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디자인 아이콘 83
폴커 알부스 외 지음, 조원호 외 옮김 / 미술문화 / 2008년 2월
'디자인(design)'이란 '지시하다, 표현하다, 성취하다'의 뜻의 가진 라틴어 데시그나레(designare)에서 유래한 말이다. 디자인의 사전적 의미는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한 것'이란 뜻이다. 디자인의 모든 결과물은 조형적 실체가 있지만 디자인이 지시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주어진 목적)이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은폐되거나 과잉표현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20세기는 인류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시대였다. 인류가 서로를 진정으로 인류라 부를 만한 시대의 진정한 시작이 20세기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의 인류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대체로 동시적인 관계라기 보다는 비동시적인 관계에 더 가까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류의 관계 맺기가 반드시 선의에 의해 비롯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20세기의 역사가 학살과 착취의 시대였다는 것이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20세기 인류가 이전 세기와 구분되는 여러 가지 차이들 중 한 가지는 인류가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을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15년에 처음으로 디자인된 코카콜라병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판매되며 누구나 본 적이 있다. 심지어 외부 문명과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는 '부시맨'조차 알고 있다. 그런데 '코카콜라'의 병 디자인엔 이데올로기가 없을까?
우리의 많은 분야가 그러하듯 '디자인' 분야 역시 20세기에 와서 진정한 세계화를 이룩했다. 그 사실을 나는 이 책 "20세기 디자인 아이콘83"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생각해보자. 이와 같은 책이 다루는 주요대상이 19세기나 18세기라고 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지금의 것들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 시대에 생산된 물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진정으로 대중적인 물건, 다시 말해 세계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소비된 제품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0세기는 공산품의 시대, 산업디자인의 시대였다고 정의할 수 있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은 대량생산과 기능주의 철학에 의거한 디자인을 대중의 일상생활에 도입했다. 디자인의 역사는 미의 세계와 기능의 세계가 서로 경합하고, 절충하는 역사였다. 산업사회이자 대중사회였던 20세기의 디자인은 일부 수준높은 감식가들에 의해 영위되는 초현실주의 추상예술이 아니라 대중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디자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적인 호사취미이거나 디자인 전공자만의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 역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구체적으로 조형해낸 현실 세계의 맨 얼굴과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스 정교나 동방정교의 종교적 상징언어에 해당하는 미술작품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이콘(ICON)'은 오늘날 무형의 아이디어를 상징하는 구체적인 조형으로 기능한다. 저자들이 이 말을 채택한 의미가 무엇이건 간에 이 책이 담고 있는 주요 디자인 아이콘들이 그 시대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 디자인이 담고 있는 시대정신을 함께 상징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물신(物神)으로서 상품의 아우라를 반영한다(기술복제 시대의 제품에도 '아우라'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아이콘으로까지 보인다. 그만큼 우리 시대와 삶이 이들 디자인(제품)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디자인 아이콘'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산물이며 시대를 드러내는 고도의 상징언어를 의미한다. 저자들은 이 책을 통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산업 아이콘을 선별해서 보여주고 싶다는 의욕으로 출발한다. 이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우선 1900년에 생산된 언더우드 타자기이다. 'QWERTY' 유니버설 자판을 처음으로 통일한 타자기였다. 1905년의 '롤리 안전자전거' 역시 나는 무척 중요한 시대의 아이콘이라 생각한다. 자전거 자체가 대단한 아이콘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자전거'가 대중화된 이 시대에 비로소 대중(노동자)들에게 휴가와 레져의 개념이 도입되었기 때문인데, 같은 맥락에서 '자전거'에 필적할 만한 아이콘이 있다면 '피아노'일 것이다.
이 시대에 들어서야 '피아노'가 부르주아지가 아닌 중산층의 산물이 되었고, 사람들이 공장에서 쓰러져 시체처럼 잠드는 것이 아니라 퇴근하고, 집(HOME)으로 돌아가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즐거운 나의 집으로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는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사회주의' 때문이었다). 1908년의 포드T 모델은 더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1913년의 라이카 카메라는 새로운 예술을 본격화해주었다. 1933년 폴크스앰팽거(국민라디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와 PR(Public relation)의 놀라운 결과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류의 책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이 책 역시 일정한 한계를 보인다. 83개의 디자인 아이콘을 300여쪽의 지면 속에, 그것도 여러 도판들과 함께 다루다 보니 정작 그 제품이 어째서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될 수 있는지 깊이있게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꽤 여러 종의 의자들이 등장하는데, 나는 디자인에서 의자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렴풋이 짐작은 가면서도 끝끝내 그와 관련한 구절을 읽지 못했다. 물론 비전공자로서 나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에 그런 부분들이 좀더 친절하게 설명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다음은 '디자인과 의자'라는 주제로 2004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 소개 글에서 따온 것이다.
의자는 디자이너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창의성을 발현하는 사물로서, 디자인의 역사를 가늠하는 지표(index)가 되어왔다. 대중에게도 가장 친숙한 사물 중 하나로 인식되어왔고 인테리어에서 중요한 사물이 되어 있다. 어쩌면 의자는 ‘앉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갖고 싶은’ 욕망의 사물일 수도 있다. 실제로 조각 작품이나 소품처럼 의자를 선택하여 특별한 공간에 두기도 하며, 대체로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의자들은 컬렉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정도만 설명해주었더라도 좀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디자인의 미적인 부분과 실용적인 부분이 늘 서로 경합하는 딜레마인 것처럼 이런 책의 딜레마 역시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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