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강홍규 지음 / 나들목 / 2003년 12월
문단비사(文壇秘史)란 말이 있는데, 문단비사의 소비 과정을 보노라면 문인들도 연예인과 별반 다를바 없는 과정을 거친다는 걸 알 수 있다. 굳이 에드가 모랭을 빌지 않더라도 문인들 역시 스타의 조건들을 구비하고 있다. 스타를 일종의 "초인격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어떤 독자들에게 어떤 문인들은 그런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인들이 제 아무리 고독한 포즈를 취한다 할지라도 근대의 문인들 혹은 지식인들은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자면 입신출세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근대의 관성적 흡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혹은 저주의 말을 쏟아내는 그 순간까지도 사실은 이해받고 싶다는 욕구를 숨기지 못한다. 즉, 근대의 욕망으로부터 탈출한 지식인들이 필연 혹은 우연으로 문학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문학의 속성 혹은 정신은 마이너리티에 있다는 걸 의미한다.
강홍규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은 의도적으로 읽은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 김수영, 박인환, 천상병, 신경림, 황석영, 조태일에 대해 좀더 잘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은 것이지, 특별히 문인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회가 동한 건 아니었다고 변명해두자. 그 이유는 두 가지다. "명동백작"이란 드라마를 EBS에서 해주었고, 이에 대한 시청률이 상당히 나와서 그 자체가 뉴스가 된 적이 있다. 명동백작이란 소설가 이봉구의 별명을 말한다. 그는 전후 김수영·김광주·이진섭·김광균·박인환 등과 함께 거의 매일 명동에서 술판을 벌였는데, 그렇게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하거나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명동백작'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와 관련된 문단의 일화를 이야기하자면 드라마로 엮일 정도이니 오죽 많았겠는가,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가운데 하나는 전혜린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엔 정말 맹탕이다.
나는 명동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러니 나에게도 소위 명동시절이 있었다. 물론 내가 다니던 시절의 명동은 꿈과 낭만, 절망과 희망이 혼재한 드라마 속의 명동과는 천양지차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21세기의 명동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곳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어렸을 적 누구나 환상을 품었음직한 시인, 소설가들에게 사사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늘 소문에 어두웠다. 내게 있어 문학은 의도적인 일탈이었고, 그것이 의식적인 선택이었으므로 문학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엄숙한 것이어야 했다. 문제는 내가 늘 너무 엄숙하다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들려오는 소문이란 늘 치명적인 것이었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고 싶거든, 멀리서 바라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말이지만 특히나 스타성을 지닌 이들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사이버기술로 만들어진 "쿄코"라는 사이버 캐릭터를 알고 있고, 한국에서 만들어진 사이버 캐릭터인 "아담"을 안다. 그런데 만들어질 당시엔 현해탄 양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이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시 사이버캐릭터들은 사이버상의 캐릭터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사이버상으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엿볼 수 있게 매일같이 그들의 스케줄(물론 가상이지만), 그날그날의 감상을 공개했다. 이런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사이버캐릭터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미키마우스보다 인간의 형상에 가까왔지만 실패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이들에게 주어진 가상의 가족, 가상의 주민등록번호, 가상의 출신학교 등등이 문제였다. 문제는 이들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면 보일수록 대중들은 이들에게 어떤 신비감도, 호감도 품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환상을 품는다. 이미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대상에게 환상을 품을 관객이 얼마나 되겠나. 올해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이란 제목의 뮤지컬이 무대에 올려진다고 한다. 강홍규 선생의 책 제목이자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에서 따온 노래 제목이기도 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은 그런 의미에서 대중에게 스타의 일화를 소개해주는 책이다. 과거 5.60년대 입신출세라는 평범한 궤도 위에서 일탈한 문인들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스타들의 뒤안길을 더듬어 보려는 호사적 취미일 수도 있다. 이제 광고에 얼굴을 드러낸 시인, 소설가들을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 누가 찍어주었는지 포즈도 좋고, 사진들도 좋지만, 과거 김수영의 눈에 깃든 형형한 안광을 발하는 이들을 보기란 쉽지 않다. 물론 문학이 언제나 근엄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며, 작가가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 나쁜 일도 아니다.
문제는 마이너리티의 정신은 가고, 그 포즈만 남을 때 문학이 너무 왜소해진다는데 있을 뿐이니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이 책에서 우리는 옛 글쟁이들의 취기와 범벅된 치기, 상스러움과 뒤섞인 성스러움, 속물근성과 이를 경계하는 지식인됨의 자존심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가버린 세월은 언제나 무수한 전설을 남긴다. 그 시절 그들 곁에 머물렀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까? 그건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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