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역사 21세기
마이클 화이트.젠트리 리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3월
"책과함께" 출판사의 책 "가상역사 21세기"를 읽고 리뷰 올리는 이벤트에 참가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다음 번에 또 이런 행사에 참가할지 아닐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앞으론 책욕심에 눈이 어두워 참가하는 일은 되도록 절제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직업상의 이유로 종종 저자나 출판사로부터 공짜로 책을 얻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책의 경우 태반은 남들의 리뷰가 올라온 연후에나 서재에 리뷰를 올리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엔 최소한 할 말이 있어서 올리지 않는 한 남들보다 앞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건 공정한 게임의 룰에 위배된다고 여기는 탓이다. 종종 인생에 비유되는 마라톤 경기조차 1등을 기억하지만 역사가 꼭 앞서간 자를 먼저 기억해주진 않는다. 공짜란 건 그래서 참 무섭다.
누가 보더라도 크리에이티브(creative, 그냥 광고적인 용어로도)한 영역에 대해 가치를 매기는 일이란 난감하기 마련이다. 종종 리뷰어(reviewer)란 것은 '되돌아보는 자' 이기 보다는 '먼저 보는 자' 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남을 설득할 필요를 느끼진 않지만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내가 믿는 대로 말하지 못하면 우선 내가 설득되지 않는다. 역사는 후세의 인간들이 의미있다고 여기는 것만을 기록하는 법이다. "가상역사 21세기"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앞서간 자이고, 나는 그것을 되돌아 보는 자의 시선으로 되짚어 보겠다고 나선 꼴이다.
문화나 예술이란 측면에서 나는 일정하게 엘리트주의자다. 문화와 예술 전반에 대해 엘리트주의를 자임하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문화와 예술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텍스트의 생산과정, 생산된 텍스트, 그리고 텍스트의 수용과정이다. 이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주장하는 엘리트주의는 텍스트의 생산과정에 있어서다. 그런데 이 때의 엘리트란 의미가 단순히 지식인이나 전문가주의로 환원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이때의 엘리트란 자신이 만들어내는 텍스트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는가로 따져야 한다는 것뿐이다.
어쨌든 "마이클 화이트, 젠트리 리"는 이 분야엔 나름의 쟁쟁한 이들일 거다. 최소한 나보다야 낫겠지. 게다가 이 책의 옮긴이 이순호의 역서들 가운데 나는 세 권의 책(옥스퍼드 세계 영화사,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문신 금지된 패션의 역사)을 가지고 있을 만큼, 공동번역인 첫번째 책을 제외하고, 후자에 속하는 두 권의 책, 그리고 이번의 책을 포함해서 옮긴이의 역량만큼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책의 공동저자들인 "마이클 화이트와 젠트리 리" 두 사람의 국적을 논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한 사람은 영국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국인인데, 이 두 사람의 국적이나 피부색과 상관없이 나는 이 두 사람이 앵글로 색슨의 지적 풍토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파악했고, 그런 관점에서 나의 견해가 옥시덴탈리즘적이란 비판을 들어도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 책이 바라보는 미래의 시선은 기본적으로 서구적이다.
다른 한 가지 짚어두어야 할 대목은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짓는다."는 오래된 명제(랄까)가 경제결정론의 오류에 빠졌다고 비판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 삶의 모든 걸 결정한다는 방식의 접근법은 기술결정론의 오류로 비판받을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도 그런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기에 과학이 인간 삶의 모든 걸 결정짓는다고 확언하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지난 20세기에 인간의 삶의 조건을 결정지을 수 있을 만한 기술 발전, 과학 발달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 중 대표적인 몇몇의 사례를 들자면 매스 미디어의 발전이라 할 수 있는 라디오, TV, 인터넷은 모두 지난 세기에 출현한 것들이고, 인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릴 수 있는 핵폭탄, 인간의 탄생부터 소멸에 이르는 전 과정의 핵심키라 할 수 있는 인간 게놈 지도의 초안이 발표된 것도 지난 세기인 2000년의 일이었다. 지구 인구가 60억을 돌파한 해는 1999년의 일이다.
그런 까닭에서일까? 아니면 저자들 자신이 과학 분야의 종사자들인 탓인지 몰라도 이 책의 1장은 "생물학 혁명", 5장은 "네트워크 세계에서의 삶", 그리고 6장은 "환경과 우주"에 할애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5장에 관심이 많았고, 재미있기로는 1장이 좀더 재미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 특히 2장 "핵전쟁"과 3장 "대혼란", 4장 "새로운 세계질서", 6장 "환경과 우주" 부분은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깨는 이야기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공동저자들이 프롤로그의 말미에 비록 '2112년 3월' 마치 먼 미래에 과거에 대한 역사서를 기술한 척을 하며 너스레를 떨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관점이 과연 그들 자신이 떨고 있는 너스레만큼 멀리 가 있는가를 반문해 본다면 나는 이에 대해 부정적이다. 도리어 어떤 부분들에서는 지금 현재 자라나고 있는 신세대들의 감각이나 느낌 보다 아니, 당장 내가 생각하는 어떤 위기 의식들보다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단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들이 제 아무리 미래의 인간인 척 너스레를 떨고 포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의 저자들은 나보다는 더 20세기를 오래 산 20세기의 인간들이란 한계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나 주장들이 기본적으로 앵글로색슨적인 시각이란 점에서도 증명된다. 나는 이 책에서 심지어 서구인들이 지난 18-19세기 동양, 특히 중국에 대해 품었던 일종의 "황화(黃禍, Yellow Peril)주의"가 미래학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본래 황화론이란 것은 19세기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서구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던 일본을 겨냥해 유포시킨 것으로 동양인의 힘이 커지면 과거 몽골의 징기스칸처럼, 혹은 자신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그러했던 것처럼 서양을 제국주의적으로 장악할 것이라며 주장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을 견제할 목적으로 주장했던 것이지만, 이런 주장들은 21세기가 된 오늘날까지도 일부 미래학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주장이기도 하다. 황화론의 대상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뀐 것은 최근의 일로 장차 중국 경제가 자본주의화되어 경제 대국이 되면 세계적인 재난이 초래될 것이라는 중국 위협론, 중국 경계론으로 등장한다. 이런 주장은 특히 중국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고 있는 서구, 특히 미국 보수 우파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주장이다. 최근 미국의 급격한 우경화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 이 책에서 중국은 미국을 젖히고 세계 최대 강대국으로 부상해 있다.
중국의 부상 때문인지 미국의 불행 때문인지 몰라도, 역대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지도자가 출현해왔다는(다소 낭만적인 관측이긴 하지만)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부통령은 위기 관리 능력이 부재한 데다가 연이어 닥친 대지진과 대공황으로 미국의 몰락이 시작된다. 갑자기 예전 어렸을 적 생각이 났다. 10년 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그해가 1980년 무렵이었던 듯 싶다. 그해 어린이 잡지 별책 부록으로 서기 2000년의 미래를 조망해보는 만화가 실려었는데, "쥘 베른" 같은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만화가들의 이런저런 미래 이야기들이었다. 서기 2000년 우리는 모두 공중부양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달과 지구 사이에 정기 항로가 생긴다. 생각해보면 달과 지구 사이의 정기 항로란 상상은 얼마나 기특한가. 그러나 우리가 우리 땅 독도를 여행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는 최근의 일들을 생각해보자. 일단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기 시작하면 세상은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해진다.
미래에 대해 말하는 건, 과거에 대한 확실한 이해, 현재의 과학 기술이 미래의 삶과 그 조건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과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오늘날 미국의 "레더넥(해병대)"이 점령하고 있는 땅들이 100여년 전엔 영국의 "레드코트(영국 보병들)"들이 점령했던 곳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어떤 곳들이 지정학적인 중요성, 전략적 중요성을 띠고 있는지를 파악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과거의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음을 깨우친다는 점에서도 역시 중요하다. 즉, 오늘날의 이라크 전쟁도 그렇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 속에는 이미 과거라는 역사적 근원에서 흘러나온 샘물이 한데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물길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과학기술이 미래의 삶과 조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상상한다는 것은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자면 과거의 주술이 현대의 과학과 본질적으로 흡사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야 한다.
처음 사진기술이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이것이 인간의 의식 변화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발터 벤야민 같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우라의 상실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이 우리들로 하여금 문화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갖도록 변화시킬지 상상할 수 있었다. 물론 마이클 화이트와 젠트리 리의 "가상역사 21세기"는 나름대로의 과학적 근거와 전망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묵시론적 예언서라거나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비서(秘書)는 아니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이들의 미래 예측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며, 그런 전망들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생생하게 전해오지 않는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환경오염 문제를 다루고 있는 그들의 시각이다. 현 시점에서 미국이 교토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은 것은 어쨌든 사실이고, 전세계 가솔린 소비량의 40%를 사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들이 미국의 이런 태도에 덜 비판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덜 신랄해보이거나 미래의 환경 오염 문제에 더 심각한 원인을 제공하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건 예측가능한 사실이긴 하지만 얄밉다. 환경 문제에 대한 해법의 한 가지처럼 제시되는 사건은 또 얼마나 낯간지러운 방식인지 모르겠다. 미디어 제국을 물려받은 한 자본가의 돌연한 회심으로 말미암아 전세계로 송출되는 환경홍보영화란 아이디어는 헐리우드식 해피엔딩을 보는 것 같다.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21세기의 문제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부의 분배 문제이고, 두 번째는 환경, 세 번째는 세계 최고의 강대국 중국과 연합한 아시아 국가들과 겨루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동맹간의 정치 문제다. 그런데 실제로 21세기인 현재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은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 그리고 에너지 문제, 부의 분배 문제일 텐데 이 책의 저자들이 제시하는 가장 극적인 부분은 생뚱맞게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전쟁 이야기고, 에너지 문제의 중요도는 상대적으로 작게 다뤄진다. 핵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한 인도 쿠마르 박사의 일기와 운동으로 전세계가 소유하고 있는 핵폭탄의 80%를 해체한다는 설정이다. 핵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인류가 각성하여 핵을 포기할 수 있다면 왜 1945년의 경험으로는 핵을 해체하지 못했을까?
저자들은 21세기의 어느 시기를 살아가는 개인개인을 적절히 등장시킴으로써 미래의 개인들이 그 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지 부각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역시 미래가 조지 오웰류의 디스토피아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그러나 미래가 과거로부터 흘러온다는 점을 이 책의 저자들은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과연 우리의 미래는 결정된 것일까? 그것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주장처럼 결정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그 미래를 결정하는 건 결코 미래에 대한 낙관과 희망의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낙관과 희망을 실천할 때 가능한 일이란 사실이다.
* 이 책에 대해 지나치게 혹독한 서평을 올리고 있단 생각도 들었다. 사실, 책은 나무랄 데 없이 잘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표지하며, 보기 좋은 레이아웃, 읽기 좋게 구분된 속표지들, 양질의 종이, 2도 인쇄, 500여쪽이 넘는 쪽수에도 정가는 15,000원에 불과하고(요새 책 가격을 생각해보라), 게다가 번역도 마음에 들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드림웍스'에서 가상다큐 제작중"이란 책띠까지(과연 만들어질지는 미지수지만) ... 양장본이 아니란 점을 제외하곤 단행본으로 누릴 수 있는 호사는 거의 전부 누렸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마케팅적 미래가 나 한 사람으로 인해 좌절되지 않길 바란다. 다만 읽을 만은 하지만 별로 권할 만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게다가 나 이전에 다른 분들이 이미 좋은 이야기들은 충분히 해주셨으니까. 나 한 사람 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올린다. 책은 참 잘 만들었지만, 결정적으로 필자들의 시선이 마음에 안 드는 걸 어쩌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