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회학에 대해 조금 관심 있는 이들은 제법 많은 사회학자들이 연구 이력의 초기에는 사회구조나 갈등 같은 첨예한 주제에 관심을 보이다가도 말년에 가서는 종교사회학 같은 인간 본성과 관련한 문제들로 연구 주제를 변경하거나 심지어 영성(靈性)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성숙해가며 경험하는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아르키메데스는 “나에게 지렛대와 받침점만 준다면 지구를 들어 올려 보겠다.”고 했다는데, 누구라도 젊었을 땐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젊은이는 자신이 혹은 자기 세대의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뒤바꿔보고 싶어 할 수 있다.
나에게 2007년, 올해는 특별한 한 해였다. 1987년으로부터 만 20년,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내가 경험한 87년으로부터 20년이 흐른 해란 점에서도 특별한 한 해였지만, 어느덧 기성세대의 일원이 된 한 사람으로서도 올해는 내게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해였다. 이렇게 말하니 올해가 모두 가버린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올 상반기 워낙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올해의 시간들을 다 살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 나름으론 제법 의미 있는 상도 받았고, 언론매체들로부터 인터뷰도 꽤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났던 좋은 일과 달리 나의 내면엔 오래전 일들로부터 이어진 묵은 상처와 새로운 인연들이 만들어낸 상처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깨어나 상처받아야 했던 여성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타인과 소통할 수 없다는 무력감, 고립되었다는 상실의 감각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렇게 가을을 목전에 두고 있다.
문학으로부터도 멀어진지 이미 오래다. 간간이 시집에서 한두 편의 시를 골라 읽어내긴 하지만 그저 문학에 대한 나의 감각이 너무 멀어지는 것이 싫어 버릇처럼 읽을 뿐이다. 본래 좋아했고, 한때 열망해 마지않던 소설을 손에서 내려 논지도 이미 오래다.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이라고 강변하지만, 즐거움 너머 내 생(生)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오래된 욕망은 시들지 않는다. 내 나이 38세. 이제 곧 마흔이다. 생의 의미가 곧 가치는 아니겠지만,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욕정(欲情)은 늙은 개의 그치지 않는 식탐처럼 멈추지 않는다.
사막에서는 자살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 땅이 이미 죽음과 함께 살고 있는 까닭이다. 사막은 인간에게 가장 적대적인 곳 중 하나다. 하루하루가 자연과의 싸움이다. 자연과의 백병전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배운다. 우리 삶의 이유는 바로 생명이다.
어느 날 한 프랑스인 친구가 내게 끔찍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친구가 말을 이었다.
“난 삶에서 아무 가치도 없는 놈일 거야.”
친구는 자신이 무능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막의 우리는 언제나 유능한 사람들이다. 자연을 넘어서려 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족과 동물들을 먹이기 위해 인생길을 걷는 사람이 왜 죽고 싶겠는가?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박하게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것. <본문 169쪽>
휴가(休暇). ‘쉬는 겨를’을 의미하는 휴가의 휴(休)자에는 말 그대로 ‘쉬다’란 주된 뜻이 있지만, 그 안엔 ‘아름답다, 용서하다’란 뜻도 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나는 언제나 일했다. 일을 찾아서 했고, 없으면 만들었다. 휴가와 겹쳐 일이 있으면 일을 우선으로 했다. 나는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때마침 내가 좋아하는 일들이었다. 휴가 때도 중간에 회사를 다녀가야 했고, 회사 일에서 놓여날 수 있었을 때도 원고를 쓰거나 다른 일들을 벌였다. 멈춰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날 용서해주지 않고, 내가 나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으며, 자비롭지 않다.
우리 부족에게 이런 말이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관조할 시간도 없이 소멸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시간과 짝이 되어 여유 있는 행동을 하게 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충실하도록 도와준다.
참을성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게 벗어난 일이 결코 없다. 실제로 서두르다 보면 흥분하고 놓치는 것들이 많아져, 우리의 온 존재는 조화를 잃어버린다. 지각했을 때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성급한 사람에겐 고통이겠지만, 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겐 매우 풍요로운 시간이 될 수 있다. <본문 127쪽>
나는 날 제법 영리한 사람이라고, 적당히 양심적이고, 사리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때때로 나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타자에 대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배려를 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나의 이상(理想)이 가지고 있는 간극의 차를 알고 있으며,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고, 무엇을 타협해서는 안 되는지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므로 내가 이 한 권의 책을 읽고 갑자기 사막별로 여행을 떠나는 고독한 순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누구나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나이쯤 되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으며 생각한 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쯤 안다. 누군가 나에게 내미는 손이 어느 경우라도 그 자체로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쯤 안다. 그것이 낯선 타인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인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쓰디쓴 교훈이다.
가족, 사랑, 친구, 우정과 같이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 믿었던 관념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이 사실은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타고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감정들이 아니라 인류가 무리를 지어 수만 년을 살아오며 배우고, 훈련된 결과라는 것쯤 고고학적인 증거로부터 시작해서 심리학적인 근거까지 들어 나열해 놓을 수 있을 만큼의 상식은 내게도 있다. 글을 쓰는 현시적(顯示的) 자아는 이미 ‘진정한’ 나와는 분리된 자아다. 말을 하는 동안 내 안의 ‘현시적’ 나는 또 ‘다른’ 나와 대화를 나누며, 겉으로 드러난 나는 그런 나와 나눈 대화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 글을 쓴 투아레그족(Tuareg) 젊은이, 어쩌면 내 또래일지도 모르는 낯선 이방인의 얼굴을 상상해보기 위해 나는 구글(Google)의 이미지 검색 기능을 활용했다.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선 종종 타인의 시선을 빌려야 하는 것처럼 내가 태어날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받아들여지는 나의 외연을 알기 위해선, 날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외피를 알기 위해선 이방인의 시선을 빌려야 한다. 투아레그족 젊은이, 무사 앗사리드. 그가 이 책을 낸 문명 저 편의 이방인이다. 파리 - 다카르 랠리를 취재하러 온 어느 여 기자의 가방에서 떨어진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주워준 인연으로 시작된 그와 낯선 문명 사이의 교류가 이 책의 시발점이었다. 알 수 없는 말들로 쓰인 한 권의 책을 읽고 싶어서 사하라 사막에 살고 있던 한 소년이 30km나 떨어진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다. 소년은 책의 결말에 이르러 『어린왕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대목을 읽고는 작가에게 사하라 사막에 아직도 어린왕자가 살고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결심을 한다.
이 같은 저자의 에피소드가 감동적이긴 하지만, 저자보다 출판사가 더 내세우고 싶어 했을 이 대목은 지나치게 낭만적이다. 내가 처음 투아레그족에 대해 알게 되었던 계기는 이들이 사하라 사막에 사는 베르베르 부족의 일족으로 나이지리아와 수단 등지에서 소수 부족으로 살아왔고, 20세기 말 자치와 독립을 위해 내전을 치렀었다는 사실 등이었다. 사막별 여행자의 표지 그림에 묘사되고 있는 투아레그족과 사막의 풍경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만큼 이상화된 모습인 것 역시 사실이다. 본래 사막에 사는 투아레그족이 유목부족으로서 통상은 물론 약탈 역시 그들의 생활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었다는 사실도 사막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테니까. 투아레그족은 무슬림들이지만 그들만의 고유한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고, 대개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기 마련인 유목민임에도 불구하고 모계상속이다. 무슬림이면서 십자가 무늬를 좋아하고, 일부일처제란 점도 그들이 푸른 베일을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특이하다. 그러나 이들 사회에도 계급이 있고, 천민 집단이 있으며 얼굴을 베일로 가리는 집단이 이들 사회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이들이란 사실 같은 건, 저자 무사 앗사리드가 구태여 책에 쓰지 않은 탓이겠지만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휴가 기간 동안 읽은, 괜찮은 책 한 권의 가치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도 내게는 없다. 투아레그족 출신의 낯선 이방인, 무사 앗사리드는 책의 곳곳에서 문명의 사막에서 태어나 문명의 사막에 묻힐 도시의 유목민들이 자연 속의 사막에 으레 품을 법한 외경(畏敬)과 이국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며 자신만이 득도한 도인 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는 틈틈이 자신의 부족이 휘말렸던 내전의 풍경과 유목민으로 살아야 하는 어려움, 도시문명과 처음 접하며 경험한 실수담을 소개한다. 파리의 낯선 이방인으로 살기 위한 노력과 동시에 투아레그족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사막별 여행자』를 진부한 문명비판서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난 생생함을 선사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유목민 무사 앗사리드의 텐트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편안함을 즐겼다. 그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토를 달거나 정색을 하는 대신 ‘혹시 이런 점도 있지 않을까요?’라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아마도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라면 누구라도 어린왕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테니까.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만큼 본질적인 질문은 없다. 내가 어디서 왔는가는 내가 누구인가를 이해하는 기본이 된다. 나는 투아레그족이고, 사막에서 태어났으며, 우리 부족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또 나는 다른 모든 이들처럼 삶을 여행하는 여행자다. 나는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고 있으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다.
방황의 시기를 지나 비로소 자신의 길을 가게 될 때는, 바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그리고 어디서 왔는가를 기억해 냈을 때다. 투아레그족에게는 바람 앞에서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에는 바람이 우리를 우리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엉뚱한 곳으로는 데려가지 않는다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다. 바람은 그 시작된 곳에서부터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자신의 뿌리를 잃지 않고 앞으로 그저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온 곳에서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이 시작된 곳과 바람은 늘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뒤돌아볼 필요도 없다. 다른 곳을 향해 한눈을 팔 일은 더더욱 없다. <본문 178쪽>
칼 포퍼는 “젊어서 좌파가 아닌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나이 먹어서까지 좌파로 남아 있는 사람은 머리가 빈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요즘 내 주변을 돌아보면 심장 없는 젊은이, 머리 든 사람들로 지천이다. 지금 이들의 선택이 오랜 방황의 시기를 견디고 지낸 결과라면 좋겠다. 그러나 그 선택이 우리 사회가 조로(早老)한 까닭이거나 조루(早漏)한 탓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 시작된 곳을 잊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을 상실한 탓은 아닌지 생각되는 것이다. 바람은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언제나 자신이 처음 시작한 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믿고 싶다. |
|
반더루스트 |
지은이의 이름이 '무사 앗사리드'여서 아랍인과 일본인 혼혈인줄 알았습니다. 이책을 읽지는 않았으나 어렵지 않은 텍스트를 인용해선지 쉽고 명료하게 읽혀서 구두님 서평만 읽고도 나 이 책 봤다고 독서위조(?)를 해도 되겠습니다. 평소에 제가 느끼는 건데 시중에 널린 문학평론이나 서평을 읽어보면 많이 배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온갖 어려운 전문 학술용어(?)를 총동원해 저같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데 비해 구두님 이 글은 쉽게 읽혀서 좋습니다.
사방천지 열려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詩는 이곳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이런 격조있는 글을 공짜로 읽을만한 곳은 많지않죠. 아무래도 올리기 쉽다는 이유로 저부터 시를 먼저 데려오긴 합니다만 이곳 책창고에 이런 글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글쟁이인 구두님처럼 빼어난 글은 아니어도 서툴지만 순박한 독후감, 헌책방에서 만난 절판된 책소식, 영화 후기, 전시회나 음악회 리뷰 같은 글들이 많이 올라오기를 희망하면서 이런 것이 책창고의 궁극적인 자리라는 생각입니다.
구두님보다 제가 몇 살 더 먹기는 했으나 이따금 당신이 형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열살 아래 사람에게도 서슴없이 벗으로 대하며 忘年友라고 했다더군요.
반더: 우리 알고 지냅시다.
구두: 이봐요. 성장한 토양이 다르고, 가방끈으로 보나 지적 레벨로 보나 당신과 수준차이가 얼만데 감히 망년우요?
반더: 지가 머리에 든 건 없어도 배에 든 건 좀 되유.
구두: 거봐, 이런데서 벌써 수준차이가 난다니까.
반더: ^^
두두: 저를 좋아하는 거에요? |
|
|
뷔겐베리아 |
(**) 마지막 두두는 누구신감? ㅋㅋ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