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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미자의 노래
임선기
시는 어디에서 오나요
시는 찾아가는 건가요 저렇게
창이 흐리고 비가 내리는데
시를 찾을 수 있나요
가라앉았던 먼지가
몇 줄이 되어 빨래처럼 널리는
행복한 시는
강가에서 가슴 온통
먹먹해서 말할 수 없을 때를
꿈꿀 수 있을까요
넓은 나뭇잎들이 소리 내는 때는
무척 적었습니다
그늘에서는 미동도 들리지 않고
후회에 싸인 날들이 있었습니다
시는 어디에서 오나요
천둥처럼 주위가 고독해지고
드디어 백지처럼 내가 놓일 때
당신은 쓰실 건가요
사는 유서 같아서 살구 떨어지듯
붉은 꽃 떨어지듯 당신 죽음에
흘러가면 들리는 건가요
아 나는 언제 언어에 말을 다는 날들이
무너지고 당신 곁에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고통 없이
그립습니다
● 임선기, 『꽃과 꽃이 흔들린다』, 문예중앙, 2012
지난 11월 5일,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사회적 참사, 어떻게 애도해야 하나”에서 영화평론가 손희정 선생이 선택한 영화가 이창동 감독의 작품 <시>였다.
나는 언젠가부터 좀비영화나 폭력이 스펙터클로 펼쳐지는 영화들을 즐겨보게 되었다. 이른바 평론가들이 좋은 영화라고 추천하는 영화들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한때는 나도 시네마 키드였다. 영화에 대한 꿈을 잠시 꾸었다가 접은 뒤로도 꽤 오랫동안 영화를 진지하게 보았었다. 그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은 뒤로도 한동안 내게 잔상(殘像) 같은 것이 남아있었나 보다. 지금도 일주일에 거의 매일 서너 편의 영화를 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영화들이 있다.
골치 아픈 영화라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고문’이나 ‘성폭력’ 장면이 주된 이야기로 등장하는 영화들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못 본 영화들이 꽤 여럿 된다. 이창동 감독의 <시> 역시 그랬다.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할 작품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들었다 놨다 하며 보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그나마 좋은 일은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영화 감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평론가들이란.
개인적으로 배우 윤정희 선생을 만나 뵌 적은 없지만, 나에게 그 이름은 조금 특이하게 기억된다. 태어나서 처음 본 영화는 <태권 브이>였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처음 울었던 영화는 윤정희 선생이 주연으로 출연한 <모범운전사 갑순이>(1972)였다. 국민학교 4~5학년 무렵 우연히 TV에서 해준 영화였는데, 그저 심심한 마음에 넋 놓고 보다가 어느 장면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영화를 보다 왈칵 울어 버렸다. 게다가 이형표 감독의 1972년작인 이 영화는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코미디 영화였다. 아마도 6·25전쟁 때 헤어진 딸을 찾는 아버지와 그 딸이 만나는 장면이 내 감정을 건드렸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장면에 유난히 약하다.
가장 마지막에 나를 울린 영화도 윤정희 선생이 출연했다. 2010년의 영화 <시>를 방송을 위해 보다가 울었으니 말이다. 영화 <시>는 ‘밀양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미자(윤정희)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는 손자가 사건과 연루되어 있었는지 미처 몰랐을 때는 죽은 딸 때문에 정신을 놓은 피해자 엄마를 바라보며 단순한 호기심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눈치 없이 사연을 꼬치꼬치 캐묻는, 조금은 반푼수 같고, 때로 주변의 문예교실 같은 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소녀 취향을 미처 벗지 못한 순진무구한 할머니다. 미자는 같은 학교를 다니는 손자에게 그 소녀가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 물어본다. 호기심(好奇心)이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마음이다. 그 와중에 미자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자는 의사와 상담 중에 ‘동사’는 기억나는데, 자꾸만 ‘명사’가 사라진다고 말한다.
‘명사’가 사라진다는 것은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고,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미자의 세계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미자는 어려서부터 시를 써보고 싶어 했고, 뒤늦게이긴 하지만 마을 문예센터에서 열린 시창작교실에 입회하여 시를 써보기로 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세상을 잘 봐야 하고 일상의 삶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아야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겉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서 ‘김용탁’ 시인으로 출연한 시인 김용택 배우의 말이다. 세상이 점점 사라지고, 세상이 점점 좁아지고, 세상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미자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 무렵 미자는 소녀의 투신자살 사건에 자신의 손자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야 미자는 이 일이 비로소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로 다가온다. 손자의 친구들도 집단으로 연루된 사건이었기에 가해자의 보호자들이 모여 이 사건을 어떻게 덮을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미자에게는 너무나 거금인 500만원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이창동 감독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관객들에게 질문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미자는 5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그녀를 성추행하려고 했으나 실패해 다시는 안 보기로 했던 강 노인(김희라)에게 돌아가 몸을 허락한다. 돈을 마련한 미자는 그 돈을 가해자대책모임에 건네고 한 편의 시 <아녜스의 노래>를 쓴다. 그리고 미자는 이 사건을 그대로 덮는 대신 손자를 경찰에 신고한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자가 소녀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사회자는 나에게 이 영화에서 ‘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나의 말을 대신해 한나 아렌트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을 세상과 자연, 우주에 대해 함께 기뻐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여길 때 비로소 우리의 인간성이 유지될 수 있다.” 시는 자신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낄 때 탄생한다. 이 영화에서 ‘시’는 한 인간의 성장이자 속죄이며 동시에 우리가 인간성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버팀목으로서의 공감과 존엄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했다. 임선기 시인의 이 작품 <시 – 미자의 노래>는 검은 강물 위로 둥둥 떠내려 오는 소녀의 시신을 비추듯 하나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시는 어디에서 오나요” 이후의 과정 “시를 찾을 수 있나요”는 소녀의 죽음을 둘러싼 원인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비로소 등장하는 “시는 유서 같아서 살구 떨어지듯/ 붉은 꽃 떨어지듯 당신 죽음에/ 흘러가면 들리는 건가요”라고 묻는 것은 결국 마지막의 진술을 위한 것이다. ‘살구’와 ‘붉은 꽃’ 모두 영화 속에 등장한 이미지들이다.
고통 없이
그립습니다
‘고통이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역설적이지만, 이 시에서 가장 탁월한 대목이다. 이창동 감독이 그러하듯 임선기 시인 역시 영화에 몰입하지만, 매몰되지 않고 거리를 둔다. 소녀가 돌아보기까지 냉정하게 미자의 뒤를 쫓는 감독의 시선처럼 마지막 구절에 가서 시인은 ‘그립다, 그리운데 고통이 없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진실일까. ‘고통’이란 감정의 동요, 울림통의 공명이 없었다면, 시인은 이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지 않았다면 이 긴 이야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구절은 차라리 참회(懺悔)와 회한(悔恨)을 말한다.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인은 그립다. 고통 없이. 시를 찾아가는 미자가, 아녜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