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참 과거를 거슬러 오르던 그가 뜬금없이 “내가 30년 가까이 운동 언저리에 있었는데 『전태일 평전』을 읽은 건 5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라고 말한다. 대학 나온 친구들이 『전태일 평전』을 읽고 감동받았다면서 전태일을 신성시할 때면, 그는 “전태일이 뭐가 대단해?”라고 응수했단다. “걔가 여공들한테 빵 사준 거밖에 더 있어? 그 정도 마음 따뜻한 형이나 오빠는 당시 공장에 많았어.”
그런데 5년 전 지방선거에 나왔다 떨어진 후 대형 마트에서 일하던 지역 후배가 보자더니 그에게 『전태일 평전』을 건넸다. 그는 이번에도 안 받는다고 했다. 후배가 손이 부끄럽다며 억지로 떠넘겨 집에 갖고 와서는 화장실에 처박아뒀다. 서너 달을 묵혔던 책을 무심코 펼쳐든 그는 화장실을 떠나기가 힘들었다.
“그때야 알았어요. 그 양반이 한 ‘나에게도 똑똑한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말은 절규였다는 걸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좀 해보려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에 비해 난 정말 행복한 놈이었던 거죠.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도와줄 애들이 수두룩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 양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도 죄스러워지더라고요.”
- 신정임, 『30년 전 구로의 기억 속에 사는 남자 - 최광신 씨』, <삶이 보이는 창>(2014년 05·06월, 통권 98호), 121쪽 중에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금 나는 책에 대한 기억을 통해 역사를 기억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었던 시절, 책이 나를 만들었던 시절을 기억해냄으로써 지금 내가 책을 만들고 있는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담고 싶다.
"전태일"은 70년의 사람이다. 그를 통해 70년대의 대학생들은 전태일 곁에서 그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전태일 평전"은 1983년에 초판이 나온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전태일은 70년대의 사람이다. 조영래 변호사가 이 책을 쓰던 당시는 민청학련 사건 이후 수배 상태에서 3년여의 기간 동안 각고 노력을 기울여 쓴 책이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 잊을 수 없는 또 한 권의 책이 있다. 1985년 5월 20일 발간으로 되어있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그렇다. 물론 두 책의 발간연도로 보면 모두 1980년대의 일이지만, 전태일이 70년대를 규정했다면, 광주는 80년대를 규정했다. 물론 전태일의 저 정신과 영혼은 1980년 광주의 밑바탕을 이룬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라고 했던 전태일의 마음은 그날 광주의 새벽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여학생의 절규 속에도 녹아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