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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공화국
‘갑(甲)질’이란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가 농(膿)익은 증거다. 물론, 갑질의 형태에 층층시하(層層侍下)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서 이것을 계급이라는 단일한 척도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중이 갑질을 수용하는 원인에 대해선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음을 전제로 이야기해보자.
지금 우리 사회의 갑질 논란은 식민지 체험과 분단 그리고 전쟁 이후 기존의 봉건적 계급질서가 한바탕 와해되고 재구성되었던 혁명적 경험 이후 새롭게 재구성된 지배질서(부르주아지)가 3대~4대에 걸쳐 고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갑질’은 결국 계급의 문제이고, 정치경제학적 문제이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갑질’이 부각되는 현상을 문화적으로 살펴본다면 그 원인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문화적 차이와 양상이 더 이상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는 증거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fact)로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었지만,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진실은 그 말의 진위여부가 아니라 대중 사이에 그 말이 황후라면 그렇게 말했음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널리 수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활감각으로 공유하는 일상의 문화적 차이가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서로 다른 세계, 비동시성의 동시성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우리 사회는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면 된다'는 자수성가의 신화와 가난한 집 아이들의 서울대 입학기처럼 노력하면 누구나 보상받는다는 '학력주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야 했지만, 오늘날의 지배는 더 이상 그런 외피로 포장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모순이 증폭되고 있으며 반대로 피지배 대상의 정치적 약화가 두드러져 보인다는 것이다.
갑질의 횡포는 크게 위의 두 가지 원인이 동시에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갑질하는 자들이 스스로 그런 태도를 당연하게 여길 만큼 기존의 예의염치 질서(대중의 윤리감각)의 상실이 일반화되어 둔감해질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짓밟아도 저항하지 못할 거라는 안심이다. 갑질의 끝은 결국 무엇일까? 내 생각엔 한 겨울의 고슴도치가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된다. ‘예의 바른 경멸’ 또는 ‘격리’. E.P.톰슨이 연구한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이란 결국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는 점점 불의(不義)는 잘 참고 불이익은 못 참는 존재가 되고 있다. 거악(巨惡) 앞에서는 침묵하거나 눈치보고 소악(小惡) 앞에서는 흥분하고 거품을 문다. 백욱인은 『속물과 잉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재산과 지위를 축적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다. 그러나 정작 자기 주체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없다. 위선자와 졸부 중에 많았으나 이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할 만큼 대세가 되었다. 계산에 매우 치밀하고 자기 소유와 관련된 사안에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을 보인다.”
우리가 희망을 걸어봄직한 한 가지가 있다면, 대중의 폭발은 지배대상이 저들은 이제 우리가 아무리 세게 짓밟아도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할 거야라고 방심할 만큼 약화된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