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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 - 이동은 | 정이용 (지은이) | 이숲 | 2013-11-15
이동은과 정지용의 공동작업물인 만화 "환절기"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오, 한강"이 허영만 그림, 김세영 글의 작품이었던 것처럼 "환절기"는 시나리오 작가 이동은이 글을 쓰고, 만화가 정이용이 작화한 작품인데, 두 사람의 향후 작업을 공동이든, 개별적이든 각각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만큼 뛰어나다.
아마도 이 작품이 영화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나리오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영화화(일반 대중과 만나기가)되기가 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루고 있는 내용이 남성 동성애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르주아지에겐 문화 창조의 에너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모든 문화적 창조력은 부르주아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트에서 출현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는데, 그와 흡사한 맥락에서 만화는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제작의 원천으로서 만화(그 이전엔 소설)가 주목받을 수 있다.
메인스트림으로부터 한 발 벗어나 있다는, 바로 그 이유로 만화는 더욱 자유로운 창작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용준이와 수현이, 그리고 수현이의 엄마란 세 명의 인물이 주된 인물인 이 작품에서 용준이는 아버지의 폭력으로(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어머니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상황에서 수현이네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평소 말수가 적고 어머니와 관계맺기가 수월치 않았던 수현이는 용준이가 와 있는 동안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고, 어머니와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수현이 엄마는 그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가 용준이 덕분이라고 생각하여 이들 세 사람은 매우 화목한 의사가족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용준이가 군에서 제대하고, 아들 수현이도 군에서 제대할 무렵 다시 뭉치게 된 두 친구는 차를 빌려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난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교통사고로 수현이는 식물인간이 되고, 엄마는 자연스럽게 용준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아들의 카메라에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엄마는 그제야 수현이와 용준이 그저 절친이었던 것이 아니라 애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큰 충격에 빠진다. 엎친데 덥친 격으로 오랫동안 사업차 필리핀에 나가 있는 것으로으로만 알았던 수현이 아빠는 엄마에게만 수현이를 맡겨놓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다. 그제서야 수현이 엄마는 남편이 그곳에 다른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등장인물은 셋이지만 실질적으로 "환절기"를 끌고 나가는 인물은 수현이 엄마와 용준이다. 내 아들은 수현이지만, 엄마를 잃은 용준이를 오랫동안 지켜보며 정이 가는 것은 아들처럼 바라보았지만, 결코 친아들은 될 수 없는, 그리고 아들의 애인이자 이제 짐덩이처럼 누워있는 아들 수현이가 사고를 낼 때(또는 당할 때) 함께 있었지만, 멀쩡한 용준이다. 용준은 의젓하고 점잖으며 아들 수현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는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수현이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병수발을 한다.
엄마는 용준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현이는 깨어날까? 그런 생각이 들법도 한데 작품을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신기할 지경이다. 정이용의 그림체를 보면서 내내 한국이나 일본 같은 아시아권은 물론 미국 만화와도 구별되는 특이한 느낌이 있는데(유럽 만화를 보는 느낌이) 그 까닭은 아마도 디자인을 공부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인물 묘사는 물론 전체적으로 그림의 라인이 매우 단정하고, 절제되어 있는데다가 인체 비례조차 만화적이지 않다. 만화에서 인체 비례는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는데 대표적인 것이 얼굴에서 눈(안구)이 차지하는 비율이다. 만화에서 이렇게 묘사되는 까닭은 이목구비(특히 눈)의 표현을 통해 감정 묘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이용은 그와 같은 과장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눈을 통한 감정묘사 및 기타 상황 등을 정밀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환절기"는 매우 정교한 작품이다. 사실적인 묘사와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전개 방식, 절제된 표현(심지어 배경 등에서 스크린 톤 사용조차)에 만화니까 대충 보면 되겠지란 가벼운 생각을 그야말로 가볍게 넘어서는 시간 배열 등을 통해 품위있는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 이 길이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방황하다가 다시 돌아왔다니....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