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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必死)의 탐독
―전성원, 『길 위의 독서』(뜨란, 2018)에 대하여
박형준
처음은 늘 막막하고 두렵다. ‘이 한 권의 책’이라는 꼭지를 통해 우리 생의 문화적 자원이 되는 책을 소개하기로 했지만 쉽지가 않다. 책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하는 일은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다행스러운 것은, 원고 마감을 며칠 앞두고 독자와 함께 나누고 싶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바로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인천에서 발행하는 종합인문교양지 『황해문화』의 편집장이다. 그는 이십 년 넘게 지역에서 잡지를 만들어왔고, 또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해 오기도 했다. 『길 위의 독서』에 수록된 글(들)은 각종 지면과 사이버공간에 개재되어 있던 원고를 간추리고 매만져 재탄생한 창작물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글의 종류와 범위는 매우 광범위하다. 시나 소설과 같은 전통적인 문예 장르는 물론이고, 인문학과 사회과학, 증언과 사진, 동화와 만화 갈래까지 포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특정 분야에 국한되거나 치우치지 않는다. 저자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예술 등의 영역을 자유롭게 횡단하면서, 인간 존재의 가치와 생(生)의 심연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독서를 통한 자아 탐구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삶을 입안하고 존속시키는 타인과의 관계 구성과 사회역사적 담론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다.
『길 위의 독서』는 책을 통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되묻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독서 입문서’나 ‘교양 교본’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 책의 구성은 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1부 ‘자기 성장의 길’로부터 시작하여, 2부 ‘타인의 고통’과 3부 ‘시대와의 공명’을 거쳐 4부 ‘다른 삶의 가능성’에 이르는 다층적인 독서 기록은 가히 압도적이다. 탄생과 소멸, 계급과 젠더, 세대와 지역, 분단과 평화, 민족과 문화, 자본과 노동, 원전과 희생, 침묵과 저항, 사회적 참사와 진실 은폐 등, 저자는 방대한 문헌(text)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고 사유하게 한다.
허나, 이 책이 독자에게 주는 통찰과 울림은,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지 않다. 보통의 서평(집)이 대상 도서에 대한 정확한 내용 이해나 장점 소개에 그치는 데 비해, 『길 위의 독서』는 아주 적극적인 텍스트 해석과 인간사적 가치 부여를 바탕으로, 독서 과정 자체를 수동적인 ‘정보 이해(decoding)’의 차원에서 생산적인 ‘의미 구성(Reading)’의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한 예로, 조갑상의 『밤의 눈』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여기에 사람이 있다」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독후감적 글쓰기가 어떻게 비평(criticism)적 사고로 확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 케이스가 된다.
저자는 『밤의 눈』이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가 말하기, 글쓰기 방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현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실례”라고 평가하면서도, 한국전쟁 기간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복원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양민의 희생/재현’에 집중되다 보니, 부역자나 예비 검속 대상자와 같은 ‘비-양민’에 대한 불법적 제노사이드 문제가 “약하게 처리”되거나 “누락”되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 있다. “양민이 아니”라 “부역자나 공산주의자라면 아무 죄 없이, 또는 재판도 없이 불법적으로 학살당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직핍한 물음은, 지금까지 『밤의 눈』을 다룬 어떤 평문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적확한 비평이다.
전성원의 비평적 독서는 분단국가의 냉전적 사고체계와 사회적 금기에 파열음을 내는 것과 함께, 공동체 내의 소외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국민국가 내에서 ‘포함된 배제’의 상태로 살아가는 비가시적 존재와 자리를 응시하고 있는 글 「배제할 것인가 연대할 것인가」나 「부정당한 존재를 위한 진혼곡」 등은 이를 잘 보여주는 증례이다. 표지에 기입되어 있는 ‘바람구두 인생서평’이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 『길 위의 독서』는 단순한 서평 선집이 아니다. 이 책은 1987년 6월 항쟁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경험해야 했던 한 인간의 고단한 인생 역정인 동시에, 좌초한 혁명의 대오 속에서도,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길 위’로, 혹은 '바람' 속으로 자신을 유배시킬 수밖에 없었던 외로운 망명자의 처절한 양심/기록이다.
바람구두 전성원의 ‘인생서평’은 그래서 필사적이다. 그에게 읽고 쓴다는 것은, “더러운 허위의식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인간적 가치와 저항 정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기 성찰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읽고 쓴다. 『길 위의 독서』가 보여주는 고독한 방랑의 여정은,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이 어떻게 삶의 진경(眞境)에 이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
(※ 이 서평은 『봉생문화』68호 "박형준의 ‘이 한 권의 책’" 코너에 수록된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