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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이라는 인류의 커다란 문제”
1.
“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이라는 인류의 커다란 문제”는 폴라니의 화두일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당대 지성들이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로 꺼낸 주제이기도 하다. 폴라니와 함께 『공존』이라는 저널 발간을 추진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먼슬리리뷰』 창간호에 발표한 저 유명한 논설 “왜 사회주의인가?”의 결론이 바로 경제 계획 확대와 민주주의를 조화시켜야 한다는 요청이었다.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유명한 E.H.카도 1951년 저작 『새로운 사회』에서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다.
(……)
이런 공통된 문제의식 아래 폴라니가 내놓은 마지막 강조점이 『인간의 살림살이』 제2부에 녹아있다. 그는 “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이 구체적인 제도 형태를 통해 최적 조합을 이룬 사례로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 주목했다. 물론 아테네 민주주의는 가부장제와 노예제, 제국주의라는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 시기 인류의 전반적 수준에 견줘 월등히 앞서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국왕이나 독재자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자유와 평등을 체현한 집단 주체(아테네 시민)를 키워냈다는 점이 놀랍다. 폴라니는 그 토대에 바로, 막 성장 중이던 시장, 상업을 도시국가 주도의 호혜, 재분배 활동과 결합시킨 페리클레스 등 민주파의 경제적 성취가 있었음을 밝힌다.
이것은 2,500여 년 전 이야기다. 지금 우리의 강령을 끌어내기에는 너무도 먼 사례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고민과 상상이 어디에서 출발해야할지 짚기에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가 던져야 할 물음이 무엇인지 더없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시민들이 마치 고대 아테네 시민처럼 자유와 평등의 삶을 만들어가려면 “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의 어떠한 구체적 조합이 필요한가? 이 물음에서 가장 중요한 척도가 시간(노동시간/자유시간)이라 지적한 것은 마르크스의 가장 소중한 공헌이고, 마르크스와 폴라니의 공동후계자라 할 만한 앙드레 고르 같은 이들의 기여이기도 하다. 이를 반영해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민주공화국의 실질적 주권자 시민이도록 자유시간을 평등하게 보장할 경제 제도들의 조합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죄악은 자기조정시장 유토피아 운동의 헛된 부활을 내세워, 인류가 이 물음과 대면할 기회를 한 세대 이상 뒤로 미룬 것이다. 이 낭비의 세월을 지나 마치 병 속에 담긴 편지처럼 칼 폴라니의 마지막 저작이 대양을 떠돌다 새 번역으로 우리 해안에 닿았다. 이제는 미루고 미뤘던 길 찾기에 다시 나서야 할 때다.
장석준, 「신자유주의 격랑 뒤에 우리가 대면해야 할 ‘병 속 편지’」, 『시민과 세계』(2017년 하반기호) 중에서
2.
놀랍게도 고민하고 있는 과제뿐만 아니라 어떤 이들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해석까지 겹치는 걸 느꼈다. 반가운 마음이다.
얼마 전 켄 로치 감독이 제작한 「1945년의 시대정신(The Spirit of '45)」이란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전후 영국을 배경으로 노동당이 집권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사상, 제도, 일상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역시 거장은 무엇을 해도 잘한단 생각이 들만큼 훌륭한 다큐멘터리였다.
“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이라는 인류의 커다란 문제”
전쟁은 인간이 조직해낼 수 있는 가장 큰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어떻게 그 승리 직후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오랫동안 나에게 남았던 의문 중 하나였다. 전쟁은 자유주의 정치사상이 지배하던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다. 영국 국민들은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의 가혹한 폭격에 시달렸다. 하지만, 중앙집중화된 경제 계획과 배급제는 과거의 영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노동자와 빈민들에게도 국가(제도)에 의한 사회복지 혜택으로 전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영국의 중산층 이상 자제들이 전쟁터에서 몰살되자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영국 노동계층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도저히 전쟁에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신체와 건강 상태에 처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영국의 보수당 정부는 계획 경제와 배급제를 실시했고, 젊은이들은 병영에서 교육받았다.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에 반감을 느낄 수도 있겠으나 이들 빈곤층 젊은이들로서는 생애 최초로 공교육(군대)을 받은 이들도 있었으며, 병사사회 내부에서만큼은 사회적 계급이 아닌 군대 내 계급이란 평등한 사회를 맛보았다.
전선의 병사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진지한 계획을 가지고 병사들끼리 학습하고 토의를 이어나갔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전쟁은 언젠가 끝날 것이고, 전후에 지난 전쟁(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와 마찬가지로 실업과 빈곤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전후 영국의 시민들은 노동당을 선택한다.
3.
그러나 전후 영국과 미국의 선택은 많이 달랐다. 아마도 그들이 처한 역사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같지 않았기 때문일 테지만, 전후 미국은 중소기업이 몰락하고, 대기업으로 사회적 부가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이후 영국 노동당 정부가 걸어간 길이 성공적이기만 하진 않았다. 하지만 켄 로치는 “자유와 중앙집중, 자발성과 계획성이라는 인류의 커다란 문제”를 영상을 통해 대비시켜 준다. 책만 구입해두고 오래도록 미뤄두었던 칼 폴라니를 읽어야 할 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