 개척한 보어인의 후손이며 그들 대부분은 사실 인종분리정책을 직접 입안한 사람들도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선조가 식민지배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 만든 정책으로 인해 자신은 기득권을 누리고, 흑인들은 이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면 자신들이 이와 같은 권력을 놓았을 때 돌아올지 모를 후폭풍에 대한 두려움은 아마도 너희들이 상상하는 이상이지 않겠느냐며 세상은 윤리나 도덕, 이념만으로 재단할 수 있을 만큼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란 가르침을 주었다. 인종분리정책을 철폐한 남아공에서는 예상대로 흑인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넬슨 만델라는 정치적으로 보복하는 대신 진실을 밝히는 것을 조건으로 과거의 백인정권을 용서했다. 용서와 화해만큼 단호하고 현명한 대처는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워치콘 2>와 북한의 2차 핵실험
한미연합사령부는 2009년 5월 28일 오전 7시 15분을 기해 ‘워치콘’을 2단계로 격상시켰다. 워치콘이란 워치 컨디션(Watch Condition)의 줄임말로 대북 정보감시태세의 강도를 나타내는 말이다. 전쟁준비단계를 의미하는 데프콘과 마찬가지로 5단계로 구분되며, 카운트다운과 마찬가지로 숫자가 낮을수록 위기의 강도는 높아진다. 국내에서는 지난 1981년부터 운용되었으며, 한미연합사령관이 독자적으로 발령할 수 있다. ‘워치콘 5’는 일상적인 상태를, ‘워치콘 4’는 일상적인 상태를 유지하지만 잠재적인 위협이 존재하여 계속적인 감시가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하며 한국은 휴전상태에 있으므로 언제나 ‘워치콘 4’ 상태에 놓이게 된다.
‘워치콘 3’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상태에서 발령되며, 팀스피리트 훈련 당시 북한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한 1992년 10월부터 1996년 4월까지 ‘워치콘 3’ 상황이 지속되기도 했다. ‘워치콘2’는 한반도 안보에 뚜렷한 위협이 증대되고 있는 상태에서 발령되는데 정보요원의 근무가 강화되고, 적의 미세한 활동 상황에 대한 정보까지 수집하게 된다. ‘워치콘 1’의 경우엔 적의 도발이 명백하다고 판단될 때 내려지며 휴전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발령된 적이 없다.
북한군 장교 출신의 저자가 들려주는 북한군의 실상
월남한 북한군 장교 출신의 저자가 직접 경험하거나 들었던 북한군의 실상을 자신의 삶과 더불어 소개하고 있는 책이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정연(필명)은 지난 1969년 함경도에서 해군 군관이었던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남측에서 군인 아버지를 둔 사람의 삶이 아버지의 강한 영향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군인을 아버지로 두었던 저자 역시 집에서까지 군인정신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그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군인 유가족이 된 이정연은 혁명열사가 된 아버지 덕분에 혜택 받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몰라도 그는 우리가 어린 시절 익히 보아왔던 월남 귀순자와는 조금 다른 태도로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내 개인 신상과 관련된 것들을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아예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성장 과정이나 군 생활에 대한 소개 없이는 이야기의 맥락이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고, 나 스스로도 한 번쯤은 이런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30년은 악몽의 세월이었고, 남한에서의 7년은 축복이었다는 식의 고백을 할 수는 없다. 남한에서의 삶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버리고 온 고향이라 해도 북한은 엄연한 내 고향이고, 지난 30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문 16쪽>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는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직후인 2007년 1월에 발간되었는데 책의 서두와 말미에 북한의 핵개발 과정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앞서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 그는 남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본인 자신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우리 입장에선 전향이고, 귀순인 것이 저쪽 입장에서 보면 배신이고 변절이 되는 것이 우리 민족이 처한 슬픈 운명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의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발언은 이 책에 담긴 내용에 대해 신뢰를 증대시킨다. 이정연이 증언하는 북한군의 실상 중 상당수는 남한과 많이 다르고,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부분들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있었다. 혁명열사 가족 출신인 저자가 남한 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이 책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해 할 부분일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이 자신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이지만 동시에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고생스러웠던 북한에서의 삶, 북한 체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향한 위험한 도전사를 듣길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점에서 나는 다른 탈북자들에 비해 그다지 할 말이 많지 않다. 이미 술회한 것처럼 나는 지독한 고생도, 당의 정치사상적인 배척도 겪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탈북 동기는 한두 마디로 짧게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 <중략> … 당시 내가 몸을 담고 있던 조직에서 당을 대표하는 당비서와 개인적으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북한 내부는 물론 남한과 서방세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북한 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국가 체제를 뒤흔들 만한 거대한 기획이라기보다는 체제를 유지․강화하면서 인민들이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하는 당의 사업 방법에 대한 지엽적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당비서는 이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는 것을 참지 못했고, 나중에는 감시와 도청까지 했다. 나의 사상이 변했다고 생각하는 당비서와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나는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본문 23-24쪽>
북한군 장교 출신의 저자는 탈북 동기를 묻는 질문 못지않게 본인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질문 중 하나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을 꼽는다. 그는 섣부르게 어떻다라고 대답하는 대신 자신은 군인 출신이고, 군인 출신으로서 북한의 지도자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군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언을 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가끔 우리 사회의 언론은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잣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된 까닭에 실상에 접근하는 경로를 도리어 차단하거나 필터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보수언론은 북한이나 북핵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강경일변도로 취급하고, 진보언론은 그와 반대 입장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이들 언론의 북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대신에 스스로의 입장에 따라 기사내용을 첨삭하고 읽어내야만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알지 못하는 북한
이 같은 현상은 결과적으로 북한은 물론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인 조건들을 파악하는데 상당한 장애가 된다. 저자는 최근에 일어난 북한 핵실험(2006년 10월)이 남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남한 사람들 대다수가 북한은 핵실험을 할 만한 기술이나 지본이 없다고 믿어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북한에 대한 오해가 북한 핵실험을 더욱더 충격으로 받아들이게 했는데, 북한의 과학기술이 서방의 것과는 다를지 몰라도 나름대로 뛰어난 과학기술이 축적되어 있으며 나름의 자본 역시 갖추고 있다고 증언한다.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탈북 행렬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고, 인민이 도탄에 빠진 상황에서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북한의 지도자들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와 같은 입장만으로는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정연은 자신이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군에 대해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지만 그보다 앞서 자신과 이 책이 지닌 한계부터 밝혀두고 있다. 우선 자신이 탈북한지 7년(2007년 기준)이나 지났다는 점, 북한에서 비교적 폭넓은 군 경력을 쌓았다고는 하지만 한 개인의 경험 폭 내에서 기술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 등을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 체제를 참을 수 없어 탈북하기는 했지만 자신은 여전히 북한을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한다. 비록 북한에 직계 가족은 없지만, 친척과 친구들이 살고, 군복무 시절엔 함께 생사고락을 나눴던 동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모두 7장에 거쳐서 북한군 생활의 소소한 일면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가 북한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미처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군에 간 동기가 자신이 체험한 군 생활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기술한 추억록을 읽는 기분에 빠질 정도로 재미있게 적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앞서 이야기했던 자신의 입장과 간략한 생애를 기술하고, 2장 <북한의 군인들> 편에서는 입대에서 전역에 이르는 과정, 남자들이라면 으레 흥미를 가지기 마련인 여군의 생활, 그 외 내무반 생활, 경례나 구호, 위문공연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그리고 3장 <북한군의 보급>편에는 군복, 군장, 식량, 월급 등의 내용이, 4장 <북한군의 교육 및 훈련> 편에서는 북한군이 평소 받고 있는 훈련의 내용과 각종 병과에 대해 소개한다. 이외에도 5장 <북한군 편제>, 6장 <북한군의 각종장비>, 7장 <북한의 예비 병력과 준군사 조직>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매우 딱딱하고 기술적인 내용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휴가 나온 친구에게 군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재미있다.
북한군이 사용하는 말 중에 ‘일났다’라는 말은 ‘난처하게 됐다’는 말이고, ‘뗑한새끼’는 ‘고문관’을 말하며, ‘했다친다’는 ‘죽여주네’라는 뜻이다. 또 ‘나비 한 마리’는 ‘닭 한 마리’, ‘빠골한대’는 ‘담배 한 대’, ‘까리 있냐?’는 ‘여자 친구 있냐?’라는 말이다. 그 밖에 여군에게 ‘운반식사하게 생겼네’라고 하면 ‘밥 먹으러 밖에도 못 나오고 내무반에서 날라다 먹을 정도로 너무 못 생겼다’는 말이다. <본문 60쪽>
북한 핵실험과 남한의 대처 - 마주보고 달리는 남북열차
그는 맺음말에서 “북한에서 최초로 핵개발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김일성이다.”라면서 북한 핵개발에 얽힌 비화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은 1962년 평안북도 영변 분강 지구에 핵 단지를 조성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 평양의 김일성 종합대학에도 핵물리학부를 설치하여 전문 인력들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핵개발에 들어갔고, 1980년대 중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개발의 총사령관”을 자임하며 “핵개발부대는 나의 친위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핵을 개발(폐연료봉 재처리 과정)하는 과정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쓰러지는 사건(1987년)이 일어나자 이들을 모두 최고위층만 치료받을 수 있는 전용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모두 회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핵개발과 관련해서는 북한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보였던 저자 자신도 매우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재래식 무기만을 보유했던 북한은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였고, 수많은 도발을 통해 한반도의 불안을 야기하고 전쟁 위협을 가해왔다. 이렇게 남한에 위협을 가하면서 남한 정부로터 뜯어간 돈과 물자를 핵개발에 사용하여 핵무기 보유 선언에 이어 핵실험까지 했으니, 앞으로 북한이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다. 이러한 북한의 핵 도발과 전쟁 위협에 단호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도자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본문 314쪽>
책 제목이 『북한군에는 건빵이 없다?』지만 실제로 북한군에 건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수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북한군들이 건빵을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저자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북한군에게 ‘건빵’은 없지만 ‘핵’이 있다는 건 매우 역설적이다. 다시 말해 북한군의 재래식 군사력은 전쟁을 장기간에 걸쳐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쟁억지력으로서 ‘핵’이 필요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앞서 남아공의 사례를 들었지만 북한이 체제를 온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제 미국의 인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미국은 여러 가지 조건을 달면서 북한의 체제 인정에 대해 인색했다. 물론 이것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많이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란 사실 또한 인정한다.
어쨌든 남북한이 수십 년에 걸쳐 첨예하고 대처하고 군비경쟁을 하는 동안 북한의 자원은 고갈되고, 인민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북한군 장교출신의 저자는 햇볕정책이 북한에게 핵실험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고 비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그의 이런 비판은 매우 익숙한 비판이기도 하며, 국가안보를 염려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익히 들어본 말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도 결국엔 “북한의 핵 도발과 전쟁 위협에 단호하게, 그리고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도자”의 필요로 귀결된다. 과연 이런 지도자는 어떤 지도자일까? 보수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있을 것이고, 진보가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지난 냉전 시기 소련의 ‘베를린 봉쇄’에 맞서 대규모 공수작전을 성공시켰고,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단호하고 냉정한 대책으로 미국의 바로 코 밑에 설치될 뻔했던 핵미사일을 철퇴시킨 존 F. 케네디 대통령 같은 인물을 떠올리지도 모르겠다.
단호하고 현명한 정치지도자란?
지난 2003년 에롤 모리스 감독은 20시간에 걸쳐 존 F. 케네디 대통령 당시 미 국무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맥나마라를 인터뷰해 <전쟁의 안개(The Fog of War ; Eleven lessons from the Life of Robert S. McNamara)>라는 걸출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부제는 ‘맥나마라의 삶으로부터 얻는 열한 가지 교훈'이다. 영화는 각각의 교훈에 따라 열한 개의 에피소드로 구분되어 있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에 대해 로버트 맥나마라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미국은 쿠바에 사회주의성향의 정권이 들어서자 CIA를 동원해 이 정권을 붕괴시키는 피그스만 침공을 기획했으나 실패했다. 미국의 위협에 두려움을 느낀 쿠바는 소련의 핵미사일을 들여와서 배치할 계획을 세웠다. 뒤늦게 이를 확인한 케네디 정부는 함대를 동원해 쿠바를 해상 봉쇄했다. 소련의 화물선들은 시시각각 쿠바에 접근해 왔고, 르메이를 비롯한 미국의 강경파들은 소련에 대한 선제핵공격을 주장했다. 세계 멸망의 시간이 불과 몇 초 앞으로 다가온 상황이었다.
그와 같은 절체정명의 순간 소련의 당시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는 터키에 배치한 미국 핵미사일을 철수하는 조건으로 쿠바에 배치한 소련 핵미사일을 함께 철수하기로 하면서 핵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맥나마라는 쿠바 미사일 위기로부터 30년이 지난 1992년, 쿠바를 방문해 카스트로에게 직접 미사일 위기 당시의 실상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쿠바에는 미국의 예상과 달리 이미 162기의 핵미사일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는 카스트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일 미국이 공격해 오면 소련 총리 흐루시초프에게 핵미사일 발사를 요청하려 했는가? 또 실제로 핵미사일을 발사했다면 쿠바는 어떻게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카스트로는 “이미 흐루시초프에게 핵미사일 발사를 요청해 놓은 상태였고, 만일 미국이 공격했다면 실제로 핵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맥나마라는 선제핵공격을 입안했던 미국의 입장도 합리적이었고, 이에 대해 반격을 생각한 쿠바와 소련의 입장 역시 정책 입안자로서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 진영의 정치지도자들이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지구의 종말이었을 것이다. 서방세계의 많은 이들이 존 F. 케네디의 해상봉쇄라는 단호하고 현명한 대처가 세계의 종말을 막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단호하지 못했고,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했던 흐루시초프의 무능함이 핵전쟁의 참화를 막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는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체면을 구긴 결과 서기장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과연 단호하고 현명한 지도자란 핵전쟁도 불사할 수 있는 지도자일까?
북한의 2차 핵실험 소식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추모열기에 묻히는 분위기다. 보수진영의 여러 인사들이 북한의 2차 핵실험과 이후 진행된 미사일 발사 시험 등 안보의 이상 징후를 경고하고 나섰지만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국민이 무관심하거나 무관심해 보이는 이유는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정권 초반부터 미국의 입장보다 앞서 나가면서까지 북한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인색하고, 상대를 굴복시키겠다는 인상을 주어왔던 MB정부의 대북정책이 빚어낸 필연적인 결과라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영삼 정부 당시부터 지나치게 길게 끌어온 북핵 위기가 마치 양치기 소년의 “늑대가 왔다”는 경고처럼 이제는 둔감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한반도는 최악의 위기 앞으로 내달려가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단호하고 현명한 대처는 무엇일까? 슬프게도 지금 이 순간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 남한 정부는 그나마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욱 슬프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