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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일지도 모르겠으나, 뜻밖에 최근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너무나 큰 절망과 자책에 빠져있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부디 제발 너무 지나치게, 너무 오래도록 그러지는 마시길 바란다.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그렇다. 한 가지는 대한민국을 지나치게 선진국(민주주의)의 관점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앞서 적폐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야기했지만,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민주주의해보려고 했던 시절이 그리 길지 않다.
한반도 역사가 5천년 역사일지는 몰라도 대한민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롭게 독립한 국가다. 우리가 홍익인간이니 뭐니, 조선 시대 세종대왕이니 해서 '인본주의'를 말하고, 지금도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서 조선의 개국정신을 새롭게 재조명하고 있지만, 그것이 민본주의라도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다만, 우리에게도 그러한 전통과 역사적 뿌리가 있으므로 우리 스스로도 충분히 앞길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긍심을 가지는 정도로만 이해하자. 언젠가 나의 편집부 후배(사학과 출신이다)에게 구한말 의병운동과 3.1운동이 가지는 차이와 그 의의가 뭔지 아느냐 물었더니 교과서식으로 풀어대기에 한 마디로 정리해주었다.
의병운동은 무력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은 결국 전제왕정을 복구하잔 운동이었지만, 3.1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의 민주공화정을 건설하잔 운동이었기에 우리나라 정부의 기원을 거기에서 삼는 거다. 실제로 의병운동의 내용을 살펴보면 평민 의병장이 양반 의병장에게 대들었단 이유로 목이 잘리기도 했으며, 한양진공작전을 추진하던 의병장 사령탑의 부친이 별세하자 3년상 살러 낙향했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하기도 했다.
물론 3.1만세운동의 내용도 따지고보면 이른바 민족지도자란 이들이 모여 일제에게 독립을 청원한 것에 불과했고, 민중이 과격하게 나설까봐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민중의 운동이었고,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생각해보면 그로부터 아직 100년도 안 되었다.
두 번째 역시 틈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인데, 영웅이나 왕조의 역사관으로 보면 대업이란 언제나 당대의 내가 완성해야 하는 과제이나 민중의 역사관으로 보면 어떤 대업도 반드시 나의 대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없다. 물론 이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천시'라 하니 내가 대단한 운명론자라도 되는 듯 오해할 수도 있겠으나 천시란 단순히 하늘이 운명적으로 내린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대단히 80년대적인 용어로 그 사회의 사회구성체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제반 조건을 갖추고 있거나 그렇게 도약할 수 있는 하부구조들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대단히 많은 희생을 두고 천천히 굴러가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엔가 분명히 초월의 순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나는 늘 광주의 마지막 날 도청 안에서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윤상원 열사를 비롯해 그날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모두 아직 천시가 이르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신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도 도청을 사수할 수 없는 것을 알았으며, 자신들이 죽어도 당장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었다.
누군가는 그때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고, 그들은 그날 그 자리에서 죽었기에 영원히 살게 되었다. 내가 만약 운명론자이거나 낭만주의자라면 오로지 그 사실을 믿는다는 이유에서만 그렇다. 민중적 역사란 전설이나 신화와 같다. 각각의 개개인은 소멸되거나 잊혀져도 민중적으로 내 안에 체현된 역사는 내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억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저항하는 자는 언제나 나타나게 된다. 내가 믿는 진리란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그러므로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실망과 절망 사이를 넘나들지 말길 바란다. 희망이 그러하듯 절망 또한 덧없나니 당신의 의지로서 전진하라. |
