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과 세계의 만남 ㅣ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45
마리우스 B. 잰슨 (지은이), 장화경 (옮긴이) | 소화 | 1999년 9월
새해 들어 첫 책으로 선택한 것은 마리우스 B. 잰슨의 "일본과 세계의 만남"이다. 예전에 박사 수업하면서 잠시 읽어보았는데, 이번에 제대로 정좌하고 읽기로 했다. 물론 내 시선이 향한 것은 일본 그 자체라기 보다는 조선과 (일본을 통한)세계의 만남에 더 쏠려 있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조선과 중국의 관계에 준하여 생각하기 쉽지만, 엄밀하게 말해 일본은 조공체계에서 상당부분 빗겨나 있었다. 그렇다고 일본이 중국의 지대한 영향력 밖에서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일본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명이었고, 흑선의 도래 이전까지는 영향을 받은 거의 유일한 문명이었다.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이란 문명의 외부에 시선을 돌리게 한 시작, 그 상징에 대해 마리우스 B. 잰슨은 난학(蘭學), 스키타 겐파쿠(杉田玄白)를 이야기한다. 1771년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한 스기타 겐파쿠는 아오차바바(靑茶婆)라고 불린 여성의 시신을 해부하여 내장의 배열을 살펴본다. 해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스키타 겐파쿠는 그동안 자신이 의존해왔던 중국 의학서의 내용에 실망하게 되었고,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서(독일인 의사 요한 아담스 쿨무스(Johann Adam Kulmus)가 쓴 해부학서 『해부도표(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판)가 얼마나 과학적으로 정확한지 알게 되었다.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키타와 그의 동료들은 네덜란드어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맹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사실만을 탐구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번역하기로 맹세한 책은 1774년 책으로 간행되었고,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일본에서 서양 서적의 번역 시대가 개막되었다. 그 책의 이름은 바로 『해체신서(解體新書)』였다.
마리우스 B. 잰슨의 책을 읽다가 18세기(1715년 첫 상연)부터 일본 서민층에 큰 인기를 끌었던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의 "고쿠센야의 전투(고쿠센야갓센, 國性爺合戰)"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은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탄생하였는데, 명말청초 타이완을 점렴하고 있던 네덜란드 세력을 격퇴한 인물이었다.
이쯤하면 대충 누구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정성공(鄭成功, 1624 ~ 1662), 남명의 융무제로부터 명나라 황실의 성씨인 주씨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임금의 성을 하사 받은 어른이란 의미에서 '국성야(國性爺)'가 되었고, 네덜란드인들은 그를 콕싱아(Koxinga)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고쿠센야'가 되었다. 절반은 중국인이고, 절반은 일본인, 명말청초의 권력 교체기에 남명의 황제는 청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지만, 그는 청에 굴복하길 거절하고 저항의 길을 택했다.
에도막부에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제 막 안정을 찾아가던 도쿠가와 막부는 중국과 새로운 갈등에 휩싸이길 원치 않았다. 1650년 정성공(고쿠센야)는 샤먼과 진먼섬을 근거로 하여 광둥, 저장 등 중국 남방 연근해를 공격했다. 청은 초기에는 정성공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남해 무역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던 정성공은 청에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청은 해안 주민들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해금 정책으로 바다를 봉쇄했다. 정성공은 병력을 이끌고 난징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뒤 네덜란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던 타이완을 해방시켰으나 1662년 6월 23일 39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훗날 청은 타이완의 정씨 왕국을 멸망시켰지만, 이후에도 정성공 일가의 충절을 인정하여 시호를 내리는 등 예우하였다. 2001년 홍콩에서 오자우 감독, 조문탁 주연으로 제작된 "척화영웅(英雄 鄭成功)"이란 영화도 있다. 중요한 지점은 일본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조공체제에 깊숙이 포섭된 적은 없더라도 문화적으로는 중화를 친근하게 여겨왔고, 명이 청에게 굴복한 것이 조선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던 것처럼 일본에게도 그와 흡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중화문명(명)을 오랑캐(청)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 것은 고쿠센야 같은(다시 말해 일본인) 선조의 위엄과 덕, 용기가 요구된다는 의식이 이미 당시부터 퍼져있었다는 것이다. "고쿠센야갓센"은 유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당시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당대의 서민들이 즐기던 연극이었다. 정성공이란 인물 하나만으로도 아시아에 대한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