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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
우리는 보통 실내에서 책을 읽는다. 집에서, 도서관에서,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강의실과 카페에서, 병원 대기실이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가끔 잔디밭이나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호사를 누리기도 하지만, 비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책을 펼쳐 드는 일은 없다. 책은, 응시하는 몸은, 지붕 아래 놓인다. 벽 안에 머문다.
계간 <황해문화>의 오랜 편집장이자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홈페이지(라기 보다는 떠도는 영혼들의 디아스포라였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의 주인장 전성원 선생의 새로운 책 <길 위의 독서>를 읽었다.
2000년대 초 <망명지>에 처음 접속했을 때, '오 엄청난 프로젝트네. 어떤 사람들이 이런 멋진 작업을 하고 있는 거야?'라며 감탄했다. 20세기 문화사를 꿰뚫는 인물들을 망라하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서술에 깊은 통찰이 담겼기에 도저히 한 사람의 노동으로 일군 공간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문화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자 조건"(290쪽)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문화망명지>를 만든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문화를 제대로 살피기 위해선 내면의 시선도 필요하고, 외부의 시선도 필요하며, 좌와 우의 시선도 필요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은 매우 다양해서 망원경으로 볼 수도 있고, 현미경으로 볼 수도 있다. 나만의 시선도 필요하지만 때론 남의 시선을 빌려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모순이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겹눈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의 속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세상의 이면을 살필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만든 것이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였다." (291쪽)
'바람구두'의 지적 성실함과 치열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무엇보다 내게 큰 영향을 준 것은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결코 ‘나 여기서 이렇게 대단한 일을 하고 있소’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얼굴을 내밀기 보다는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헤어진 구두의 뒷굽을, 무엇보다도 오랜 여정이 남긴 촘촘한 발자국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쉼없이 망명지를 가로지르는 고단한 뒷모습 말이다.
하지만 그의 등이 쓸쓸한 것만은 아니었다. 20세기를 거쳐간 수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스며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모습은 보는 이들을 그 사람에게로 끌어들이지만, 뒷모습은 보는 이들을 그가 향하는 세계로 초대한다. 아울러 그가 밟아온, 또 나아갈 궤적을 그려보게 한다.
그가 공저자이면서 서문의 저자로 참여한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가(낮은산)>의 다음 구절이 마음에 남아서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그에게 독서는 '망각에의 저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류의 사유란 이처럼 죽음의 자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례 문화는 단순히 공동체 주거공간 주변의 위생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오늘(현재)’이 아닌 ‘내일(죽음 이후의 세계)’을 상상하는 힘이 나타난 결과라는 것이다.” (121쪽)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내일(미래)’의 발명을 든다. 여기에서 내일이란 “객관, 물리적 의미의 시간, ‘크로노스(chronos)’일 뿐만 아니라 주관, 감정적 의미의 시간, ‘카이로스(kairos)’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시간을 감지하고 의식하는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절대적 시간이다.” (120쪽)
즉,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고 내일을 ‘발명’함으로써 사유를 탄생시키고 의미를 만들어 왔다. 인간다움은 삶의 속절없는 유한성을 직시하고, 함께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의미있는 생각을 공유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는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 그의 말을 빌리자면 '생업(生業, life work)'으로 읽고 쓰며 책을 만드는 일을 택했다.
저자가 글과 삶의 관계에 대해 갖는 태도는 책의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평소 내가 그에게 받았던 느낌과 가장 잘 조응했던 것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쓴 <옥중수고>의 다음 대목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도덕적 힘의 근원이 자기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의 활력과 의지, 목적과 수단의 긴밀한 결합--는 확신을 갖고 결코 좌절하지도 않고, 결코 통속적이고 진부한 기분이나 비관주의와 낙관주의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나 자신의 마음 상태는 이 두 가지 감정을 모두 종합하고 그것들을 넘어서고 있지. 나의 지성은 비관주의적이지만 나의 의지는 낙관주의적이란다. 어떤 상황이건 나는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데 내가 비축해놓은 의지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단다. 나는 절대로 환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실망하는 일도 없어." (298쪽)
비관과 희망, 낙관과 의지에 대한 그람시의 관점은 전성원 선생이 글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나는 인간이 글을 쓰는 행위도 이와 같다고 여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에 절망하면서도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는 행위이며,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의지이다." (299쪽)
글을 쓴다는 것이 왜 세계에 절망하는 일인가? 답변의 실마리는 그의 역사관에서 찾을 수 있다. 그에게 "왕조의 역사는 당대의 역사이지만, 민중의 역사는 내일의 역사"이다. (299쪽) 왕은 권력을 통해 자신의 삶을 역사로 명명하지만 민초들의 삶은 망각을 강요하는 힘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역사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중의 싸움은 당장 눈앞의 변화를 확신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변화의 씨앗이 내일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으리라는 희망에 터한다. 허나 희망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의지만이 우리에게 다른 내일을 허락한다.
그런 면에서 그의 글쓰기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아직 살아보지 못한 인생'에 대한 글쓰기다. 내외부와 좌우를 가로지르는 문화연구자로 살아가지만, 그의 자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아니 존재가 지워져 버린 이들 곁이다. 지붕도 없고 벽도 없는 영원한 망명지의 벌판이다.
책을 읽는 행위에 높고 낮음이 있을까마는 관조하는 독서와 분투하는 독서, 동조하는 독서와 저항하는 독서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지적 산물에 대한 향유로 향한다면 후자는 모든 것을 먹어치우려는 망각의 힘에 맞선다. 그래서 그의 글읽기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아니, 길 위에서 읽는 행위 외에 독서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는 다음 문장으로 응축된다.
"오로지 길 위에서 읽은 책들만이 진짜 인생의 길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젊은 시절 '왜 글을 쓰는가'를 주제로 써낸 글을 옮겨 본다.
"세상의 익명성(匿名性)에 도전하고 싶다. 갈대의 뿌리를 손쉽게 캘 수 있다고 생각한 착각이 지하의 세계에 감금된 뿌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면, 인간 사유의 뿌리를 더듬어 보겠다는 나의 욕망과 그것으로부터 시작된 세상을 측량해보고 싶다는 나의 거친 야심은 한낱 부질없는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더러운 허위의식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욕보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희망을 지키는 것보다 더 힘이 든다. 때로는 희망이 사람을 망친다." (89쪽)
그는 여전히 매일 읽고 쓴다. 왜? 독자의 특권인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솔직히 말하면 저자에 대한 ‘오해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그의 이야기로 답하고자 한다.
"오늘도 나는 희망도, 기대도 없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허망한 짓을 왜 하느냐고 묻는다면, 사랑하는 일마저 멈춘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되묻고 싶다. 그때그때 최선을 다하고 시시한 후회 따위는 하지 않는 것, 어차피 사람은 그 정도 일밖에 할 수 없다. 사랑하라!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37쪽)
그렇다. 그는 오늘도 쓴다.
'희망도 없이, 말도 없이' 사랑하기 위해서.
덧.
논문과 개인서사(personal narrative)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전자가 참고문헌에 기반한 텍스트임에 반해 후자는 기억을 엮어낸 이야기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이런 구분을 훌쩍 뛰어넘는다. '바람구두 인생 서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길 위의 독서>는 수많은 책들이 엮이고 엮여 하나의 인생을 만들어 온 이야기다. 참고문헌이 모여 한 인생의 내러티브를 이루는 셈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