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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me too'가 '구체적인 실명 주체(개인)'를 호명해내어 비판하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방향으로 오해한다면, 그것은 일반인들에게 자칫 불법유턴하다가 재수 없게 나만 걸린 사람의 변명거리로 전락할 위험을 가지게 된다. 그와 반대로 'me too' 운동에 대한 불편함을 이야기하면서, 예를 들어 '문단 전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류의 호도와 볼멘소리에 반대한다. 이 역시 '구체적인 실명 주체'만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
어떤 '전위', '아방가르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일부 예술가와 비평가들은 예술의 초월성에 주목한 나머지 예술이 지역과 역사와 무관한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가치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역사라는 시간성과 지역이라는 공간성 또는 장소성 등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이번 서지현 검사, 최영미 시인 등을 통해 재점화된 'me too' 운동(이미 1년여 전부터 해시태그운동이 있었다)의 당사자들은 물론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 역시 별개의 세계 속에 외따로이 존재하는 돌출된 인물이나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면에 숨겨진 진면목을 드러낸 사건의 전형이자 전위이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문단'이라는 특정한 세계의 구성원들에게만 해당하고,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라는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 세계의 문제이다. 다만, '출판계, 언론계, 예술계, 의학계, 법조계, 교수사회' 등등 우리가 하나의 '계(界)'라고 분류하는 독특한 영역을 지닌 이들은 때로 전체, 외부세계의 자전과 변화의 시간과 다른 세계 -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기에 - 를 살아간다. 문학계를 의미할 때 종종 사용하는 문단(文壇)이란 말의 단은 '제단'과 동시에 '기초가 되는 터전'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좀 더 견고하게 맞물린 별도의 세계인양 느껴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한국문학의 세계문학화라는 과제는 근대의 문 앞에서 좌절했던 기억을 가진 우리 사회 전체의 콤플렉스이자 그만 털어낼 문제라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은 그런 콤플레스(과제) 안에도 우리 사회가 문학과 예술을 올림픽 치르듯 위계를 매기고, 대표 선수에게 모든 공력을 몰아주는 성과주의에 함몰된 모습이 엿보인다. 대표 선수를 내세웠으니 그는 이미 개인이 아니라 우리 문단의 어른, 우리 문학의 얼굴이며,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최고 존엄이 되는 것이다.
서구 부르주아 예술의 영감은 언제나 낮은 사람들의 시간과 감성을 착취한 결과였다. 오늘날 미국의 대중문화, 월드뮤직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와 같은 증거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서구 부르주아 세계의 예술가들이 그들만의 시간에 갇혀 있지 않고, 변화하고 갱신(更新)하려고 분투한 노력의 흔적이며 그와 같은 의미에서만 그들이 세계사적인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특정한 세계, 우리가 하나의 '계(界)'라고 부르는 독특한 영역을 구축한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월드)’에서 높은 담을 쌓고 변화를 거부하는 양상을 보인다. 지금 ‘me too’운동과 페미니즘과 젠더 감수성이 불러일으키는 불편함은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문학이란 이렇다. 이래야 한다, 예술가는 이렇다, 이래야 한다'는 19세기적 예술관, 민족주의적 근대의 가치만으로도 지금까지 편하게 살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물론 루쉰의 비유대로 깨어난다 한들 깨부술 수 없는 '쇠로 된 방'이 한국의 오늘일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잠든 채로 머무른다면 ‘확실한 죽음’ 이외의 것은 남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술가란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사회적 언어와 매너'로 상징되는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자들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저항의 대상이 약자라면 그는 지배질서의 일부분이며, 지배질서를 강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가 자칫 착각하기 쉬운 것은 'me too'운동이 지목하는 '구체적 실명주체'가 특정한 개인인 동시에 특정한 개인이 아니듯, 'me too' 운동의 고발자 역시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구체적 실명주체'의 모습일지라도 그 자체가 개인이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란 점이다. 가해자에게도 존중받을 업적과 가치가 있듯 고발자 역시 당연히 개인적 약점이나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판에 대한 반론이나 옹호를 위해 이것을 들추어 가며 가해자를 옹호하는 행위는 우리 사회의 모든 고발, 비판의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무화(無化)시키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이번에 펴낸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스튜어트 홀이 창안한 문화연구의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란 개념을 우리말로 ‘분절分節’ 또는 ‘절합節合’이라 부른다. 따로 떨어진 듯 보이는 마디(의미)와 마디(의미)가 관절처럼 붙어 있으면서 하나로 작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하프시코드harpsichord 또는 쳄발로cembalo라고 불리는 고악기古樂器 연주를 들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쳄발로는 피아노와 흡사하게 생겼지만 현絃을 해머로 치는 피아노와 달리 현을 퉁긴다. 피아노 같은 페달이 없기에 아티큘레이션과 프레이징phrasing만으로 음악을 표현해야 한다. 음원이 진동을 멈춘 뒤에 들려오는 잔향殘響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 책에 담긴 나의 이야기들도 그와 흡사하다. 책을 악보 삼아 ‘나’란 존재를 울림통(공명통共鳴筒) 삼아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담았다. 나를 관통하며 그 안에서 공명했던 이야기들이다. 미약한 잔향과 공명은 복잡한 사유의 결과물이지만, 글쟁이가 하나의 단어를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지나치게 선명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저자와 독자는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며, 글과 글 사이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수많은 웜홀worm hole이 있다." - 전성원, "길 위의 독서" 서문 중에서
고민과 정념은 여러 갈래로 춤을 추고, 미약한 잔향에 귀 기울이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는 일 역시 멈추지 않겠지만, 어느 순간, 내가 누군가의 곁을 지켜야 한다면 비록 지나치게 선명하다는 오해를 받게 될지라도 나는 잃을 것이 많은 사람보다 잃을 것 없는 이의 곁을 지키고 싶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