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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밭에 서서
: 평창을 돌다가 1
― 최문자
깊은 산에 와서도 산보다
무밭에 서 있는 게 좋아
푸른 술 마시고도 흰 이빨 드러내지 않는
깊은 밤의 고요
그 목소리 없는 무청이 좋아
깨끗한 새벽
저 잎으로 문지르면
신음소리 내며 흘러내릴 것 같은 속살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도
그때마다 흙속으로 하얗게 내려가는
무의 그 흰 몸이 좋아
땅속에 백지 한 장 감추고 있는 그 심성도 좋아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 같은
배 불러오는 무청의 둥근 배가 좋아
무 밭을 걷는 게 좋아
내 정강이 툭툭 건드릴 때 좋아
뽑으면 쑤욱 뽑힐 것 같은
철없는 그 사랑이 좋아
● 무서리를 해본 적이 없다. 사실 무밭에 서 본 적도 없다.
아이를 차에 태우고 지나가며 먼발치에서 남의 밭을 바라보며 저게 무래, 저게 당근이래, 저건 고추야, 저건 가지일 거고 그런데 저건 양파일까? 마늘일까? 대파일까? 저건 잡초일까? 아니면 감자? 남의 밭을 지나가며 아이에게 채소의 이름이라도 알려주고파서 하나둘 이야기하다보면 금세 아는 이름이 사라진다. 근 반 세기 동안 매일 같이 그것들을 먹었겠지만, 정작 그것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것들을 생명이라고 여기며 살펴본 적이 없다.
최문자 시인은 깊은 산에 들어서도 산 경치를 보고 경탄하기보다 무밭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좋아하는가보다, 시인에게 무밭은 자연과 대지가 에로스의 생명으로 차오르는 경이로움 그 자체다. “밤마다 잎에다 달빛이 일 저질러놓고 달아나도” 흰 무는 흙속으로, 흙속으로 내려가 차오른다. ‘신음소리, 속살, 흰 몸, 둥근 배’는 자연스럽게 생명의 탄생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엔가 툭하고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로 연결된다. “달빛이 놓고 간 편지 한 장 들고”라니 얼마나 대책 없는가.
전체적으로 부드럽게 자연의 서정으로 이어지던 시어의 전체 분위기에 비춰봤을 때, 사실, 이 구절은 ‘엊맞은’ 못처럼 보인다. 자칫 예민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시 전체의 핵심이고, 폭발점이다. “무작정 애를 배는 대책 없는 미혼모”라니 그러나 이 자리에 정치나 사회적 통념 따위가 들어설 곳이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시인에게는 그것이 생명이고, 생명이 자란다는 일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이 말하는 ‘미혼모’란 표현은 도리어 이 못된 사회, 임신과 출산을 사회적 노동력, 인력재생산이라든지 국력이라든지 따위와 결부시키는 행위에 대한 ‘퉁박’으로 들린다. “예끼, 이 못된 것들아~ 봐라 이 얼마나 떳떳하고 아름다운 일이냐”고 말이다.
달빛이 밤마다 일 저지르고 가는, 뭇 생명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자라나는, 그곳에 서서 시인은 철없이 그 사랑이 좋다고 말한다. 사랑이면 되었지, 우리가 함께 살면 되었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에 미혼, 비혼, 기혼, 입양을 따질 필요 있냐는 듯, 그렇게 싱싱한 삶이 계속 되면 되었지. 대지가 언제 애비에미를 묻고 따지더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