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엊그제 세월호 활동가 '캔디 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변호사 겸 전 서울시 교육감 후보였던 '고승덕'의 인간됨됨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 헤어져 자라야 했던 '캔디 고'의 삶은 일정하게 나와 겹칩니다. '캔디 고'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싶지만,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상황은 어쩔 수 없군요.
물론 나의 아버지는 나와 내 누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살아보려고 했지만 죽었고, 어머니는 그보다 조금 일찍 누이와 나를 떠났을 뿐입니다. 외가가 아닌 친가에서 성장하며 나와 누이는 어머니에 대해 친가 쪽 일가붙이들이 늘어놓는 험담을 들으며 자라야 했습니다. 만약 외가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그 반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자식을 버린 어미에게 자식들이 애틋한 감정이 남아 있을 리는 없지만, 친가 쪽 친척 어른들의 험담에 무조건 공명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더도 덜도 아닌 그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심리학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 놓인 자식의 심리를 뭐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자식을 낳은 어미가 자식에게 품는 심리, '이중구속(double bind)' 같은 상황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화 속 소공자, 소공녀는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또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의 부재로 인해) 갖은 고생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부모의 부재 상황을 해소하거나 부모를 이해(화해)하게 되지만, 현실의 '소공자, 소공녀'들은 대체로 그런 행복한 경험을 누리지 못합니다. 판타지는 아름답고 극적이지만,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기에 지옥도이지요.
'캔디 고'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버지 고승덕, 아니 '그 사람'은 "어릴 적 아버지와 둘이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쓰레기를 줍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저런 일 하고 싶지 않으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저런 불쌍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면' 이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남을 자신보다 낮게 보고 그런 말들을 자주했다. 그 사람에겐 그 일이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우리 각자 모두가 사회에 주어진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그 사람은 내가 위에 있으니 내 밑에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굉장히 견디기 힘들었다."
캔디 고의 발언(고발)은 분명 공적인 것이지만, 그가 생물학적 아버지를 고발하는 행위는 사적인 감정과 공적인 분노가 뒤섞인 것이었겠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의 우리는 매우 복잡한 중층의 결정을 내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교육감 선거 이전에도 공직 생활을 했다. 하지만 교육과 관련한 자리에 좋은 교육을 제공할 수 없는 사람이 선출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녀 교육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것을 떠나 사람과 교육을 생각하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도 서울 시민을 위해서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인터뷰를 읽는 동안, 캔디 고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품고 살았을지,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아버지의 유전을 받아 굉장히 고집이 센 사람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독립적이다. 엄마도 나에게 어떠한 공부나 과외도 강요하지 않았다. 주입식 교육보다는 자유롭게 교육받길 원했다."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보통의 평범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사람들이라면 평생 잘 해야 한 번이나 고민해보거나 한 번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핏줄이라는 연좌제에 얽힌 탓이지요. 만약 캔디고나 저 같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나만 겪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거나 거기에 안주해 버린다면 평생 성장할 수 없는 네버랜드에 갇히겠지요. 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한 번은 네버랜드를 떠날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누구나 그처럼 고통스러운 성장통을 겪게 됩니다.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11세 소녀는 어느새 미국에 정착한 한인 청년이 됐다. 20여 년 동안 미국 땅에서 지냈다."
내 아버지는 4.19세대입니다. 그는 한국이 싫었고, 실패한 결혼생활이 부끄러웠기에 그 시절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었지만 고작 일곱 살 무렵의 어린 자식을 두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노동이민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누이와 저를 불러들일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탓에 나는 한글 자모와 더불어 영어 알파벳을 동시에 배웠습니다. 조만간 나도 그 나라에 갈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버지는 불행히도 갑자기 암에 걸렸고, 나와 누이의 미국행도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 나이 10살 되던 1979년 겨울, 돌아가셨습니다.
엊그제 읽은 고승덕의 말 "저런 일 하고 싶지 않으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저런 불쌍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으면"과 오늘 아침 안철수가 트위터에 올린 말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합니다. 조금만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란 말의 무의식은 서로 통하는 것이지요. 열심히 자기계발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하기 마련인 삶의 태도, 세계관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가장 한국적인 아비(국가-사회-부모)의 자세일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 "넌 개밥의 도토리야"였습니다. 참, 우습죠. 이제 막 10살이 되는 소년에게 서른아홉에서 마흔 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할 운명을 지닌 아버지가 들려주는 마지막 말이 "넌 개밥의 도토리"라니. 일찌감치 부모를 잃고(어머니는 지금도 생존해 계십니다만) 누이와 함께 친척집에 얹혀살게 되었으니 그 처지야 "개밥의 도토리"에 비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도 그 순간 꼭 그렇게 말해야 했을까 곰곰이 반추하게 됩니다. 사람 밥그릇도 아닌 개 밥그릇에 담긴 도토리 한 알…. 도토리 한 알의 생각이 개 밥 그릇을 넘어서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개 밥그릇이 내가 되고, 대한민국이 되고, 세계가 되고, 우주를 생각하게 되기까지 말입니다. 무위당 장일순의 '좁쌀 한 알'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이야기에 제 나름의 해설을 덧댈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일 수 있는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마치 반칠환 시인의 시, “지구는 제비꽃 한 송이를 위한 화분”이란 표현처럼...
우주 앞에서 겸손하기 위해선 개 밥그릇에 담겨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산다는 일에 대해 알게 되면서 섣불리 절망이나 희망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루쉰이 어느 헝가리 시인의 말을 인용해 우리에게도 널리 퍼진 "절망은 허망하다. 희망이 그러하듯…."이란 말처럼 저에겐 절망도, 희망도 뭔가 정지된, 종료된 사람의 독백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평생 미완의 시대를 살아가지요. 죽음이 우리 삶을 강제로 멈추지 않는 한 삶은 계속되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계속 존재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이 끝나더라도 또 다른 좁쌀 한 알이, 개밥의 도토리들은 또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가겠지요.
때로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이미 죽어버린 사람 같습니다. 다 살아버린 사람처럼 지금은 그 유령이 이승에 미련을 두고 떠나지 못한 채 배회하고 있는 거라는…. 바람구두라는 한 문화망명자가 혁명의 희망도, 가능성도 사라진 시대에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꿈꾸며,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한 왕자의 심장이 납덩이였다는 사실이 어렸을 때는 참 충격이었죠. 왜 하고 많은 물질 중에 납이었을까 하고요. 그것은 아마도 납이란 금속이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생각하기엔 가장 하찮은 금속, 가장 값없는 금속이었기 때문이었겠죠. 오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은 그와 같은 하찮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 자신, 이 세상에서 그 하찮은 존재들이겠지요. 유리지갑 속에 담긴 월급을 차압당하고, 회사에선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그나마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이나 그렇지 않은 이나 모두가 불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누구 하나 주목해주지 않는 개밥의 도토리이자, 좁쌀 한 알인 우리들의 그 하찮음이 실제로는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되고, 행복한 왕자의 납덩이 심장처럼 세상을 따스하게 덥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미완의 시대에….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저만 저처럼 살지 않았겠지요. 다만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그 자식들이 '아비'가 되어서도 '에비'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 모두 그 멍에를 짊어지고, 아비와도 싸우고, 에비와도 싸우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슬픈 깨달음이 묵직한 아침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